1,445명의 피해자를 낸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인재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5년 6월29일, 지상 5층, 지하 4층의 서울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렸다. 백화점 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더미에 파묻혔다. 생존자 구조와 시신 발굴 작업이 한 달 반 정도 계속됐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설계·시공·유지관리의 부실에 따른 예고된 참사였다. 1년 전의 성수대교 붕괴사건(1994년 10월 21일)과 함께 압축성장의 그림자로 기록되고 있다.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6월29일 오후 5시57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20초 만에 무너져 내렸다. 당시 이 사고로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 총 1,445명이 피해를 입었다.
지상 5층, 지하 4층, 그리고 옥상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삼풍백화점은 설계 시 대단지 상가로 설계되었던 것이 정밀한 구조 진단 없이 백화점으로 변경되어 1989년 완공됐다. 그 후에도 무리한 확장공사가 수시로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붕괴사고가 일어나기 수개월 전부터 균열 등 붕괴 조짐이 있었다. 1995년 4월경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5월경부터는 이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화점 측은 응급조치로만 대응했다. 그러다 1995년 6월29일 오전 5층에서 심각한 붕괴 조짐이 나타났지만 당시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기로 결정했고 우려했던 참사가 벌여졌다. 결국 오후 5시 57분, 5층 바닥의 가장 약한 기둥 2개가 무너지며 그 기둥이 옥상까지 끌어당기면서 건물 붕괴는 시작되었다. 오후 6시 직전에 5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20초 만에 모든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건물은 지하 4층까지 완전하게 매몰되었으며, 안에 있던 1,500여 명의 사람들은 잔해 속에 묻히게 되었다. 재산 피해액은 2,700여 억으로 추정되었고 전 삼풍그룹 회장 이준(1922~2003)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해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는 등 백화점 관계자와 공무원 등 25명이 기소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적 피해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는 지어진 지 6년 만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는 설계와 시공, 감리의 부실, 그리고 행정기관의 감독 소홀 등 총체적인 부실이 빚은 사고로 조사됐다. 이 사고를 계기로 건물들에 대한 안전 평가가 실시되었고 긴급구조구난체계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119중앙구조대가 서울·부산·광주에 설치되었다.

[1968년 6월5일] 로버트 케네디 피격
1968년 6월5일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LA에 있는 엠배서더호텔에서 피격됐다. 캘리포니아주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자축 연설을 하고 나오는 순간 로버트 케네디는 머리에 총탄 4발을 맞고 쓰러진다. 저격범은 요르단계 이민자.
케네디가 암살된 후 그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됐던 그는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형인 존.F.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지 4년5개월 만에 암살당해 형의 비극적 전철을 밟았다. 그의 나이 마흔세살, 그의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의 형 옆에 묻혔다. 하지만 암살의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에 변호사가 됐다. 1960년에는 형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관장했다. 이후 법무부 장관과 상원의원을 지냈다.
미국의 ‘정치 가문’으로 미국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케네디가문은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 이후로 1명의 대통령, 3명의 대통령 후보, 3명의 상원의원, 2명의 하원의원을 배출해냈다. 하지만 후손 중 8명이 사망하는 등 잇따른 비운을 겪었다.

