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제재에 움츠렸다가 경쟁체제에 돌입하며 급속한 성장세 보여

통신은 인류와 함께 발전해왔다. 통신 기술의 발달 수준이 그 사회 전반적 발달 수준의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첨단 통신 기술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인류의 통신의 발달 그 시작에는 AT&T가 있다.
AT&T(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 Corporation)의 역사는 187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용적인 전화기의 최초 발명가로 알려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 투자가인 가디너 C. 휴버드, 토머스 샌더스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AT&T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다.


1876년 보스턴대학 음성생리학과 교수로 근무하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미완성인 어떤 기기에 대해 특허를 냈다. 그리고 채 1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그 ‘어떤 기기’인 실험전화기는 사상 최초로 음성의 유선전송에 성공했다.
그해 3월10일 벨은 전자석 앞에 진동편을 놓고 이 진동편을 작동시키며 조수인 토머스 왓슨을 불렀다. “왓슨군, 용무가 있으니 이리로 와주게.” 이 대화는 인류 역사상 첫 전화통화로 기록되었고 이 전화기는 그 해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건국 100주년 기념 박람회. 벨은 박람회 한 구석 부스에서 전화기를 선보였다. 6월25일 저녁, 그의 부스에 박람회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인 브라질 황제 페드로 2세가 찾아왔다. 페드로 2세가 각별한 관심을 표하자 다른 심사위원들도 벨의 전화기를 시험해보았다. 벨은 부스에서 멀리 떨어져 송화기에 대고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의 대사를 읊었고, 이를 들은 페드로 2세는 “물건이 말을 하네”이라며 놀라워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특히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영국 과학자 윌리엄 톰슨 경은 “미국에서 봤던 것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물건”이라 평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벨은 100주년 상을 수상했다.

 

통화뿐만이 아닌 많은 돈을 벌게 해줄 기계
이후 진동판의 크기와 종류, 자석의 형태 등을 놓고 실험을 거듭한 벨은 이듬해 영구자석을 사용해 현재의 수화기에 가까운 것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매사추세추주 살렘의 군중 앞에서 이것을 가지고 31㎞ 떨어져 있는 왓슨과 통화하는 시범을 보였다. 자신이 발명해 낸 이 전화기가 단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의 통화하는 데에만 쓰이지 않고 많은 돈을 벌게 해줄 기계라는 것을 직감한 벨은 그 해 AT&T의 전신인 벨 전화회사를 설립했다.


