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유혈사태에 건설 근로자와 교민들 특별 전세기 타고 입국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 봄이 누군가에게는 계절상의 봄이기도 하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동안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둘 수밖에 없었던 송곳 같은 얼음을 깨는 자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억눌려왔던 가슴을 펴고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독재에 맞서다 끝내 빛으로 나오지 못한 채 죽어간 이들도 수없이 많다. 

2011년 2월25일(현지시각), 리비아 국민들은 이 날을 ‘피의 금요일’이라 불렀다. 국가 원수를 지지하는 친카다피 진영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반정부 세력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25일 리비아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친카다피와 반정부 세력 간에 대공미사일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반정부 세력들은 동부와 서부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 정부군에게서 빼앗은 무기로 무장한 채 친카다피 세력이 장악한 수도 트리폴리까지 진격했다. 이브라힘 다바시 유엔 주재 리비아 부대사는 “리비아 당국이 시위대를 강경진압하면서 25일 현재 수천 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피의 금요일’,  예배 마친 주민들 트리폴리에 모이다

이날의 전투는 정오 예배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예배를 마친 주민들이 사원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시작하자 군인과 무장한 친카다피 민병대가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최소 5명이 숨지고 시내 곳곳에서 희망자가 속출했지만 시위대는 멈추지 않았다. 반카다피 구호를 외치며 트리폴리 녹색광장 앞으로 진격했지만 밤이 되자 친카다피 세력이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당초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는 이슬람사원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예배를 맡은 사제에게도 자신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읽도록 지시하는 등 시위 자체를 원천봉쇄하려 했다. 하지만 예배를 마친 주민들이 이슬람사원에서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시작하자 군인과 용병, 친카다피 민병대 등은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다피는 이날 트리폴리 녹색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레드캐슬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연설을 했다. “그들이 원한다면 죽일 것이다. 보복하라. 석유를 방어하라”고 외친 카다피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반격을 주문하며 자신을 지켜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사면초가에 빠진 카다피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들은 카다피가 향후 투항이나 해외 도피를 택하는 대신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하고 있다. 카다피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 역시 터키 방송 인터뷰에서 향후 계획에 대해 “‘플랜 A’는 리비아에서 있다가 죽는 것이고, ‘플랜 B’는 리비아에서 있다가 죽는 것이고, ‘플랜 C’는 리비아에서 있다가 죽는 것”이라며 리비아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이러한 가운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리비아의 유혈 진압을 강력히 규탄하고 안보리에 구체적 조치를 촉구했다. 반 총장은 안보리 전체회의에 참석해 “국제 사회가 시의적절하면서 단호한 민간인 보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반 총장은 “이 순간 리비아는 매우 긴박하고 통탄스러운 상황”이라고 강조하고 “리비아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와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증거 수집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리비아에 거주하던 우리나라 건설근로자와 교민은 26일 밤 특별전세기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왔다. 대한항공 특별 전세기 KE 9928편에는 당초 330여 명이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일부 근로자들이 현지 잔류를 희망해 235명만이 귀국했다. 이에 앞서 지난 25일에는 교민 198명이 이집트 항공기를 타고 카이로로 빠져나왔다.

소셜 네트워크 타고 온 ‘재스민 혁명’

반정부 활동을 해오던 세력들이 현재의 리비아 시위를 이끌고 있다면, 튀니지와 이집트는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젊은이들이 혁명의 중심이 되어 독재 정권을 끌어낸 경우다.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린 튀니지의 반정부 시위는 지난해 12월17일 튀니지 중부 시디부지드에서 시작되어 결국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벤 알리 대통령의 23년 장기 집권에 따른 부정부패, 높은 실업률, 물가폭등 등으로 그동안 억눌렸던 민심은 한 청년의 분신으로 촉발되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점점 퍼져나가 시위로 이어졌다.

