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국·소련, 3국 회담, 우리나라에 38선을 설정하는 방안도 처음 논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이탈리아가 이미 항복한 상태이고 독일마저 패전의 기미가 보이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 대원수가 크림반도 얄타에 모였다. 연합국 지도자들은 나치 독일을 최종 패배시키고 그 후의 점령 방법에 대한 논의와 국제연합UN 창설 등을 논의했다. 우리나라에 38선을 설정하는 방안도 여기서 처음 논의됐다.    

[1945년 2월4일] 얄타회담 개최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최고인민위원 등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패전 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 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또한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 또는 몰수한다고 선언했으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 배상금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그 밖에 다른 패전국이나 광복을 맞는 민족에 대하여는 별도의 방법을 찾아 합의하였다. 그 주요 핵심은 ‘해당지역(패전국 또는 광복을 맞은 민족)의 모든 민주 세력을 폭넓게 대표하는 인사들에 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인민의 뜻과 합치되는 책임 있는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극동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의정서를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게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해준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가하는 대가로 사할린과 치시마열도(千島列島)를 획득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듬해 이런 내용이 드러나면서 얄타협정은 강대국끼리 전후 이익을 챙기는 데 치중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외에도 UN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부여와 신탁통치제도의 도입,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스탈린은 중국과 동맹 및 우호 조약을 체결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국제연합을 창설한다는 전제 하에 이미 헌장의 초안이 마련되어 있는 상태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 방식에 관한 절충안을 마련하였다.
얄타회담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은 지연되었고, 미국의 원폭이 투하(1945년 8월6일)된 뒤에 참전하여(8월8일), 참전한 지 불과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하였다.

[1990년 2월11일] 넬슨 만델라 출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1990년 2월11일 교도소에서 28년 만에 풀려난다. 평화시위와 무장투쟁을 지도한 죄로 1962년 수감됐다가 1964년 죄가 추가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해 왔다. 앞서 아흐레 전 드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만델라의 석방을 전격 발표했다. 만델라는 이듬해 7월 아프리카민족회의 ANC 의장으로 선출된 뒤 백인정부와 협상을 벌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다. 이 공로로 1993년 드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고, 1994년 5월 남아공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총선거에 의해 구성된 다인종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다.

1918년 7월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출생한 넬슨 만델라는 템부족(族)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한 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연맹을 창설하였다. 1952년 비백인(非白人)으로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고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을 뜻하는 아프리칸스어)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한 넬슨 만델라는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되었다.

그러나 1960년 3월 샤프빌흑인학살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1962년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은 넬슨 만델라는 1963∼1964년 범죄혐의 추가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았으며, 1990년 2월 석방 때까지 27여 년 간을 복역하면서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저서로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힌 「투쟁은 나의 인생 The Struggle is My Life」(1961)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Long Walk to Freedom」(1995)이 있다. 1995년 7월과 200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간의 우의를 다짐은 물론 경제적인 협력을 하였다.

[1970년 2월14일] 납북 KAL기 승객 귀환

1969년 12월11일 12시25분 강릉발 서울행 대한항공 소속 YS-11기가 승객 47명과 승무원 41명을 태우고 대관령 상공을 비행 중 고정간첩인 조창희에 의해 강제 납북됐다.
북한은 12월20일 조종사의 기자회견을 보도,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고 보도했다. 12월25일 북한 중앙통신사는 성명을 발표하여 인질외교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성명에서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적십자사 제3자의 개입 없이 그들이 지정 한 미간대표들과 직접 소환교섭을 벌이자고 정치적 흥정을 제기하였다.

