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의 붕괴, 한국역사상 군부세력의 통치의 시작이 된 역사적 사건

제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을 필두로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을 이끌고 중앙청과 중앙방송국 등 서울에 있는 주요기관을 일시에 점령한다. 그리고 서울 중앙방송국 당직 아나운서가 박정희 소장의 요구대로 6개항의 혁명공약을 읽어 내려간다. “혁명공약!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둘째,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셋째,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넷째,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할 것, 다섯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여섯째,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 1961년 5월16일 새벽,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그렇게 붕괴되어 갔다.     

한강어구에 다다른 쿠데타 세력은 해병대, 공수여단, 제23사단 병력을 주축으로 진군하던 중 서울 진입을 저지하는 헌병들과의 총격전에서 승리하여 서울 입성에 성공하였고, 이어 주요 기관과 방송국 등을 장악하여 오전 5시경 방송을 통해 6개 항목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이어 오전 9시에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오후에는 국회 해산과 함께 정당과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정부 각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오후 7시에는 장면 민주당정권을 인수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쿠데타의 성공을 대내외에 알렸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얼마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고 쿠데타 두 달 뒤인 1961년 7월 박정희 소장이 최고회의의 의장에 오른다.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한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시행하였다.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 만인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한다.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5.16군사정변은 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 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52년 5월7일] 거제 포로수용소 소요사건

1952년 5월7일 발생한 거제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1952년 5월7일부터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포로들이 일으킨 일련의 소요사건으로 6월10일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끝났다.
당시 포로들은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거제 포로수용소의 제76수용소에서 소장인 도드(F.T.Dodd) 준장이 공산군포로들에게 납치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공산포로들은 도드 준장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포로학대 사실을 인정,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송환방침의 중지, 공산포로 대표단 구성의 인정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대립으로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고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도드 준장은 미군의 잔학 행위를 인정하고 나서야 사흘 뒤에 석방됐고 미국은 새 수용소장H. L. 보트너 준장을 임명하고 포로 17만여 명을 분산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포로들이 반공포로 105명을 인민재판 명목으로 살해했다. 공산포로들의 소요는 분산수용이 마무리된 6월10일까지 한 달여 간 계속됐다. 6월 7∼10일에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등을 일으켰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3년 7월27일 북한과 유엔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됐다.

[1970년 5월4일] 미국 켄트대학 학살 사건

켄트대학 학살 사건은 1970년 4월30일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미합중국 대통령이 “미군이 캄보디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도 희생할 것”이라고 미국 전역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튿날 켄트주립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내 공유지에 모여 데모를 시작하고 자정 경 마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5월2일, 시위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날 최루탄이 난사되고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며 착검된 총으로 한 명이 상해를 입었다.

5월3일, 1,000여 명의 주방위군들이 학생들을 통제한다. 당시 주지사 Rhodes는 “시위대들을 나치 행동대원과 공산주의 분자들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다. 그들은 反미국적이며 혁명가이며 오하이오주의 고등교육기관을 파괴하고 있다. 그들이 미국 땅에 발붙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마침내 5월4일 월요일 오후. 미국 오하이오주 켄트대학에서 학생 4명이 목숨을 잃는 참극이 벌어진다.
집회를 금지하고 해산을 명령함에도 불구하고 2,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계속하자 주방위군들은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에게 발포했다. 10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60여 발의 실탄이 발사됐다.

제프리 밀러(Jeffrey Miller)와 윌리엄 슈뢰더(William Schroeder) 등 남녀학생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8명이 총상을 입었다. 주방위군은 처음에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저항하자 최루탄으로 쏴 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최루가스가 주방위군에게 불어오자 총검으로 시위대를 밀어붙이다 갑자기 발포한 것이다.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2,000년의 유랑 끝에 공화국 수립

기원전 1900년 경 이스라엘 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였다. 기원전 11세기에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했으며, 다윗왕과 솔로몬왕 때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솔로몬왕이 죽자 기원전 922년에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먼저 이스라엘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기원전 722년), 약 1세기 후에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기원전 586년)된 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보호 하에 유대왕국이 다시 수립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저항했기 때문에 탄압받고 서기 70년 유대인의 세계유랑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럽의 유대인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다.

현대 이스라엘은 19세기 시온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1948년 5월1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탈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 유대인들이 2,000년의 유랑 끝에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UN총회는 여섯 달 전인 1947년 11월 유대인 국가 건설을 위한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승인했었다.