[1844 6월6일] 영국 런던서 기독교청년회 ‘YMCA’ 창설
YMCA운동의 발단은 1844년 6월6일 죠오지 윌리암스(George Williams)를 비롯한 12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창설된 런던YMCA가 그 시초다. 이들은 산업혁명 직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상태의 개선을 도모하는 하나의 협회를 만들고 이 운동이 구미각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1855년에는 파리에서 제1차 YMCA 세계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YMCA의 근본원리가 되는 파리기준을 채택, 세계YMCA연맹(The World Alliance of YMCAs)이 결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랜 평신도의 범세계적 운동체로 발전해 왔다.
유럽으로부터 북미주지역으로 확산된 YMCA는 1878년의 제네바 세계대회에서 세계YMCA연맹 이사회를 설치한 이래 전세계적으로 운동의 확장을 이루었다.
1955년의 파리 100년제를 계기로 세계YMCA는 주체성 재확립을 위해 파리기준을 재확인하는 등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1973년 우간다의 캄팔라 세계대회에서는 캄팔라 원칙을 채택하고, YMCA의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더 큰 사회적 책임과 관심을 강조하게 된다.
16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세계YMCA운동은 이 시기에 제3세계 나라들로 확장되어 세계 120여 개국에 1만 2,000여 개의 조직을 가진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총본산이다.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국제선교협의회(IMC) 및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모두 죤 알 모트(J.R.Mott)를 비롯한 YMCA지도자들의 직접적인 지도력과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세계 적십자사도 YMCA의 초창기 지도자였던 앙리 듀낭(Henri Dunant)에 의해 1876년에 창설되었다.
YMCA는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의 준말로 ‘기독교 청년회’라는 뜻으로 YMCA운동의 정신적인 근원은 독일 스페너 목사의 경건주의에 의한 영적·정신적 각성에 있으며, 만인사제론에 입각한 평신도성의 자각, 선교에의 정열과 기독교 일치 운동에의 소망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는 1903년 10월28일 정회원 28명, 준회원 9명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로 창설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2·8독립선언의 산실로써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부터 고교 Y, 중학Y, 대학Y, 청년Y, 와이즈멘 클럽 등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동안 물산장려운동, 계몽운동, 농촌운동, 전쟁구호운동, 청소년운동, 부정부패추방시민운동, 한강물되살리기시민운동 등을 전개해 왔다.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1년 독일·소련 개전(開戰) 이래 독일의 주력부대를 맞아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던 소련은 영국·미국 양측에 북프랑스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영국 수상 W.처칠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신중론 때문에 실현이 지연되었다. 1943년 11월 말 미국·영국·소련 수뇌들은 테헤란 회담에서 1944년 5월1일까지 북프랑스에서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을 확인하였다. 1944년 6월6일 미국의 D.D.아이젠하워 대장의 총지휘하에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 등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이날 상륙 당일은 수송기(輸送機) 2,316대와 많은 글라이더를 동원하여 공수부대 병력 3개 사단을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거점을 확보하고 함정 수천 척의 호위 아래 수송선으로 보병과 기갑부대 7개 사단을 5개 지점에 상륙시켰다. 그 엄호 아래 항공기 총 1만 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하여 7개 사단이 상륙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7월2일까지 연합군 병력 100만여 명, 군수물자 57만여 톤, 각종 차량 17만 량이 상륙했다.
상륙 초기 3주 동안 연합군측은 전사 8,975명, 부상 5만 1,796여 명의 인명피해를 봤고 독일군 4만 1,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쟁 초기 서부전선에서 패해 유럽대륙에서 퇴각한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96년 6월7일] 음반 사전심의제 폐지
1996년 6월7일 우리나라 대중음악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졌던 음반에 관한 사전심의와 사후제재가 철폐됐다. 7개월 전 정기국회에서 개정, 공포된 ‘음반과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이날부터 시행됨에 따라 가요 음반 제작과 수입 때 의무적으로 받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그러나 유해음반에 대해서는 공연윤리위원회가 선별 심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다. 음반 사전심의제는 1933년 일제가 ‘레코드 단속 규칙’을 제정한 이래 63년 동안 지속됐다.
금지곡은 일제 강점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시대 최초 금지곡은 ‘아리랑’과 ‘봉선화’다. 우리 민중들이 아리랑을 부르면서 시위나 집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역대 금지곡을 살펴보면 ‘키다리 미스터 김’(이금희·1966년·단신인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 불편), ‘물 좀 주소’(한대수·1974년·물고문 연상), ‘시대유감’(서태지와 아이들·1995년·사회비판적 가사) 등 1,000여 곡 이상이다.
당시 음반 사전심의제 폐지로 정태춘 씨의 앨범 ‘아, 대한민국’을 비롯해 불법 딱지가 붙었던 대중음악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이날 정태춘 씨와 윤도현, 장사익 씨 등 대중음악인들은 서울대 문화관에 모여 ‘자유’라는 제목의 자축공연을 펼쳤다.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 피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화합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다. 육군 소위 안두희는 1949년 6월26일 일요일 오전, 서울 서대문 근처 백범의 거처인 경교장(현재의 강북 삼성의료원)으로 찾아가 45구경 권총으로 백범을 사살했다. 당시 안두희는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선생은 내가 죽였소”라고 태연하게 말하며 검거에 순순히 응했다.
백범의 죽음은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을 갈망하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백범의 장례식은 국민들의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그가 타계한 지 13년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김구 선생의 암살은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이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암살범 안두희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판결 석 달 뒤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풀려나 바로 군에 복귀했다. 안두희가 백범 암살 1주일 전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사실 등으로 인해 배후에 대한 의혹이 일었지만 그 전모는 그가 1996년 10월 피살될 때까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3·1운동 뒤 중국에 망명, 1940년 중경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항일 의거를 지휘하는 등 광복군을 조직해 일본과 대항하여 싸웠다. 1944년에 주석이 되어 군대 양성에 노력하다가 해방을 맞아 1945년 귀국했다.

[1992년 6월30일] 씨랜드수련원 참사
1999년 6월30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에 있는 청소년 수련시설인 놀이동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서 화재가 발행한다. 화재 발행 1시간이 지난 새벽 1시41분, 신고를 접수한 소방서에서는 화재사고 현장에 소방차 20여 대와 소방관 70여 명 경찰 250여 명 등을 출동시켜 화재진화와 인명구조 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신고가 너무 늦어진데다 화재현장에서부터 70㎞ 떨어져 있던 소방서로 진화작업이 재빨리 이루어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화재가 발생하면서 생긴 유독가스와 건물 붕괴위험 등으로 진화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화재는 가장 처음 수련원 3층 C동 301호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다. 화재의 진원지인 301호실은 대부분 5~6세인 유치원생이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다가 봉변을 당했다. 이 화재로 당시 취침 중이던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련원은 콘크리트 1층 건물 위에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2~3층 객실을 만든 임시건물로, 청소년수련원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고 여러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구조물이었다. 생활관에는 화재경보기가 있었으나 불량품으로 판명되었고, 소화기 14개 중 9개가 작동되지 않았으며 소화전의 물도 나오지 않아 안전점검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냐는 지적이 나왔다.
어린 아이들의 희생이 따랐던 씨랜드수련원 참사는 전 국민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가슴 아픈 사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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