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꼭대기에서 핀 코스모스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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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의 꼭대기에서 핀 코스모스 한 송이
  • 강충원 편집위원
  • 승인 2011.08.0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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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게 아니라 내가 피어야 가을이 온다”

이른 봄부터 가뭄이 시작됐다. 땡볕에 구름은 흩어졌다. 바람도 목이 말랐는지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메마른 웅덩이 근처에 고여 휘파람을 불어댔다. 세상이 너무나 뜨거워져서 논두렁에 꽂힌 쟁기도 붉게 달아올랐다.

단단한 쇠붙이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친 산새 한 마리가 다리쉼을 하려고 잠시 앉았다가 발만 데이고 푸드덕 날아올랐다.
하필이면 그 지독한 가뭄의 절정에서 코스모스 한 송이가 싹을 틔웠다.
더위와 목마름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웠다. 하지만 줄기가 여무는 동안 뿌리는 어느새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다. 꽃잎을 펼치는 동안 그 줄기는 앙상하게 야위고 있었다.
“무엇이 바빠 그리 일찍 피었니?”
바람이 코스모스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을 기다리란 말이니?”
“시원한 가을이 오면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아마, 가을은 오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니?”
바람이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가을이 와서 내가 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피어야 비로소 가을이 오는 것이니까.”
그리고 코스모스는 활짝 웃었다.
“너 참 대단하구나.”
바람은 멋쩍은 듯 코스모스 주위를 맴돌다가 인사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세상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입을 맞추기는커녕 눈길을 보내는 나비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코스모스는 쉬지 않았다. 그저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꽃을 피운 코스모스가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향기를 맡고 가을이 찾아올 거야.”
하지만 코스모스 향기는 논두렁 하나를 채 넘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의 애달픈 호흡은 밤이 깊어지도록 계속됐다. 보다 못한 바람과 산새들이 그를 말렸다.
“아무도 네 향기를 맡지 않아. 이제 그만 해도 돼.”
“괜찮아. 잠시 동안이라도 내가 피어있는 동안 당연히 해야 할 일이거든.”
먼동이 터 올 무렵 코스모스는 말라비틀어진 꽃봉오리를 땅에 뉘였다. 그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서럽거나 슬픈 일이 아니었으니까.
“땅은 쉽게 변하지 않는단다. 내가 싹을 틔우고, 눈을 감는 이 자리도 그러하지.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이곳에서 피었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년에도 역시 이 자리에서 다시 피어날 거야.”
싱그러운 풀잎과 다정한 벌레들이 없었고, 물기 없는 흙은 작년보다 다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단지 좋지 않았던 날씨 탓이었다. 가뭄 속에서 고집스레 핀 코스모스를 두고 어리석다고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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