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긴긴 江을 읽고 생각의 노을이 되다 ‘土地’
박경리의 ‘토지’는 우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우리 민족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 가운데 진정한 삶에 대한 탐색을 탁월하게 보여준 역작이다. 박경리의 문학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소외문제, 낭만적 사랑에서 생명사상으로의 흐름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생명본능 이상으로 중요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 생명사상이 종합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바로 '토지'며 주인공 서희는 바로 이 존엄성을 지키려는 가장 강한 의지의 인물로 등장한다.
‘토지’는 그 독특한 성격으로 하여 연재되는 중에도 문학계에 다양한 논의를 유발시켰으며, 완간된 후에는 한국 문학연구학회 주최로 ‘토지와 박경리의 문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개최되는 등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토지’에 관한 비평서만도 이미 여러 권 출판되었고, 전국에서 제출된 석․박사 논문만 수십 편에 이르고 있다. 토지는 국제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에 ‘토지 1부’가 일본 문예신서에서, 1994년에는 역시 1부가 프랑스 벨퐁출판사에서, 다음해에 1부가 영국 키건폴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서희를 위한 노래, 길상을 위한 눈물 ‘土地’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문을 연 ‘토지1부’는 1897년 한가위부터 1908년까지 약 10년간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무대로 하여 5대째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최 참판댁과 그 소작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1860년대부터 시작된 동학운동, 개항과 일본의 세력강화, 갑오개혁 등이 토지 전체의 구체적인 전사(前史)가 된다.
2부는 1부의 마지막으로부터 약 2~3년이 경과한 1910년부터 약 7~8년간 간도에 정착한 서희 일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간도 이민현상과 독립운동의 여러 면모, 가치관의 변절 등 당시 간도 한인사회(韓人社會)의 삶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된다. 서희는 공 노인의 도움으로 용정에서 대상(大商)으로 성장하나, 함께 온 농민들은 외지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서희와 길상의 혼인, 구시대를 대표하는 김 훈장의 죽음, 이용과 월선의 애끓는 사랑과 월선의 감동적인 마지막 모습, 일본의 밀정이 된 김두수와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의 대립 등이 펼쳐진다.
3부는 최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귀국한 다음 해인, 1919년 가을부터 1929년 광주학생운동까지 약 10년여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주된 공간 배경은 1920년대 서울․진주․만주 등으로 점차 확대된다. 특히 일제에 의하여 추진된 자본주의화와 경제적 억압이 도시를 중심으로 포착되고, 여기에 이상현을 중심으로 3․1운동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지식인 집단의 갈등과 혼란이 엮어진다. 조준구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서희의 허무감, 김환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의병활동, 송관수를 중심으로 한 형평사 운동, 간도와 만주의 망명객들의 생활, 이상현과 기화의 불륜, 임명희와 조용하의 결혼이 그려지며, 임이네와 용이, 김환 등은 죽음을 맞이한다.
4부는 1929년의 원산 노동자 파업에서부터 만주사변,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상황이 주로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되고, 농촌붕괴와 도시유랑민들의 증가 등 1930년대 일제의 폭압과 혼란상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예술, 사상, 민족성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전편을 통해 폭넓게 제시된다. 서희의 아들 환국과 윤국의 성장, 길상의 출옥, 군자금 강탈사건 이후 만주로 도피하는 송관수의 갈등, 명희의 이혼과 새로운 삶, 유인실과 일본인 오가다의 사랑, 그리고 인실의 도피와 변신, 색소폰 주자로 떠도는 송관수의 아들 영광의 모습 등이 그려진다.
5 부는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확대된 공간을 오가며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박 의사의 죽음, 양현과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실과 오가다의 재회, 길상의 관음탱화 조성, 소목장이가 된 조병수와 아버지 조준구의 처절한 죽음, 후일담 형태로 채워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주요 인물간에 얽혔던 한이 한겹씩 풀어진다. 또한 해도사와 소지감 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모임, 이홍의 딸 상의의 일본인 학교생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우개동의 행패 등을 통해 일제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1945년 8월 15일, 양현은 강가에 나갔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를 서희에게 전한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189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달려온 ‘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2002년 나남출판사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 토지는 전21권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에 대해 사전식으로 정리해놓은 '인물사전'이 따로 있어 토지에 등장하는 600여 명의 인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즐거움을 더한다.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소설가 ‘박경리’
1927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1946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5년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그밖의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單層)’, ‘노을진 들녘’, ‘신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못 떠나는 배’가 있다.
지은이|박경리 / 펴낸곳|나남출판사 / 전 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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