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종차별문제 상당부분 해결하며 흑인들의 열등감을 해소하는데 공헌

60년대, 사회 전반적으로 좀 더 인권이 향상되고 기존 사회에서 옳다고 강요되어왔던 인습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이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반항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미국 흑인 민권 시위’는 미국의 치부인 인종차별문제를 상당히 해결하고 흑인들의 열등감을 해소하는데도 공헌하며 20세기 인권운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인간의 권리 찾기 운동의 큰 부분을 이룬 ‘미국 흑인 민권 시위’ 그것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1965년 3월19일] “인간은 동등하다” 미국 흑인 민권 시위

미국 흑인들이 앨라배마주 셀마시에서 평화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인종차별과 투표권의 제한, 공공시설 사용의 차별 등을 없애라고 요구했다. 백인 민권운동가들도 이 시위에 합세했다. 시위대는 셀마 브라운 교회를 출발해 50마일 떨어진 몽고메리 시까지 시가행진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행진을 원천봉쇄했다. 이날 흑인들이 시위를 벌인 셀마시는 마틴 루터 킹 2세가 주도한 흑인투표인 등록운동의 중심지였다.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은 1955년 12월, 알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라는 도시에서 하루 일을 마친 재봉사 Rosa Park가 버스를 타면서 시작됐다. 그때 당시 버스의 앞좌석은 백인, 뒷자석은 흑인이 탈 수 있도록 하는 Jim Crow 법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백인이 앉을 자리가 모자라자 버스 운전사는 흑인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한다. 다른 흑인들은 순순히 말을 들었지만 로자 파크는 끝까지 자리에 남고 급기야 체포까지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를 중심으로 흑인 지도자들이 이제 차별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집단으로 버스타기 거부, 걸어서 출근 하기 등의 시위가 전국적인 이슈가 되면서 흑인 민권 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흑인 이용이 금지된 해변을 비롯해 식당, 기타 시설 등에 흑인들과 백인 운동가들이 같이 들어가는 시위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전국적인 흑인민권 지도자로 부각됐다. 그는 흑인 유권자들을 정식으로 투표권리자로 등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흑인과 백인의 공공장소 격리가 폐지되기 시작했고 흑인 학생들이 백인 대학에 입학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여파로 케네디 대통령이 민권법을 통과시킨데 이어 마틴 루터킹은 수도 워싱턴에 모인 10만이 넘는 군중 앞에서 ‘내게도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연설을 하며 인권 평등에 대해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킹과 케네디는 전부 암살되었지만 오히려 민권법개선을 위한 여론은 높아져 존슨대통령이 결국 승인했다. 이로 인해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는 건 이제 법적으로는 불가능해졌다. 이 시기 이후부터 비로소 인종차별이 지탄받을만한 사회적 행위가 되었다. 흑인도 백인 위주의 주류사회로 뛰어들 수 있게 되었으며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제한 숫자 또한 철폐되어 많은 한국교민들이 이민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운동은 20세기의 인권운동 중에서도 중요한 것으로써 미국의 치부인 인종차별문제를 상당히 해결하며 흑인들의 열등감을 해소하는데 공헌했다.

[1982년 3월27일] 한국 프로야구 개막 30주년

한국 야구는 1905년 미국인 선교사 길레트(P.Gillett;한국명 吉禮泰)가 도입한 이래 일본과 같이 고등학교·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마추어 스포츠로 급속히 성장해 왔다. 1922년 12월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이 방문하여 용산 철도구장에서 전조선군(全朝鮮軍)과 경기를 가졌는데, 이것이 한국에 처음으로 프로야구를 선보인 경기였다.
그 뒤 거듭되는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팀의 각종 초청경기로 한국 야구 수준은 크게 자극을 받아 기술면에서 급격히 향상되었다. 이에 1975년 11월 재미교포인 홍윤희가 프로야구 창단작업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프로화 작업이 시작된 것은 1981년 5월부터다. 당시 서울의 MBC 청룡, 충청남북도의 OB 베어스, 전라남북도의 해태 타이거즈,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의 삼미 슈퍼스타즈, 대구광역시·경상북도의 삼성 라이온즈, 부산광역시·경상남도의 롯데 자이언츠의 6개 팀으로 출발했다. 창단 3년 뒤인 1985년에는 충청남북도에 새 팀을 신설하는 대신 OB 베어스는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도록 경과규정을 두었다.
미국 프로야구의 대도시 본거지제도와 일본 프로야구의 대기업 중심제의 장점만을 본뜬 한국 프로야구는 철저한 프랜차이즈제(본거지제)를 도입, 구단주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본거지 출신으로 구성했다. 지역적 특성을 강하게 풍기며 1982년 3월27일 MBC 청룡 대 삼성 라이온즈의 역사적인 개막전이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시작됐다.

