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목숨 앗아가

미국 최대의 도시이자 세계 금융의 도시 뉴욕. 비즈니스의 온상지였던 이 도시가 일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2001년 9월11일 아메리칸 항공 소속 AA11편이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돌진,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던 세계무역센터는 붕괴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국제금리가 단숨에 하락하고 세계 증권시장들은 크게 흔들렸다. 21세기 최대의 희생자를 낸 9.11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2001년 9월11일] 세계를 경악케 한 9.11테러
2001년 9월11일 오전 7시59분 92명의 승객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 소속 AA11편이 보스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날아올랐다. 이어 8시1분 4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93편이 뉴저지주에서 샌프란시스코로, 8시14분 6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175편이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9시 64명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의 AA77편이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각각 향했다.
오전 8시45분.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편이 미국 뉴욕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가운데 북쪽 건물과 충돌한다. 이어 9시3분 유나이티드항공의 UA175편이 남쪽 건물을 들이받는다. 9시40분, AA77편이 위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충돌하고 이어 9시50분에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붕괴된 뒤, 10시3분 UA93편이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한다. 10시29분에는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여파로 17시25분 47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7호 빌딩도 주저앉았다.
세계 경제의 중심부이자 미국 경제의 상징인 뉴욕이 하루아침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9.11테러는 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CNN 방송망을 타고 시시각각으로 사건 실황이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가 경악했다. 그러면서 국제금리가 단숨에 하락하고 세계 증권시장들이 크게 흔들렸다. 미국은 사건 직후 일주일간 증권시장을 열지도 못하였으며, 미국을 오가는 모든 국제 항공선도 차단되었다.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제2의 진주만 공격’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미국 건국 이래 본토의 중심부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266명 전원 사망, 워싱턴 국방부 청사 사망 또는 실종 125명, 세계무역센터 사망 또는 실종 2,500~3,000명 등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명 피해만도 2,800~3,500명에 달한다. 경제적인 피해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가치 11억 달러(1조 4,300억 원), 테러 응징을 위한 긴급지출안 400억 달러(약 52조 원), 재난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약 52조 원) 외에 각종 경제활동이나 재산상 피해를 더하면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납치당한 4대의 항공기에는 3~5명의 납치범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조사 결과 범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출신의 조종사들로 알려졌다. 미국은 용의자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인 알카에다를 지목했다. 미국은 같은 해 10월7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한다.

[1997년 9월5일] 빈자(貧者)의 성녀 세상에 잠들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헌신한 테레사 수녀가 1997년 9월5일 인도 캘커타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87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테레사 수녀가 타계하자 전 세계는 인류사에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성녀의 영면을 기원했다.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은 엿새 뒤인 9월13일 거행되고 유해는 ‘사랑의 선교회’ 구내 묘지에 묻혔다.
1910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테레사 수녀(본명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18살에 고난의 길로 들어선 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수녀생활을 하며 극빈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928년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간 뒤 인도 국적을 취득하고 캘커타의 빈민가에 살면서 센트메리고등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다.
그녀가 1950년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지구촌 120개 나라에 4,400여 명의 수녀와 평수사 등을 보내 장애인과 고아, 에이즈환자 등을 돌보고 있다. 테레사 수녀가 세운 병원과 구호시설이 인도에만도 168곳이 있으며 전 세계에 517곳에 이른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상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납했고 교황이 선물로 준 차도 팔아서 나환자수용소를 짓는 데 썼다. 테레사 수녀는 선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설립 승인을 받은 뒤 총장을 마더(Mother)로 호칭키로 한 회헌에 따라 그 뒤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그녀는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한 구호,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 여전히 전세계에서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인도 여성 모니카 베스라의 복부 종양이 치유된 것을 테레사 수녀가 일으킨 기적으로 공인하여 故 테레사 수녀는 2003년 10월 시복식에서 성자 바로 아래 단계인 복자로 서품되었다.

