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 234호=김길수 발행인] 언론이 온통 ‘리스트’ 타령이다. 연예계는 물론 문화계 전반을 타격한 블랙리스트가 한창 시끄럽더니 이제는 화이트리스트가 난리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연예인 명단인 블랙리스트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에 우호적인 연예인을 지원·육성하기 위한 ‘화이트리스트’도 함께 운영했다는 것이 요지다. 파문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고, 연예계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이미 인터넷에는 증권가 정보지를 타고 흘러나온 수십 명의 화이트리스트 연예인 명단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고, 네티즌들은 문성근, 김미화, 김규리 등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 명단이 공개된 것처럼 화이트리스트에 오른 연예인 이름도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위해 명단 공개를 요구하는지 묻고 싶다. 그들을 어디다 세워 무엇을 할 요량인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떳떳하고 화이트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부끄러운가. 화이트리스트에 오른 이들이 권력에 빌붙어 그 상에서 떨어지는 떡고물만으로 배불렸다면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과 같이 피해자인 것이다. 한 연예인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에서 좋은 일을 하자고 하는데 정치 성향을 이유로 무턱대고 거절하는 연예인이 얼마나 되겠냐’고. 그러면서 이런 식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매번 몸을 사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푸념한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우리 사회가 이렇게 진영논리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돌아본다. 문득 어린 시절 교훈적으로 들었던 이솝우화의 박쥐이야기가 떠올랐다. 새들과 동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자 박쥐는 이기는 편에 서기로 마음먹는다. 짐승이 이길 것 같으면 날개를 접고 짐승인 체 하면서 짐승 편에 서고, 새들이 이길 것 같으면 날개를 펴서 새들 편에 서며 양 진영을 왔다갔다하다 결국 양쪽이 화해를 하자 어디에도 끼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다 어느 한 진영을 골라 그 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지대는 그래서 불안해하는 것일까. 이 이야기에서 박쥐가 양 진영을 왔다갔다할 것이 아니라 애매한 자신의 처지를 자각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지대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자신의 소신이나 신념을 좇아 양쪽을 다 포용하거나 비판할 수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한 해법의 하나로 지목받는 것이 청소년에 대한 ‘민주주의 시민교육’이다. 가치관이 형성되는 청소년의 시기에 좌·우 진영논리가 아닌 중립적 시각에서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민주주의 시민의식을 함양하게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뉴질랜드에는 ‘교과과정의 회색지대(gray area in curriculum)’라는 것이 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은 철저히 중립적 존재다. 어떤 이슈를 특정이념으로 교육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회색의 존재’인 것이다. 학생들이 특정 정치이념에 물들지 않도록 중립적이고 민주적인 시민교육을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였다. 우리도 이제 이런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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