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상점에서 출발한 110년 전통의 고객만족 서비스 대명사 ‘노드스트롬’

나이든 여자 고객 한 명이 백화점에 자동차 타이어를 들고 와서는 반품해달라고 요구했다. 점원은 고객에게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영수증이 없었다. 대신 점원은 고객에게 타이어 가격으로 얼마를 지불했느냐고 물었고, 결국 고객은 자신이 말한 금액만큼 환불받고 돌아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화점에서 자동차 타이어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사실. 경영학의 대가 톰 피터스에 의해 알려진 이 사건으로 백화점은 수백만 달러의 홍보효과를 얻었다. 백화점이 타이어 가격으로 지불한 금액은 고작 29달러였다. 

서비스 선진국인 미국 내에서도 노드스트롬(Nordstrom) 백화점은 고객 만족도 부문에서 항상 선두를 지켜왔다. 작은 구두점으로 시작해 일류백화점으로 일으켜 세우기까지 4대에 걸쳐 한결같이 추구해온 고객서비스 제일주의가 바로 그 일등공신이다. 이민자였던 창업자 존 노드스트롬은 철도 노동자, 벌목공, 광부 등 궂은일을 하며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근면과 성실을 유독 강조했다. 특히 후손들을 모두 신발매장에서 일하게 해 고객들 앞에서 무릎 꿇는 법을 가르쳤다. 고객에게 절대 ‘No’라고 말하지 않는 노드스트롬의 이러한 고객 서비스 정신을 몇 년 전에는 삼성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시애틀의 작은 구두상점, 미국 최대규모로 성장

노드스트롬은 스웨덴 이민자인 존 노드스트롬(John W. Nordstrom)이 친구인 칼 월린(Carl F. Wallin)과 1901년 시애틀 파이크 4번가에 구두상점을 연 것으로 시작되었다. 각각 5,000달러, 1,000달러를 투자해 문을 연 구두상점은 상호도 둘의 이름을 따 ‘월린 앤드 노드스트롬(Wallin And Nordstrom)’이었다. 첫날 매출은 12달러 50센트. 하지만 매출은 차근차근 급증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연간 매출액이 4만 7,000달러에 이르렀으며, 파이크 2가에 있던 베리 브라더스(Barry Brothers) 구두상점을 2만 1,000달러에 사들여 매장을 확장하기도 했다. 시애틀의 인구가 증가한 것도 이들의 매출에 도움이 됐다. 1901년에서 1910년까지 시애틀의 인구는 8만 761명에서 23만 7,194명으로 증가했으며, 1914년에는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이 호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시애틀이 북미의 조선 중심지로 부상, 인구가 더욱 증가했기 때문이다.

구두상점이 성공을 이루자 이 둘은 1923년, 시애틀 북동부의 워싱턴대학 근처에 2호점을 개점했다. 그리고 1928년, 노드스트롬은 월린과의 30여 년간 동업을 청산하고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을 도운 두 아들 에버렛, 엘머에게 각각 6만 달러씩을 받고 자신의 지분을 넘겼다. 아들들의 나이는 스물다섯, 스물넷이었다.

아버지에게서 경영권을 넘겨받은 에버렛과 엘머는 1930년 파이크 2번가의 매장과 진열장을 수리해 상점을 3배로 확장해 상호를 노드스트롬(The Nordstrom)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상점 중앙 천장에는 ‘저희가 귀하께 잘 해드렸다면 다른 분들에게 말해주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희에게 말해 주십시오’라는 글귀가 적힌 안내판을 매달았다. 상품의 질에 대해 유독 깐깐하기로 유명한 첫째 에버렛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한 제조업자는 이러한 노드스트롬에 대해 “노드스트롬이 고객들에게는 최고이겠지만 제조업자들에게는 살인자와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에버렛은 제품이 완전하지 않으면 판매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물건 하나하나를 까다롭게 검사했다.

두 형제는 매일 아침 카펫을 청소하고 유리창을 닦았다. 이러한 문화는 그들의 자녀와 손자들에게까지도 이어져 노드스트롬家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밑바닥에서 궂은일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이토록 열심히 일했던 것은 회사의 소유주로서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먼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안일한 태도가 아랫사람들에게 점점 알려져 결국은 모두가 무기력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청소로 하루를 열었다. 그리고 형들이 경영권을 인수한 지 5년 만에 창업주의 셋째아들인 로이드도 경영진에 합류했다.