[1251년 9월25일] ‘팔만대장경’ 세계 속에 피어나다
1251년 9월25일은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고도 불리는 팔만대장경 조성이 완료된 날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 경판은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종교적인 염원으로 국란을 극복하고자 만든 불교 목판경으로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8만 4,000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 68㎝ 혹은 78㎝이며 폭은 약 24㎝, 두께는 2.7~3.3㎝의 범위이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 정도이다. 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다.
고려 현종 때에 초조(初雕) 대장경이 만들어졌으나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고 선종 때에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하였으나 이 또한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다. 그 후 1236년 몽골의 침공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이 강화에서 조판되었다. 일본은 고려 말에서 조선 중종 때까지 80여 회에 걸쳐 대장경판을 요청한 바 있으며 그 결과 경판 대신 종이에 인쇄된 60여 본이 일본 측에 기증, 고려대장경은 일본 대장경의 모체가 되었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8만 1,258장으로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하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대장경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 보관되었던 것을 조선 태조 7년(1398년) 서울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글씨가 아름답고 오탈자가 전혀 없어 현존하는 3,000여 종의 한역 장경 가운데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아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04년 9월19일] 중국 장쩌민 퇴진, 후진타오 시대 개막
2004년 9월19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장쩌민이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내놓았다. 이로서 후임 군사위 주석직을 후진타오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가 이어받았다. 이에 따라 후진타오 주석은 당권에 이어 군권까지 한 손에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중국은 제3세대 지도부에서 제4대대 지도부로 권력 승계를 완료, ‘후진타오 시대’가 본격 열렸다.
총명하면서도 온화하고 겸손하다는 평을 듣는 후진타오 주석은 일찍부터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의 뒤를 잇는 중국 제4세대 지도자로 꼽혀 왔다. 지난 2002년 11월 당 총서기에 오른 후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4개월. 예상보다 빨리 ‘후진타오 시대’가 열린 것은 그의 국정운영능력이 충분히 검증됐기 때문이다.
장 전 주석의 구체적인 사임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강 문제에 의한 것이라고 주변 소식통은 전했다. 그러나 당시 거세졌던 퇴진 압력을 의식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지난 2004년 8월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모든 권력을 장쩌민에게 이양하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덩샤오핑의 예를 들면서 이양을 미루고 있는 장 전 주석이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일었다. 또한 잇따른 장쩌민 측근들의 비리로 장쩌민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중국이 1949년 공산혁명에 성공한 이후 처음으로 반대파나 지도층에 대한 숙청 없이 무혈 권력승계가 이뤄지게 됐다.

[1923년 9월1일] 일본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분경, 일본 관동 지방에 규모 7.9의 대지진이 엄습한다. 요코하마는 도시 전체가 괴멸되고 도쿄에서는 화재로 밤 기온이 46도까지 오르고 해안엥서는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건물이 쓰러지는 등 곳곳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지진으로 9만여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행방불명됐으며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전신, 전화, 철도를 비롯하여 전기, 가스, 수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문화시설이 파괴되었으며, 학교나 병원도 대부분 쓰러졌다. 당시 동양 제일이라는 수도 도쿄는 화재로 가옥의 3분의 2가 무너지고 불에 탓 18시간 만에 초토화되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각처에서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리며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시켰다.
일본은 폭동에 대한 전문을 만들어 고토 내무성 정보국장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타전했다. 전문 내용은 “도쿄 부근의 진재를 이용하여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한 목적을 이루려 하고 있다. 도쿄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린 자가 있어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도 충분히 시찰을 하고, 조선인들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2일 오후 계엄령이 선포, 군대와 경찰, 자경단 등이 조선인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조선인 노동자 나환산은 당시의 상황의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86명의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9월2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구정호 경찰서 연무장에 수용된 조선인은 300여 명이었는데, 그날 오후 1시경 기병 1개 중대가 도착, 경찰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다무라란 자가 조선인 3명을 불러내 총살하기 시작했다. 다무라는 총성을 듣고 일본인들이 놀랄지 모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이때 임산부도 한명이 있었는데,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뱃속에서 영아(瓔兒)가 나왔는데, 군인들은 우는 아이까지 칼로 베어 죽였다. 시체들은 다음날 새벽 화물자동차에 싣고 어디론가 운반해 갔다.”
이때 학살된 조선인이 적게는 2,500여 명에서 많게는 6,6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대진재(大震災)로 치안이 무너진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돌리게 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마치 로마의 대화재 당시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우고 그들을 학살한 정황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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