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 토끼를 위한 오마주
상태바
챔피언, 토끼를 위한 오마주
  • 정대근 기자
  • 승인 2011.02.08 0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경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경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이야기의 생명력은 참으로 끈질기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늘 이야기가 함께하기 마련인데, 그 사람이 죽어도 이야기는 살아남아 한참 동안 세상을 떠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책이나 신문에 실려 떠돌기도 한다. 기자는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파는 사람이다. 그 일로 밥벌이를 하고, 때론 명성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세상이나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생산자라기보다는 가공자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자가 이야기를 가공하지 않고, 생산만 하게 되면 세상은 위험 속으로 빠질 수 있다. 명백히 기자는 작가와 다른 일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폭설과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 기자는 오늘 밤도 컴퓨터 키보드를 끌어안은 채 이야기 가공에 애쓰고 있다. 낮 동안 모아온 녹음파일은 끊임없이 재잘거리는데, 가슴 한 쪽에 쌓이는 외로움은 연유를 알 수가 없다. 기자는 쓸쓸함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끝내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세상은 위험 속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창밖에 함박눈이 쌓이는 동안 기자는 잠시 작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호루라기가 울렸다.
나는 힘차게 출발선을 뛰어넘었다. 길은 지워졌고, 한줄기의 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결승점, 단 한 번도 빼앗겨 본 적 없는 나만의 출입문.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이 경주에서 나는 언제나 승리자였다. 거북이 역시 최선을 다해 달렸지만 나를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느새 운명처럼 굳어져 버린 승부였다.
오늘도 역시 길가에 선 관객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화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승점에 꽂힌 시선을 더욱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 불친절함은 챔피언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뒤쳐져 달려오고 있을 거북이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셀 수 없이 반복된 이 달리기 시합에서 언제나 나는 일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사람들은 나를 챔피언이라 불렀고, 그 누구도 나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승리는 달콤했다. 하지만 지나친 달콤함은 쓰라린 충치를 동반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승리와 환호에 나는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루함 같은 것이기도 했다. 챔피언으로서의 지켜왔던 도도함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관객들을 위해 한 번쯤 답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쓸모없이 남발하지만 않는다면 챔피언으로서의 권위를 더욱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여전히 열광하고 있었다. 불끈 쥔 주먹을 흔들며 응원가를 불렀고, 손나팔을 입에 모으고 화이팅을 외쳐댔다.
하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달려온 길 뒤쪽을 향해 있었다. 지금까지 귓가를 맴돌던 환호와 박수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참 뒤에서 힘겹게 달려오는 거북이를 위한 것이었다.

다리근육에서 바람이 빠졌다. 몸은 중심을 잃었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급격히 속력을 줄여야 했다. 그래도 관객들의 시선은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위대한 챔피언의 흔들림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만 길 한 가운데 우뚝 서 버리고 말았다. 지워졌던 길이 되살아나고, 빠르게 지나치던 풍경도 그 자리에 멈췄다. 귓불을 날카롭게 스치던 바람도 귓속에 가만히 고여 있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거북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움직이고 있었다. ‘달린다’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의 느린 걸음이었다. 그는 묵직하고 깊은 궤적을 남기며 천천히 기어오고 있었다.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등껍데이기의 틈 사이로 포말 같은 열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극심한 탈수증상 때문이었던지, 땀으로 범벅된 그의 머리는 탁구공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걸 벗고 달려보지 않겠니?」
언젠가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거북이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 무거운 등껍데기를 짊어진 채 힘겹게 출발선을 넘었던 것이다.
관객들의 손짓과 고함소리는 거북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자리에 주저앉아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럴 때마다 관객들의 응원소리는 더욱 커졌다. 나는 다시 결승점을 바라보았다. 열 걸음만 더 가면 우승이었다. 그곳은 여전히 나만을 위한 출입문이었다. 하지만 ‘우승’은 지독하게 지루한 일상이며, 챔피언이라는 칭호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내 닉네임이라는 것을, 그만 깨닫고 말았다.

가만히 바닥에 드러누웠다. 작고 단단한 뭉게구름이 유유히 동쪽 능선을 넘고 있었다. 그 뒤로는 한참이나 기운 햇살이 구름의 엉덩이를 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거북이를 응원하는 관객들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그 시끌벅적한 고함소리가 뜻밖에도 포근한 솜이불처럼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어나!」
어느새 결승점 근처까지 기어온 거북이가 어깨를 흔들었다.
「아니, 계속 달려가. 결승점이 얼마 남지 않았잖니.」
다시 눈을 감았다.
「토끼 너…, 지금 날 놀리는 거야?」

거북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널 놀리는 게 아니야. 그리고 오늘은 널 위한 날이니까 마음껏 즐기라구.」
그의 딱딱한 등껍데기를 어루만졌다. 거북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돌아누웠고, 다시 노곤한 단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질퍽이는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관객들은 아주 오랫동안 오늘의 이 경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들은 거북이를 향해 더욱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이고, 그는 평생 잊지 않을 추억을 하나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의 등껍데기보다 더욱 단단한 자존심 하나를 부상으로 챙겨갈 것이다.
「이제 새로운 경주를 준비해야지. 거북이의 등껍데기와 닮은 등짐 하나를 짊어져야지. 그리고 그것을 내 허리와 어깨에 단단히 묶고 당당하게 출발선에 다시 설 것이야. 그 경주에서 내가 몇 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하게 될는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다시 통과하게 될 결승점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승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설렘이 심장을 조여 온다.」

그날, 해가 기울고 숲속이 고요해질 때까지 토끼는 단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