출범 첫해인 1982년에는 6개 팀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뉘어 팀당 80게임씩 총 240게임을 치렀으며, 전기 우승팀과 후기 우승팀이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를 벌여 챔피언을 가렸다. 1982년 전기리그에서는 OB 베어스가 우승을 차지하였고, 후기리그에서는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 두 팀이 최종 결승전인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어 OB 베어스가 1무 1패 뒤에 4연승을 거둠으로써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챔피언이 되었다. 당시 OB는 미국프로야구 무대를 거친 박철순이라는 불새출의 스타를 영입, 프로야구사에 전무한 22연승하여 1시즌 연승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1985년부터 팀당 110게임씩 총 경기수가 330게임으로 늘어났고, 우승 결정전의 경기방식도 변경되었다. 1986년에는 팀 간의 경기수가 108게임으로 줄어들었고 제7구단인 빙그레 이글스의 참여로 총 경기 수는 378게임으로 늘어났다. 우승 결정전의 방식도 다시 바뀌어 전기 및 후기 1·2위 팀이 플레이오프전을 치렀다. 그러다가 1989년부터는 단일 시즌제로 바뀌었다. 1999년부터는 드림·매직리그 양대 리그로 경기를 운영함에 따라 각 리그의 상위 1·2위 팀이 7전 4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거쳐 승리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다시 단일리그로 바뀐 2001년부터는 133개 경기를 실시하는 페넌트레이스를 치른 후 3·4위 팀이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거쳐 승리 팀이 플레이오프전에 오르며, 여기에서 페넌트레이스 2위 팀과 5전 3선승제의 경기를 펼쳐 이긴 팀이 한국시리즈에 오른다. 경기운영 방법은 처음부터 철저한 홈앤드어웨이 방식을 채택하여 팀마다 전체 게임의 반은 홈구장에서, 나머지 반은 상대팀 구장에서 경기를 한다.

한편, 1994년에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가 되었으며, 1999년엔 ‘OB베어즈’가 ‘두산 베어스’로 팀이름을 바꾸었다. 2000년 SK가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 ‘SK 와이번스’가 되었으며, 2001년엔 ‘해태 타이거즈’를 기아가 인수하여 8월1일부터 ‘기아 타이거즈’가 되었다. 2010년 현재 한국 프로야구에는 두산 베어스, 넥센 히어로즈, 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기아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의 8개 팀이 있으며 미국, 일본과 함께 3대 성행국으로 꼽히고 있다.

[1964년 3월24일]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

한일수교협상이 한창이던 1964년 3월24일, 서울지역 대학생 5,000여 명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지하라며 시위를 벌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조만간 타결 짓고 다음 달인 1964년 4월에 조인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대학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선 것.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본으로부터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듬해 박 전 대통령은 김종필을 내세워 한겴邱릿是?서둘렀다. 당시 협상단은 대일협상과정에서 굴욕적인 정도로 저자세를 보였으며 내용상으로도 졸속성을 면하지 못했다. 이후 한겴邱릿?타결이 가시화되자 대학가를 중심으로 굴욕외교에 대한 반대투쟁이 격화되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한일회담 관계자들에 대한 화형식이 치러졌다. 시위는 24일에 이어 25일도 계속됐으며, 사흘째인 26일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돼 16개 도시에서 대학생 4만 3,0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특별담화를 발표해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지만 시위는 외교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한일회담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 때문에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할 정도로 분위기가 격해지자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학생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설득하는 등 무마시키려고 했다.
시위는 4년 전의 4.19혁명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정부가 결국 일본에 가 있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귀국을 지시하면서 급진전되던 한일회담이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2월20일 시이나 일본 외무장관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함으로써 결국 한일회담은 타결된다. 