‘고객이 없으면 사업도 없다’ 역피라미드 조직도

구두상점은 점점 커져 1960년에는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에 8개의 매장을 갖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시애틀 매장은 미국 내 최대 구두상점으로 성장했다. 삼형제는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바로 의류사업. 의류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정한 이들은 1963년 시애틀에 기반을 둔 베스트 어패럴사를 인수해 회사 이름을 노드스트롬 베스트(Nordstrom Best)로 바꾸었다. 그리고 두 달 뒤, 노드스트롬을 설립한 존 노드스트롬은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5년 후, 삼형제는 “아버지는 57세에 은퇴하시고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라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의 아들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경영권은 에버렛의 아들 브루스, 엘머의 아들 제임스와 존, 로이드의 사위 잭 맥밀런과 가족의 친구인 밥 벤더에게 돌아갔다. 경영권을 물려받은 노드스트롬가의 3세들은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그러했듯이 어렸을 때부터 상점에서 허드렛일을 했고,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는 신발을 판매했다. 그리고 1968년 마침내 경영권을 인수받아 1971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2년 후에는 1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해에 회사명을 지금의 노드스트롬(Nordstrom Inc.)으로 바꾸었다.

노드스트롬이 주식을 공개하기로 결정하면서 준비 작업을 할 때의 유명한 일화 한 가지. 투자 은행가들은 노드스트롬의 기업구조를 살펴보던 중 깜짝 놀랐다. 이 회사에 조직도가 없었기 때문. 이들의 요청에 따라 노드스트롬은 조직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기업들이 사각형을 선으로 나누어 계급과 직무를 나타내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자신들의 조직을 표현해낼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피라미드 모양의 조직도를 거꾸로 뒤집어 보자”고 제안했고, 그제야 노드스트롬 사람들은 만족했다. 고객을 가장 위로 모시고, 그 고객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일선 판매사원들을 그 다름에 두는 역피라미드 조직도야말로 노드스트롬의 기업문화를 가장 잘 설명했던 것이다. 이처럼 노드스트롬은 ‘고객이 없으면 사업도 없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면서 고객들 앞에서 무릎 꿇고 서비스를 해왔다. 지금에야 이 같은 역피라미드 조직도가 흔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1971년에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4대에 걸친 110년, 가족경영의 본보기

1977년 노드스트롬은 2억 5,0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로써 노드스트롬은 미국 내에서도 세 번째로 큰 의류 전문 소매업체로 성장한 것이다. 이때 노드스트롬은 또 한 번의 모험을 강행했다. 1978년 자신들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베시 샌더스(Betsy A. Sanders)가 맡았다. 그녀는 노드스트롬에 파트타임으로 입사해 7년 만에 고객 서비스 전략을 인정받아 부사장까지 오른 전설적인 인물로, 이 프로젝트에서 유능한 직원을 충원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녀가 신규 직원 채용 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필요한 적성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한 적성은 학력과 경력이 아닌, 직무에서 성공하기 위한 성격이나 특성으로, 서비스업에서는 ‘진정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남을 기쁘게 해주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이에 노드스트롬은 독특한 직원모집 광고를 내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매장에서 우리와 함께 일할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남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 정직하고 근면하며, 배려심이 있는 헌신적이 사람. 자신의 성공뿐 아니라 상대방의 성공도 바라는 사람. 비전을 갖고 그것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갈 사람.” 1,500명이 광고를 보고 지원했고, 샌더스 여사와 다른 면접관은 이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뽑았다.

노드스트롬의 모든 매장 직원들은 입사와 동시에 고객관리용 수첩을 지급받는다. 이 수첩은 고객별 관리가 용이하도록 파일처럼 페이지를 임의대로 끼웠다 뺏다할 수 있게 되어 판매직원은 수첩에 자신이 상대한 모든 고객의 이름과 전화번호, 결제계좌, 치수, 상품명과 구입 시기, 브랜드 선호도, 취향 등 고객 정보를 기록할 수 있다. 또한 매장마다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어 고객에 대한 편의 제공은 물론 매일 오전 판매직원이 고객과의 통화를 통해 안부를 묻거나 고객에게 필요한 신상품에 대한 정보나 구입한 제품에 대한 만족도 등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판매 직원별로 지정된 담당 구역을 정하지 않아 고객이 원한다면 매장에 관계없이 한 명의 판매직원이 안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노드스트롬은 자신들이 다른 기업과 차별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업문화’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에서 관리자를 영입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회사 내부에서 성장한 사람들만이 노드스트롬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동 사장을 역임했던 레이 존슨(Ray Johnson)은 1969년에 입사해 상점지배인, 지역 총지배인 및 부사장을 거친 인물이었고, 존 휘태커(John Whitacre) 역시 1976년에 신발 영업직원으로 입사해 구매 담당자, 머천다이즈 매니저, 상점지배인, 지역 총지배인, 부사장을 거쳐 1992년 공동사장이 되었다.
가족경영을 하는 다수의 기업들은 후계자 선정이나 승계 과정에서 많은 잡음을 야기한다. 하지만 노드스트롬은 4대에 걸친 110년의 시간동안 어떠한 불화도 없이 가족경영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주의 증손자들이 이끄는 지금의 노드스트롬을 족벌경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기업가 정신으로 일하는 판매 직원