정부는 무장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강제로 진압했고, 이로 인해 민심은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벤 알리 대통령은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대선 불출마 선언, 내각 해산 등의 ‘사탕’을 물렸지만 참고 참아온 울분을 터뜨린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시위는 한 달 만에 78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며 대통령을 축출하는 것으로 정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벤 알리는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벤 알리 대통령 일가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면서 1.5t의 금괴를 자국 중앙은행에서 빼낸 것. 튀니지 국민들은 결국 1.5t의 금괴와 자신들의 자유를 바꿔 찾아온 셈이 되었다. 

이집트혁명은 1월25일부터 2월11일까지 진행되었다. 1981년부터 장기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 요구가 혁명의 이유였다. 튀니지 재스민 혁명의 영향을 받아 벌어진 이집트혁명은 2월11일, 이집트 역사상 최장 기간 대통령에 재임한 무바라크 대통령이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진정되었다.

시위는 1월25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이스마일파 등의 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카이로에서는 수천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1만 5,000여 명이 타흐리르 광장을 점령했다.
특히 ‘분노의 금요일’로 불린 1월28에는 가장 격렬한 시위가 열렸다. 금요일 예배를 마친 수만 명의 이집트 국민들은 시위를 시작했고, 시위인파는 시작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수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경찰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등 이집트 곳곳에서 시위대들에게 최루가스, 물대포 등을 쏘았고, 시위대들은 경찰서를 검거해 시위도중 체포된 이들을 풀어주었다. 포트사이드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정부 건물을 점거했다.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는 오후 6시부터 오전 7시까지 통행금지령을 내렸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시위대들은 카이로의 국민 민주당 본 건물에 불을 질렀고, 경찰은 최루가스 살포를 멈추지 않았다. 시위대들은 “무바라크는 물러나라”고 구호를 외쳤다.

2월1일에는 반정부 단체 지도자들과 시위대들이 ‘백만의 행진’을 열고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부터 대통령궁까지 행진했다. 200만 명이 카이로에 모였고, 알렉산드리아에는 수천만 명, 시나이에서는 25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상황이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무바라크 대통령은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그전까지는 대통령직을 유지하며 정치개혁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했다.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는 말에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이들은 계속해서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작별의 금요일’에 무바라크 하야 요구

강도 높은 시위는 계속되었다. 시위대들은 1월28일 ‘분노의 금요일’에 이어 2월4일을 ‘작별의 금요일’이라 정해놓고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2월4일까지 권력을 내려놓고 대통령직을 하야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무바라크는 2월11일 사임했다. 이 날 술레이만 부통령은 국영 TV를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집트 공화국 대통령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집트 국민들에게는 이날이야 말로 ‘승리의 금요일’이었다.

이후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11일 카이로를 떠나 샤름 엘셰이크 리조트로 온지 이틀 만인 13일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지난 10일 국영 TV를 통해 하야 거부 연설을 녹화할 당시에도 두 번이나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소문이 있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이에 이집트 국영 언론은 “무바라크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인 것은 맞지만 혼수상태는 아니다”라며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대통령 축출로 이집트 국민들의 저항이 끝나는 듯 보였으나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축출된 지 14일 만인 2월25일, 민주화 성지가 된 카이로 중심부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대규모 집회를 열면서 이라크 정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군부에 개혁 실행을 촉구했다.
무슬림형제단 등이 중심이 된 이날 시위에서는 무바라크 정권 하에서 고위직에 있었던 인사들을 즉각 퇴진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무바라크 퇴진 후 과도정부를 운영하고 있는 군부가 신속한 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면서 “아흐메드 샤피크 총리와 아흐메드 아불 게이트 외무장관, 맘두흐 마리에 법무장관 등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바라크 정권의 장관들이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위대는 또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매주 금요일에 대규모 집회를 계속 열겠다며 군부를 압박했다.