[1981년 3월30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 피격
1981년 3월30일 14시26분, 미국 워싱턴D.C.에서 의문의 총성이 울린다.
워싱턴D.C.의 힐튼호텔에서 열린 ‘미국 노동총동맹 산별회의’에서 연설을 마친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 미국 대통령이 전용차에 오르며 자신을 향해 환호하던 군중들에게 화답하기 위해 왼손을 드는 순간, 한 청년이 레이건을 향해 권총 6발을 발사했다. 레이건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제임스 브래디 백악관 대변인과 비밀 경호원, 경찰 등이 저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중태에 빠졌다. 그중 총탄 한 발이 레이건 대통령의 좌측 허파를 관통했고 곧바로 조지워싱턴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수술을 받았다. 두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생명을 건졌다. 이날의 피격사건은 존 힝클리(1956~현재)라는 한 청년이 저지른 우발적인 범행으로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범인 힝클리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취임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레이건 대통령의 피격 소식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레이건은 일흔 살의 고령임에도 빨리 회복되어 12일 만에 백악관으로 복귀 했다. 범인은 이듬해 감옥 대신 세인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힝클리는 평소 당시 10대 여배우, 조디 포스터(1962~현재)를 짝사랑 해오다 최후의 편지 한 통을 쓰고 범행을 저질렀다.
“조디, 부디 마음을 돌려 내가 이 역사적인 행위를 통해 당신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길 바라오.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사랑할 존 힝클 리가…”

[1962년 3월21일] 국립중앙극장 전용공연장 개관

그 동안 전용극장이 없어 더부살이를 하던 국립중앙극장이 전용극장을 마련해 문을 열었다.
옛 명동 시공관을 보수해 극장을 만들었다. 개관식에 공보처장관을 비롯한 정관계와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개관 기념 공연으로 국립국악원의 수연장지곡과 처용무, 그리고 조용자 씨의 장고춤 등이 선보였다. 민족예술과 연극문화 진흥을 위해 1950년 4월29일 개관한 국립극장. 1950년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세워진 이후 국립극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등 4개 단체의 활발한 예술 활동과 함께 국민들의 문화향수 확대를 위해 노력해 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연장이다. 6.25로 대구로 옮겨갔다가 1957년 6월 서울로 돌아온 국립극장은 1973년 10월17일 서울 장충동으로 이사하고 1991년에는 이름을 국립중앙극장으로 바꿨다. 현재 대극장인 해오름극장과 소극장인 달오름극장, 공연 성격에 따라 무대가 바뀌는 별오름극장, 원형 야외무대인 하늘극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오름극장은 1,563석, 달오름극장은 427석, 별오름극장 80∼100석, 하늘극장 600석 규모이다.

[1999년 3월19일] 서울시, 버스토큰 판매 중지

20여 년 동안 서울시민들이 사용한 버스 토큰. 1999년 3월19일 서울시는 4월부터 토큰 판매를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버스토큰제는 같은 해 10월 완전히 폐지됐다. 이로써 1977년 12월 첫 선을 보인 버스 토큰이 교통카드의 도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버스토큰제는 버스 안내양들에 대한 인권보호차원에서 마련됐다. 당시 버스회사들이 안내양들의 ‘빼돌리기’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몸수색을 하는 등의 일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잦았다. 이 제도를 맨 먼저 도입한 서울시는 하루 승차인원을 673만 명으로 잡고 한 사람에 15개씩, 1억 95만 개의 토큰을 만들었다. 토큰을 만든 곳은 풍산금속. 제작 단가는 개당 10원30전으로 1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다. 당시에도 현금승차를 하는 승객들에게는 10원의 가산금을 더 물어 토큰 ‘사재기’ 열풍도 일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정부는 황동색에서 구리색으로 토큰을 바꾸기도 했다. 20여 년의 세월을 서민들과 동고동락한 버스토큰.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세월을 논할 때면 어김없이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버스토큰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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