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인조 15년) 호남지방 암행어사 성이성(成以性). 그는 눈보라가 심한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춘향이의 고향인 전라도 남원 광한루로 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서리와 함께 난간에 앉으니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있고 대나무 숲이 희었다. 나는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여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성이성이 임금에게 받은 어사화, 영주에 있는 묘의 비문, 광한루 사적비에 나타난 성이성은 춘향전의 이몽룡과 비슷한 점이 많다. 성이성은 아버지가 남원부사를 역임하던 시절 남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이후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남원을 떠나야 했다. 이는 이몽룡이 춘향과 헤어지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성이성의 과거급제 사실은 규장각이 소유하고 있는 과거 합격자들이 명단 기록서인 ‘국조방목’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는 3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정기 과거시험인 식년시에 합격했다. 과거에 합격한 후 성이성은 4차례나 암행어사를 하게 된다. 이에 대한 기록은 그가 친필로 쓴 ‘암행일지’ 원본과 ‘인조실록’의 어사파견 기록에 있는데 성이성의 이동경로는 이몽룡의 행적과 거의 같다.
 
성이성이 이몽룡처럼 변사또를 응징한 남원 출두 기록은 없다. 그러나 춘향전에 나오는 잔치에서 이몽룡이 읊은 금준미주시를 성이성이 읊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교와문고’와 그의 스승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존 모델임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춘향전에서는 성씨 성을 몽룡이 아닌 춘향에게 붙여 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이성의 내력에 대해서 공개를 거부하고 숨기기만 하던 성씨 문중이 최근에 들어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음을 인정했다. 즉, 그 후손들이 기생과 사랑 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공개를 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사연이다.
 
순천에서 출두하였던 성이성은 이후 암행을 끝내고 남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눈보라가 심해 앞을 분별하기 힘든 날씨에도 불구하고 굳이 광한루로 나갔다. 그곳에서 성이성은 늙은 기생 여진과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여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고 그의 일기는 적고 있다.
 
어사일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광한루 방문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소년시설의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춘향전의 줄거리가 실존 인물을 토대로 한 것임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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