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필을 깎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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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연필을 깎으며
  • 정대근 기자
  • 승인 2010.07.14 13:27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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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말랑말랑한 정치칼럼 ② - 시대를 논하며 세상을 떠도는 어느 글쟁이의 편지

어느 날 갑자기 소년은 지독하게 아팠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이마에는 신열이 고였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입맛을 잃은 혀끝에선 자꾸 한숨이 샜다. 몸뚱이는 오래 전에 겪었던 피로를 기억해내는 듯, 발끝부터 머리카락까지 저렸다.

햇살은 요란스럽게 쏟아졌지만, 창밖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문병 온 소년의 친구들은 그가 감기몸살을 앓는 것이라며 비타민 음료와 만화책 몇 권을 놓고 돌아갔다. 하지만 통증은 늘 왼쪽 가슴에서 시작되곤 했다.

그 해 여름, 소년은 감기몸살 같은 첫사랑을 앓았다.

끔찍한 열대야가 습격한 밤에 무심코 이불을 걷어차고 잤다가 걸려버린 여름감기, …처럼 첫사랑은 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흔적과 흉터를 남기지 않는 내과질환이었으며, 그 증세가 너무나 뚜렷했지만, 의사는 결코 진통제를 처방해 주지 않았다.

소년은 겨우 열여덟 살이었던 까닭에 이를 악물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피울 줄 몰랐고, 술을 마셔본 적도 없었다. 단지, 편지를 쓰는 일만으로 그 모진 고통을 고스란히 이겨냈다. 편지지가 떨어지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면 원고지 뒷면에 못 다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연들은 서랍이나, 옷장 속에서 쌓이고 있었다.

때때로 서랍을 말끔히 비우는 날도 있었다. 낡은 턴테이블에서는 김광석의 노래가 걸려 있었다. 쓰레기봉투에 가득 찬 사연을 내놓고는 연필을 깎았다. “사랑한다”보다 더 멋진 말을 떠올리느라 골몰하며 깎고, 또 깎았다. 칼날에 손가락을 베고 난 뒤에야 몽당연필을 손에서 놓곤 했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도, 그보다 멋진 말도 쓰지 못했다.

어느새 소년은 청년으로 자랐다.

담배와 술을 배웠고, 필요할 때마다 진통제를 처방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왼쪽 가슴의 통증은 한결 덜해졌지만, 여름마다 지독한 감기몸살을 앓곤 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편지를 써야했다.

결국 편지 쓰는 일은 청년의 직업이 되었다.

그 일로 종이와 연필 값은 겨우 벌었지만, 먹을거리가 떨어지는 날이 잦아졌다. 사람들이 “왜 글쟁이가 되었느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감기 때문이었노라”고 짧게 대답했다. 감기는 인류문명의 최첨단 의학기술조차 극복하지 못한 정체불명의 괴질인 까닭에, 당분간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며 웃었다.

하지만 이제 청년은 첫사랑을 위해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 사연도 둥글거나 달콤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날카롭고 독해지기 위해 밤마다 얼음물 목욕을 했다. 글을 쓰는 동안 김광석의 노래 대신에 뉴스를 들었다. 보내지 못한 사연이 많은 건 여전했다. 다만, 서랍이 아니라 노트북 하드디스크에 쌓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청년은 손수 포맷을 했다. 160기가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가 느릿느릿 로우포맷(Low format) 되는 동안, 그는 연필을 깎는 대신 노트북을 손질했다. 부드러운 초극세사 수건으로 모니터를 닦았고, 면봉과 이쑤시개로 키보드에 낀 먼지를 제거했다.

10인치가 조금 넘는 창밖은 늘 소란스러웠다.

창밖에는 세월과 사람들이 강물처럼 흘렀다. 수면 위에는 황금보트에 몸을 실은 사람들이 떠 다녔고, 그 아래에는 무수한 공기방울을 피워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대개 보트로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자리는 늘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강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스스로 몸을 던진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 복잡하고, 심란한 풍경이 거센 물결을 이뤘다.

그것은 시대(時代)였다.

청년도 역시 시대의 수면 아래에서 공기방울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보트를 탐내지 않았다. 수면 위와 아래를 오가며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와 자신이 본 풍경을 편지로 남겼다. 가끔 강가로 나와 시대와 사람들에게 대해 논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거대한 시대의 실체를 길어 올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여울을 이뤄 물결치는 ‘오늘’을 논하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손바닥으로 뜬 한 줌의 물처럼 편협한 오류를 길어 올리는 날이 많았고, 그럴 때면 보트나 물속에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청년이 두려웠던 것은 돌멩이가 아니었다. 흐르고 흘러 얕고 잔잔한 물길에 다다랐을 때, 시대와 함께 휩쓸려 와 있을 자신의 편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한 번 흘러간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발신자의 손을 떠난 편지는 수정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또한 강이 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듯, 시대가 품고 있는 것은 세월만이 아닌 까닭이었다.

그래서 청년은 더욱 열심히 편지를 썼다. 더 이상 보내지 않는 사연을 남기지 않을 것이며, 보트나 강 속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도 피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 모르고 흉터가 선명하게 남겠지만, 속절없이 곪아빠지는 내상(內傷)보다는 소독약이라도 듬뿍 바를 수 있는 외상(外傷)이 낫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위험한 편지를 써야할 때마다 첫사랑을 떠올렸다.

그녀는 낯선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모처럼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그녀가 “아직 감기가 낫지 않았느냐?”고 청년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환하게 웃었다. 그토록 다짐했건만 사연은 또 어디엔가 쌓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속이라 쓰레기봉투에 담아버릴 수도 없었고, 두어 번의 클릭으로 포맷해 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청년은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전원 버튼을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일어섰다. 그리고 서랍을 뒤져 몽당연필 한 자루와 무뎌진 문구용 칼을 찾아냈다. 스마트폰의 디엠비에서는 여전히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는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참 오래간만에 깎아보는 연필이었지만, 다행히 손가락을 베지 않았다.

청년은 반듯하게 날이 선 연필로 또박또박 편지를 써 내려갔다.

참 많은 편지를 썼다. 다정하고 즐거운 사연보다 애틋하고 절절한 사연이 많았던 까닭에 나는 글쟁이가 되었다. 황금보트에 오르는 것은 고사하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나날이지만 나는 여전히 행복하다.

이제 이 일이 직업이 된 까닭에 한없이 둥글고 달콤한 사연은 자주 쓸 수 없을 것이다. 차갑고 날카로운 사연을 쓰다가 그로인해 돌멩이를 맞을 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글로 사람을 해치거나, 저주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내 편지는 왼쪽가슴의 통증에서 시작되었고, 서늘한 그리움을 담아 편지지를 채워왔으니까. 비록 문장은 무뚝뚝해져 버렸지만, 강가에 서서 시대와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마찬가지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 본 적도 없고, 분노와 증오를 옮겨 써 본 적도 없다.

그래서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이 밉지 않고, 내가 흘리게 될 피가 두렵지 않았단다. 이렇듯 나는 담담하단다. 부디 걱정을 거두고, 그대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시라.

창밖에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그는 여전히 감기몸살을 앓고 있었다. 때때로 심장이 두근거렸고, 이마에는 신열이 고였다. 눈앞이 아득했고, 입맛을 잃은 혀끝에선 자꾸 한숨이 샜다. 몸뚱이는 오래 전에 겪었던 피로를 기억해내는 듯, 발끝부터 머리카락까지 저렸다.

그는 깎다만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쥔 채,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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