이란, 예맨, 바레인 등지에서도 민주화 시위

리비아, 튀니지, 이집트가 민주화 시위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고 있지만 이 외에도 여러 국가들이 현재 억압에 저항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오랜 기간 억압을 받아온 야권 단체들이 일어섰다. 지난 14일, 수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1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야당을 지지하는 수만 명의 시민들은 테헤란의 아자디 광장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이며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란 야권단체들이 요구하는 것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퇴진. 경찰과 군은 시위대에게 최루가스와 페인트볼을 쏘았고, 시위대는 쓰레기통에 불을 붙이는 등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이란에서는 2009년 6월 실시한 대선 이후부터 반정부 시위가 시작, 산발적인 시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수십 명의 시위대가 숨지고 개혁성향의 공무원, 언론인, 사회 활동가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예맨에서는 32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한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퇴진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8일에는 사나대학교에서 발생한 시위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는 정치개혁, 차별 철폐, 민생문화 해결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동안 바레인의 시아파는 고질적인 차별 문제를 겪어왔다. 이에 시아파 무슬림이 주축이 된 시위대들은 시아파에 대한 차별 철폐와 민생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새로운 헌법 제정과 정치범 석방 등을 포함한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가는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일정한 영토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고 그 조직의 주인은 당연히 국민이어야 한다. 하지만 욕심에 눈먼 몇몇 통치자들에 의해 주인이 되어야 할 국민들은 통치자의 억압에 주인 된 권리를 잃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통치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구촌의 유혈사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위의 원인이 된 독재자들

■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대통령
1969년 당시 친 서방 성향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27세에 권좌에 오른 무아마르 카다피. 1977년에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한 카다피는 ‘인민 직접민주주의 구현’을 선언했지만 이는 결국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지하고 독재를 강화한 것이었다.
통치기간 중에는 반미 무장단체 지원과 테러로 서방국가와 줄곧 대립각을 세웠다. 1986년 서베를린의 미군출입 나이트클럽에 폭탄테러를 감행했고, 1988년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270명이 탑승한 미국 팬암기를 폭파시켰다. 이에 미군으로부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국가원수 관저를 폭격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4세이던 입양한 딸 한나가 숨졌다.
2003년에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면서 대립각을 세우던 서방과 화해무드에 돌입하는가 싶었지만, 이후에도 친서방 아랍 국가를 비난하는 등 외교 분쟁을 겪어왔다.
후계자로 알려진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은 런던 정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영어에 능통, 리비아의 대외적 대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
공군 비행사 출신으로 1973년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여 이집트의 전쟁영웅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5년 부통령으로 임명되었고 1979년 집권 국민민주당의 부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사다트 대통령의 후계자가 되었다.
사다트 대통령이 1981년 10월6일 이슬람주의자 장교의 총탄에 암살되자 대통령직을 승계, 불안정한 정국을 비상계엄법으로 통제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97%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1990년 8월에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점령하자 이라크에 반대해 군대를 파견했으며, 1992년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본거지를 습격해 체포하기도 했다.
1993년, 1999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해 계속 당선되었으며,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88.6%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어 30년 동안 장기 집권했다.
지난해 3월, 독일에서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뒤 한때 건강 이상설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82세의 고령에도 국외순방 일정을 소화하며 건재를 과시해왔다.

■ 튀니지-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
직업 군인 출신인 벤 알리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튀니지를 통치해 온 하비브 부르기바를 1987년 무혈 쿠데타를 통해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취임 직후에는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며 부르기바가 만든 종신 대통령 직함을 없애고 최대 3선까지만 허용하도록 했지만 2002년 4선 도전을 위해 다시 개헌했다. 지난 2009년 5선 연임에 성공, 23년 넘게 튀니지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폭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를 통해 알려진 미 외교 전문 중 지난 2008년 6얼 튀니지 주재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글이 알려져 그의 부패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네 것은 곧 내 것’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 따르면, “하급관리들 사이에 뇌물 수수가 만연해 있으며, 특히 대통령 일가의 과도한 재산 축적과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부패 의혹이 인플레이션과 실업률로 고통을 받고 있는 튀니지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벤 알리 대통령 일가가 돈, 서비스, 토지에다가 요트까지 탐내며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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