이 시기 여러 발명가들은 전화기를 발명하기 위해 경쟁했다. 벨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당시 대기업이었던 웨스턴유니언사를 상대로 전화사업 개발경쟁을 벌였는데 그 시기 웨스턴유니온은 자체 전화기기와 자체 특허권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시어도너 N. 베일은 1878년 최고경영자가 되어 웨스턴유니온을 상대로 특허권 소송을 벌였다. 특허권 소송 외에도 자체적으로 경영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혼란스러웠던 웨스턴유니언은 결국 1879년 항복을 선언하고 전화사업 분야의 모든 특허권과 청구권 및 시설물에 대해 포기했다.
이후 미국 전화 사업은 사실상 벨의 독점체제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벨의 이러한 독점체제를 ‘벨 시스템’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1882년에는 서부전기회사 경영권을 대부분 획득하면서 전화장비사업까지 하게 되었다.
이 후 1883년에는 웨스턴 일렉트릭이라는 회사를 인수해서 AT&T의 내부 제조 부서로 만드는 작업을 완료했다. 그런 뒤 마침내 기술 부서를 설치했는데, 이 부서는 나중에 전설적인 벨 연구소로 발전했다. 벨 시스템이라고 불리게 된 벨 전화회사는 15만 5,000회선의 전화를 보유하고 1,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정부의 독점 제재에 지역전화 사업 분리
1885년 설립된 AT&T는 원래 장거리전화 설비를 담당하던 자회사였다. 처음에는 장거리전화 네트워크 설치 및 운영사업으로 시작했지만 1899년 당시 회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벨 시스템을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1900년 AT&T는 벨 계열의 중심 기업이 되었다.
1878~1887년까지 최고경영자를 역임했던 시어도어 베일은 1885년 회사를 AT&T라는 이름으로 재정립한 뒤, 미 대륙 구석구석에 흩어져 사는 주민들에게 장거리 전화를 서비스하기 위해 전국적 전화망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20년 후 다시 복귀한 베일은 1907년부터 1919년까지 AT&T의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벨 계열을 사실상의 단일 조직체로 만들었다. 베일은 벨 회사의 연관기업들을 주와 지방단위의 조직들로 통합했으며 많은 독립기업들을 합병해나갔다. 재직 중이던 1918년에는 AT&T가 국유화되어 미국 체신부의 감독을 받기도 했으나 1919년 다시 민간소유로 환원되었다.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AT&T였지만 시련도 있었다. 바로 그 ‘독점’이 문제였다. AT&T의 독주를 우려한 미국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제재를 받았던 것. 1913년에는 ‘킹스베리 서약’을 통해 독립적인 전화회사들이 AT&T의 장거리전화 네트워크에 상호 접속할 수 있도록 내주는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AT&T의 승승장구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AT&T는 다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독점이 문제였다. 1974년 미국 정부가 1949년에 이어 또 다시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반독점 소송을 제기해 온 것이다. 미 법무부는 “지역 전화 사업은 독점 상태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대신 장거리전화, 제조설비, 연구개발 분야 사업은 경쟁이 필요하다”면서 AT&T를 옥죄었다.
AT&T와 미 법무부의 법정공방은 이때를 기점으로 계속되었다. 결국 AT&T는 1982년 1월 손을 들었고 지역전화 사업을 분리하라는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AT&T는 1984년 1월1일부터 AT&T 그룹(엄마 벨)과 7개의 회사(베이비 벨)로 분리되었다. 니넥스, 벨애틀랜틱, 아메리테크 또는 아메리카정보기술회사, 벨사우스, 사우스웨스턴벨주식회사, 유에스 웨스트 및 퍼시픽 텔레시스 그룹이 그것이다.
이후 AT&T는 규제 분야의 시외·국제 통신서비스를 하는 AT&T커뮤니케이션스와 비규제 분야인 통신·정보 기기의 개발·제조·판매를 맡는 AT&T테크놀로지의 2대 부문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2005년 AT&T의 7개 지역회사 중 하나였던 SBC커뮤니케이션스가 AT&T 인수했고, 합병회사가 회사명 및 브랜드명을 SBC 대신 인지도가 높은 AT&T로 이용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AT&T로 태어났다.
이 시기는 미국 내에서 전신전화 사업의 탈규제화, 독점의 해체, 통신 산업의 눈부신 기술혁신에 따라 텔레콤 시장에 새로운 기업들이 속속 경쟁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시기였다. 이렇듯 새로운 환경에서 경쟁하기 위해 AT&T는 회사의 기술적인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생산비용을 절감하는 전략을 취했다. 회사의 조직을 ‘다운사이징(downsizing)’ 하고 전략적 사업 단위를 중심으로 전체 사업을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 통신업계의 지각변동’
오늘날 AT&T는 통신 및 커뮤니케이션 산업이 급속한 탈규제화의 물결 속에서 경쟁적인 첨단기술 분야에서 기존의 리더십을 유지하는 동시에 산업 자체의 급속한 국제적 팽창과 더불어 전 세계적인 규모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AT&T가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된 1984년과 그 이후 10년이 지난 1994년간의 변화를 보면 회사의 매출액은 603억 1,800만 달러에서 662억 100만 달러로 성장했고, 순이익은 84년의 17억 1,300만 달러에서 94년에는 41억 1,300만 달러로 급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84년의 주식 수익률은 10.5%였으나 94년에는 두 배에 가까운 21.1%를 기록했다.
이러한 가운데 2006년에 AT&T는 1984년 시장독점을 우려한 당국의 조치로 분할되었던 7개의 지역 전화사업자 중 하나인 벨사우스를 다시 합병했다. 이로 인해 당시 시장에서는 AT&T가 22개주에 걸쳐 7,000만 명의 유선전화 고객과 1,000만 명의 초고속인터넷 고객을 거느리게 된 것은 물론 연간 매출도 1,300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벨사우스와 공동 투자했던 5,400만 명 이상의 계약자를 보유한 싱귤러 와이어리스(Cingular Wireless)의 경영권도 100% 장악하게 되었다.
사실 벨사우스 합병은 벨사우스라는 한개 업체 합병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2005년 AT&T가 베이비 벨인 SBC 커뮤니케이션에 인수합병 되기 전 이미 SBC가 또 다른 베이비벨인 아메리텍과 퍼시픽 텔레시스 그룹을 흡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벨사우스를 합병함에 따라 사실상 7개중 4개의 베이비벨을 AT&T의 울타리 안에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업계 전문가들은 AT&T의 벨사우스 인수를 두고 ‘미국 통신업계의 지각변동’이라고 표현했다.
AT&T의 성장은 아이폰을 도입한 이후로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을 도입한 이후 미국 시장에서 급성장한 AT&T는 아이폰 2G, 3G, 3Gs, 4G까지 연이어 터뜨리고 거기에 아이패드까지 성공시킨 애플의 성공에 힘입어 아이폰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하지만 트래픽을 감당할만한 네트워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AT&T는 점점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결국 인수합병을 통해 이 부분을 보완해나갔다.
지난 3월 AT&T는 미국 내 무선통신업체 4위인 T-모바일 USA를 39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현지 언론들은 “AT&T는 미국 시장점유율 32%를 차지하는 2위 무선통신업체이며 T-모바일 USA는 미국 내 업체들 가운데 시장점유율이 가장 낮지만 거래가 체결되면 시장점유율은 43%로 늘어나 34.5%를 차지하고 있는 버라이존 와이어리스(Verizon Wireless)를 앞지르게 돼 미 무선통신업체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고 전했다.
AT&T의 T-모바일 인수는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최대의 인수합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AT&T의 발표에 따르면 AT&T의 지난 1분기 수치는 전년 대비 39%나 증가한 결과를 나타냈다. 지난해 같은 시기 순익은 24억 5,000만 원이었으나 올 1분기 순익은 34억 1,000만 원을 기록했다. AT&T는 애플의 인기상품 아이폰의 독점 판매권을 상실한 뒤에도 무선통신 서비스 분야를 포함해 매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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