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쌓여 세월이 된다. 그런데 켜켜이 쌓이는 그 껍질들은 도무지 감촉이 없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발목 근처로 차올라 깊고 짙은 발자국 찍을 때까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때때로 세월은 뭉쳐져 우르르 몰려다닌다. 단정치 못한 왈패의 휘파람처럼, 철딱서니 없이 부려대는 객기처럼, 눅눅한 바람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바람은, 시름에 가득 찬 사람들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그 부스러기가 남아 엷게 골이진 주름을 더욱 짙고 깊게 파고든다.

바람은, 열어둔 술단지 근처를 날아다니다 한 쪽 발을 빠뜨린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과즙에, 기어이 투명한 알들을 부려 놓는다. 그리고 술은 쓰디쓴 맛으로 천천히 삭아든다.

바람은, 실연을 통보 받은 가난한 시인의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심장에 난 생채기에 찰싹 달라붙어 추억을 곪게 한다. 시인은, 실연을 통보 받은 가난한 시인은, 싯누런 고름 같은 詩들을 콸콸 원고지에 쏟아 놓는다.

이렇듯 세월이 한 번 보듬고 간 모든 것들은 결국 삭기 시작한다. 삭아진 것들에선 향기가 난다. 술도, 詩도, 사랑도, 사람도 예외란 없다.  냄새나, 악취가 아닌 것은 오로지 세월 덕분이다. 지루하고도 끈질기게 매만져 준 세월의 성실함 덕분이다.

라벤더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그 향기의 근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새싹이 돋아날 무렵은 물론이고, 새까맣게 말라죽은 뒤까지 기운차게 향기를 뿜어대는 라벤더. 이 깊고 짙은 세월을 담아온 세상은 어디쯤인지. 새침하게 돋아난 잎 끝에 입을 맞추고 눈을 감는다.

 라벤더, 이 만만찮은 식물의 향기가 콧속으로 밀려든다. 이것은 향기가 아니다. 아련한 기억이며, 세월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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