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초월에 의한 본질적 근거의 세계인 고차원적인 섭리 법칙을 인간의 심리적 사건으로 상징화하여 매우 체계적으로 기록한 ‘영적 역사의 기록’이요, 신성(神性)의 ‘인격 소설’이다. 다시 말해 성서는 신(神)의 세계를 인간의 인격적 심리에 비추어 비유적으로 표현한 글, 즉 인격적 신화이며 성화(聖話)이다. 따라서 성서는 이성적 사유와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여타 종교의 경전(經典)들처럼 귀납적인 방법에 의한 인간의 사유를 매개로 하여 신에게 도달하는 접근방법과는 달리, 성장하여 완성되어진 인간만이 활용할 수 있는 영성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진리를 대언하게 하는 심오한 ‘정신의 영성심리학’이다. 그래서 성서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영성(靈性)인간을 찾는 것이며, 또한 도덕률을 위해 신의 필요를 이성(理性)적으로 요청하게 되는 그런 차원 높은 인간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성서의 로고스(Logos)적 첫 인간인 ‘아담’이다. 따라서 아담은 신화적 존재의 주인공이요, 인격(人格)철학적 인간의 상징이며, 인격적 사랑의 첫 아들이다.

성장이론에서 볼 때 성장의 완성기는 사랑의 인격기이다. 그래서 성서의 아담은 차원이 다른 인간이며, 사랑이라는 가치를 회복하여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 즉 인격을 갖춘 아담이다. 따라서 성서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의 유형이 성경(聖經)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완성된 인간은 신의 거울이기 때문에, 신은 완성된 인간의 거울이다.”
“신은 오직 완성된 인간과 소통한다. 왜냐하면 완성된 인간에게만 자유의지인 재(再) 창조력이 무궁무궁 샘솟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성된 인간은 재창조를 위하여 신과 교류할 수 있고, 신을 체험할 수 있는 ‘의식 초월의 주관성’인 ‘영성’과 ‘신성’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은 자연의 법칙과는 인격적인 대화상대로 설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대화를 시도하게 된다면 그것은 독백일 뿐이다. 따라서 자연법칙을 바탕으로 하는 경전종교는 소극적 종교이며, 그 종교의 신은 결국 양자의 신(神) 내지는 의붓아버지의 신이요, 철학적 이성의 신(神)인 상대적 절대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완성된 인간은 신과 인격적 부자관계를 이루게 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은 14장 9절)’라고 말한 그리스도의 언명을 새겨볼 일이다. 필자는 앞에서 인간은 신의 정자(精子), 또는 신의 증손자(曾孫子)라고 했었다. 신은 인간의 영혼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한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달란트가 다르듯이 사명 또한 각각 다른 신의 메신저이다.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바로왕도 모세도 여호수아와 갈렙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사울도 다윗도 솔로몬도 알고 보면 신의 섭리의 법칙을 인격적 인간을 통하여 사명으로 계시한 하늘의 메신저, 즉 체계적 논리성을 갖는 메신저로서의 계시의 상징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인격적 신(神)들인 성서의 중심인물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의 사명에 합당한 이 땅의 인물을 선택하여 현세에 내려와 그를 절대적으로 주관하며, 자신이 부여받은 하늘의 뜻인 창조적 프로그램을 역사적 현실과 결합하여 끝끝내 재창조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서의 창세기는 창조적 계시다’라고 웅변한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한번 유심히 관찰하여 보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서의 창세기와 동일한 사건들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유독 한반도의 역사 안에서 수도 없이 나타나는 놀라운 사건의 동시성과 동일성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그 뜻의 완성을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나타나고, 또 앞으로도 어김없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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