그 후 북한은 1970년 2월5일 납북승객을 송환하겠다고 국제적십자사에 송환을 통보하였으나 송환하지 않았다. 2월14일 오후 5시 드디어 탑승자 51명 가운데 39명이 판문점을 납북 65일 만에 돌아왔다. 대부분 납북될 때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귀환했다. 이날 39명의 귀환승객들은 오후 8시가 넘어 서울에 도착, 15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KAL기 납북경위와 북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당시 북한은 승객들을 모두 한 사람씩 평양의 여관방에 격리 수용하고 성분 조사를 핑계로 약물마취와 전기고문을 하였으며 하루 4시간씩 강제 학습을 실시하여 세뇌공작을 했다고 하였다. 심지어 손혼길(당시 27세)은 정신이상으로 언어기능까지 상실할 정도였다.

승객들은 사건 당시 항공기가 대관령 상공에 이르렀을 때 객석 앞자리에 않아있던 조창희가 갑자기 조종실로 들어간 직후부터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꼈고, 동해 상공에 이르렀을 때 2대의 북한 전투기가 KAL기를 호위한 것을 보고 나서야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장과 승무원 등 열두 명은 북한에 계속 억류돼 돌아오지 못했다.

[1997년 2월19일] 덩샤오핑 사망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을 이룬 덩샤오핑! 1997년 2월19일, 아흔세 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덩 샤오핑의 시신은 닷새 뒤 베이징 팔보산 혁명묘지에서 화장돼 톈안먼 광장의 인민대회당에 하루 동안 안치됐다. 추도대회는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펀 총리 등 정계 인사들과 유족 등 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덩샤오핑은 쓰촨성(四川省) 출생으로 1918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921~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후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 1933년 반주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고, 장정(長征)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낸 덩샤오핑은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그 후 1973년 3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익 사망하자 다시 권자에서 밀려났고 1977년 7월 다시 복직했다.
1980년 화궈펑 주석체제를 무너뜨린 덩샤오핑은 이듬해 당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면서 중국의 최고 실력자가 됐다. 이후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해 기업인과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 1989년 4월 톈안먼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11월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장쩌민 총서기에게 물려주면서 정계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1019년 2월1일]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000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1936년 2월5일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즈’ 개봉

유나이티드아티스츠 작품의 흑백영화 모던 타임즈는 제작·각본·감독·주연·음악을 찰리 채플린이 담당하였다. 토키영화 도래에 맞서 사이렌트의 아성(牙城)을 지키며 단 한마디의 대사 없이, 이미 오늘의 오토메이션시대를 60년 전에 간파한 영화이다. 타이틀백의 시계 문자판이 상징하듯, 시계에 지배되는 기계문명에 대한 도전과, 자본주의의 인간성 무시에 대한 분노를 묘파한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벨트컨베이어로 운반되어 오는 상품의 나사를 죄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공원(채플린)은 기계 앞을 떠나도 같은 동작을 계속한다. 정신병원에 가서 정상적인 생활리듬을 찾으면 낫는다. 데모의 주모자로 체포되기도 하고 모범수로 석방되어 조선소 직공 등으로 전전하나 실수투성이 이다. 부둣가에서 먹을 것을 훔친 불행한 소녀(포렛 고다드: 채플린의 부인)와 만나 내일의 희망을 안고 걸어나는 라스트 신은 유명한 장면이다.

결코 새로운 것만 좋아하지는 않았으므로 토키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채플린은 자본주의의 인간성 무시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저력 있게 고발한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4월16일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뮤직홀 연예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따라 5세 때 첫 무대에 섰다. 가난과 어머니의 정신발작, 고아원 등 불우한 환경을 거쳐 10세에 극단에 들어갔다. 점차 천부의 재능을 인정받아 17세 무렵 당시 영국 최고의 인기 희극극단 프레드카노극단 단원이 되었다. 댄스·노래·어릿광대·몸짓흉내·무언극 등 희극배우로서의 재질을 키우기 위한 수업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절이었다. 1912년 카노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 영화제작자 M.세넷은 그를 할리우드로 초청하였으며, 채플린은 여기서 큰 행운을 얻었다. 그 당시의 미국 영화는 발전단계에 있었고, 세넷은 희극영화 제작의 명수인 동시에 미국 영화의 개척자였으므로 채플린의 재능을 대성시켜 주는 어버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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