노드스트롬은 미국에서 소매업계로는 최초로 판매 수수료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창업주인 존은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끌어들여 능력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에 따라 직원들에게 6.75%∼13%의 수수료를 지급했다. 또한 최우수 고객 서비스상, 올스타상 등 각종 포상 제도를 마련해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실시, 판매 현장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노드스트롬에는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상황에서 스스로 최선의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단 하나의 규칙이다. 복잡하고 관료주의에 집착한 규칙 대신 고개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이 원칙만 정해놓고 직원들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노드스트롬 직원들은 저마다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일한다. 때때로 고객들은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매장의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 하나, 노드스트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반품 정책’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노드스트롬을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노드스트롬은 무조건적인 반품 정책을 고수한다. “정직하지 않은 5% 때문에 95%의 정직한 고객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창업주의 철학이 가장 잘 반영된 이 정책은 기업가적인 직원들과도 연결된다. 판매원들에게 직접 판매한 제품에 대한 환불이나 교환 조치에 대해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회사가 아닌 직원이 제품 판매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한번은, 고객 한 명이 1년 동안 신은 구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수선을 해달라고 가져왔다. 노드스트롬은 새 구두로 교환해 주었다. 또, 어떤 여성 고객이 2년 전에 산 블라우스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하자 바로 환불해주었다는 등 반품 정책에 관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이처럼 노드스트롬은 고객이 반품을 요구하면 그 이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웃는 얼굴로 반품해주라고 직원들에게 말한다. 물론 위의 경우처럼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노드스트롬은 정책 도입 첫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반품 정책으로 소용되는 경비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노드스트롬은 커다란 홍보효과를 거두었고, 단골고객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노드스트롬에서 쇼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반품이 쉽다는 것이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반환할 수 있다. 여기에 아무런 불편이 수반되지 않는다.”

세월의 변화를 받아들여 다시 쓰는 역사

하지만 언젠가부터 노드스트롬은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변화에 따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직장여성들의 복장이 캐주얼하게 바뀌었지만 노드스트롬은 여전히 버튼다운 식 정상을 내놓는 등 시류를 빠르게 읽지 못했다. 판매직원들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고객관리용 수첩도 더 이상 진화하지 않았다. 고객들의 취향만 적어놓았을 뿐 체계적인 자료로 남기지 않았던 것. 이후 노드스트롬은 수첩 속에 잠들어 있던 정보들을 컴퓨터에 옮기는 작업을 했고, 그렇게 조금씩 시간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현재 노드스트롬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노드스트롬 4세인 블레이크 노드스트롬(Blake W. Nordstrom)이다. 1995년 그는 신발 사업부문·노드스트롬 Rack 경영부문 공동사장을 거쳐 2000년에 노드스트롬 Rack그룹의 매장 운영에 관한 모든 책임과 사업 확장 및 마케팅을 지원하는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그 해 8월 노드스트롬의 사장이 됐다.

블레이크를 중심으로 한 경영진은 노드스트롬의 기업 정신을 다시 재정비했고, 모든 영업 채널에 걸쳐 판매 성장률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사업의 최전선에 있는 직원들에 대한 공약, 자원관리, 매장에 대한 지원 등을 새롭게 마련해 2004년에는 회사 역사상 가장 높은 주당 이익률과 순이익을 달성하기도 했다.
110년의 전통. 그리고 고객만족 서비스의 대명사로 불린 노드스트롬. 과거의 영광에만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기업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고 있는 그들은 삼성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기업들이 앞으로도 계속 주목할 것이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