이스라엘 건국에는 영국의 도움이 컸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팔레스타인의 영국군 주둔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전세계 유대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벨푸어 선언은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담았다. 벨푸어 선언 이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아랍인들과의 대립과 게릴라전이 계속됐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언 이후에는 아랍연맹국 군대가 팔레스타인에 침입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개시됐다. 유대인들은 이르군과 하가나 등 민병대를 조직하여 아랍인들의 공격을 방어하였고, 서방과 미국으로부터의 무기지원으로 아랍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2차 중동전쟁(시나이전쟁)과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스라엘에 복수를 다짐하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시 중동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973년 10월6일, 드디어 이집트는 유대인들의 속죄일 욤키푸르 당일 이스라엘에 기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고 이스라엘은 멸망위기에 놓였다.(4차 중동전쟁) 하지만 이스라엘은 비교적 약한 시리아군이 포진한 곳을 공습하면서 전세를 역전하기에 이르렀으며 끝내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어냈다. 장기간에 걸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결과, 1993년에 PLO와 자치에 합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와 웨스트뱅크에 세워졌으나 현재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1956년 5월 12일] 한국 첫 텔레비전방송 개국

1956년 5월12일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방송이 시작됐다. 방송국 이름은 ‘코캐드(KORCAD)’. 미국 RCA사의 한국 대리점을 맡고 있던 황태영 씨가 정부의 의뢰로 라디오 자재 도입차 미국에 갔다가 RCA회사로부터 받을 수수료 대신 그 회사와 합작으로 TV기재를 도입해서 방송국을 설립했던 것이다. 한국의 첫 상업방송이기도 한 HLKZ는 아시아에서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네 번째, 세계에서는 열다섯 번째로 TV전파를 발사했다. 카메라 2대로 출발한 HLKZ는 출력 0.1kW에 9번 채널로 하루 2시간씩 방송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 296번지에 있는 RCA 빌딩 3층 스튜디오에서 오후 7시30분 선보인 첫 시험방송은 궁중 연례악 ‘취타’와 국악 합주곡 ‘수제천’이었다.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인기가수가 대거 출연한 쇼프로도 방송됐다. 시중에 설치된 TV수상기는 250여 대, 화신백화점 앞과 서울역 등에 설치된 TV를 통해 시청할 수 있었다. 당시 TV수상기 한 대 값은 14인치가 34만 원이었는데 당시 쌀 1가마니가 1만 8,000원으로 총 대수는 300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방송은 적자운영으로 운영권이 한국일보에 넘어가면서 개국 이듬해인 1957년 5월6일 이름이 ‘대한방송(DBC)’으로 바뀌었다. 1959년 2월에 불이 나 모든 방송시설이 불타고 1961년 문을 닫았다. 그 뒤를 이어 1961년 12월31일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했다.

[1973년 5월 17일]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 개시

1973년 5월17일,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 올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미 상원의 청문회가 시작됐다. 이 청문회는 텔레비전으로 미국 전역에 방송됐다. 이튿날인 5월18일에는 아치볼드 콕스(Archbald Cox) 하버드대 교수가 특별검사로 임명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작업이 본격화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원들이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정치적사건이다. 이 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벌인 범행이었다. 미 상원의 청문회와 콕스 특별검사의 집요한 조사가 진행됐고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사들도 이 사건을 끈질기게 취재해 보도했다. 콕스 특별검사가 임명된 지 5개월 만인 1973년 10월, 그를 해임하라는 닉슨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법무장관과 차관, 그리고 콕스 검사가 한꺼번에 해임당하는 이른바 '토요일의 대학살'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마되지 않는다. 대통령 직무실에서 이뤄진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증거물로 제출되면서 결국 닉슨 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의 부정·수뢰·탈세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당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악관과의 관계를 부인하였으나 진상이 규명됨에 따라 대통령보좌관 등이 관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 사이에 불신의 여론이 높아져 갔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발생한 지 2년2개월 만인 1974년 8월8일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탄핵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마침내 하야한다.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그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전통은 수호되었다. 그리고 닉슨 사임 후에도 그의 형사책임을 추궁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으나 대통령 G.포드가 9월8일 닉슨의 재임기간 중의 모든 죄에 대하여 특사를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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