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여성 조사과정에서 두 번 죽다
신고 접수에서부터 수사과정까지 피해자 인권 도외시
수사, 재판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성폭력 '2차 피해' 심각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경남 밀양의 집단성폭력 사건은 그 피해자와 피의자가 청소년들이고, 피해가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다. 더욱이 이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경찰과 일부 언론이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 당초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은 여자경찰이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피해자의 신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언론에 유출됐으며, 아무런 피해자 보호조치 없이 대질조사가 이뤄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보호의 기본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밀양 성폭행사건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성폭력 사건의 수사실태를 취재했다.


밀양 성폭행사건, 수사 기본이 실종되다
밀양지역 고교생의 집단성폭력 사건을 수사중인 울산남부경찰서가 수사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비판을 받고있는 것은 성폭력 사건수사에 있어 가장 염두에 둬야할 피해자 보호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울산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3월 성폭력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성폭력 사건의 신고 접수에서부터 수사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를 위해 지켜야할 사항들이 크게 강화됐으나 이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성폭력특별법에는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조사받을 수 있도록 여경조사를 신청할 수 있게돼 있다. 피해자가 여경으로부터 직접 조사받거나 여경 입회하에 조사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신청하는 것인데 문제는 일반인들이 이를 모르기 때문에 경찰이 사전에 제도를 설명하고 신청여부를 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13세 미만의 어린이에게는 여경 조사가 필수이며 의무다. 그러나 울산남부서는 이같은 고지를 하지 않은채 수사를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여경조사제도를 활용하지 못했다. 피해자의 신청이 없더라도 성폭력사건의 경우 경찰은 직권으로 여경을 조사에 참여시키는 등 여경조사 제도를 적극 활용하도록 경찰청 지침에 돼있다. 남부서는 형사과에 여경이 없기 때문에 조사계나 여성청소년계에 협조를 구해 피해자 조사시 참여시켜야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다른 경찰서에는 여경조사에 대비해 참여할 여경들의 순번까지 정해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진술녹화를 안한 것 또한 문제다. 피해자가 13세 미만 청소년일 경우 진술녹화를 의무적으로 해야한다. 13세 이상이라도 경찰이 자체 판단해 진술녹화를 할 수 있다. 진술녹화는 원칙적으로 피해자들이 법정에 가서 또다시 수치심을 느끼며 같은 진술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도록 증거 확보차원에서 하는 것인데 이를 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가해자-피해자 대면금지를 위배했다. 성폭행사건 수사에 있어 피해자를 가해자들과 대면시키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다른 경찰서의 경우 범인식별실이 설치돼 있어 조사받는 가해자들을 피해자가 유리벽으로 차단된 옆방에서 보고 범인임을 지적하도록 돼있지만 남부서에는 식별실이 아예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남부서는 다른 성폭력 사건 수사시 다른 경찰서의 식별실을 이용해 왔는데 이번 사건 수사때는 가해자 10여명을 줄세운 뒤 피해학생들이 가해자를 가려내도록 하는 원시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또다시 위협을 느껴야 했음은 물론이고 피해자가 가해자 가족들과 마주쳐 "신고하고 잘사나 보자"는 등의 협박까지 받아야했다.
그밖에 수사교육을 소홀히 했다. 평소 성폭력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형사과 직원과 여성청소년계, 조사과 여경 등에게 철저히 교육하고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갖춰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蘆┎杉募?지적이다. 특히 이번처럼 형사과에서 직접 수사를 담당할 경우에 대비해 피해자 인권보호 등을 위한 교육에 철저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여성청소년계와 형사과가 소속이 분리돼 유기적인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구조적 문제도 노출됐다. 결국 피해자 보호를 우선시해야 할 성폭력사건을 형사과에서 가해자 검거와 수사에 중점을 두면서 마치 폭력배사건 다루듯 하다보니 피해자 인권을 도외시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교내-이웃 성폭력 위험수위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으로 청소년들의 성폭력 문제가 사회문 제로 다시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청이 최근 발간한 성폭력 전담조사관 매뉴얼에 나타난 청소년 및 아동 성폭력 유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청소년 "아동 성폭행 사건은 주로 '학교 짱'이라고 불리는 교내 폭력써클이나, 피해아동과 가까운 지인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 구미에서 발생한 중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밀양 사건과 너무도 유사해 학교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중학교 1학년인 A양은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일명 '학교짱'이라고 불리는 중3 남학생 6명으로부터 7차례나 집단 성폭행을 당해왔다. A양은 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이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소리도 질렀지만 '학교짱' 인 가해자들을 두려워해 아무도 A양을 도와주지 않았다.
모범생으로 자라온 A양은 성폭행 사실을 숨겨오다 결국 임신에 대한 두려움에 지난해 8월말 경찰에 신고한 뒤에야 이들의 손아귀에 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이번 사건을 통해 '학교짱'이 학교 내에서 차지하는 권력과 힘없는 아이들의 복종 구조를 알게 됐다"며 "성폭행을 자행한 것을 자랑해왔으며 강간도 제일 싸움을 잘하는 아이대로 순서를 정해서 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자료집에 밝혀진 대다수의 사례는 아동 성폭행이 피해 아동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선후배나 이웃 등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심지어 친부모에 의해서도 성폭행이 이뤄지고 했다.
충남 대전에서는 집을 드나들며 선배의 유치원생 딸을 수십차례 성추행한 이모씨가 경찰에 검거됐고, 경기 연천에서는 30대 남성이 '삼촌'으로 부르며 따르는 10살짜리 동네 여자아이 3명을 차례로 성추행한 사건도 있었다. 제주에서는 같은 동네에 사는 60대 노인이 학습장애를 겪고 있는 여중생 두명에게 용돈을 준다며 유인해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이 여중생들의 경우 언어구사 능력이 떨어져 일관된 진술을 하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었지만 진술녹화 시스템을 이용해 성폭행 경험을 보여주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해 범행을 입증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아내가 가출한 뒤 12살짜리 친딸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가한 친아버지가 경찰에 검거된 사례도 있었다. 가해자인 아버지는 실직후 상습적으로 딸을 성폭행해 왔으며 남동생이 있을 때도 성폭행을 하는 등 수법이 점점 대범해지자 이를 더이상 견디지 못한 피해자의 신고로 검거됐다.



성폭력 피해 여성을 죄인 다루듯
지난해 성폭행을 당해 경찰서 강력반에서 조사를 받던 20대 후반의 회사원 A씨. 그는 다시 한번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수사관은 A씨에게 "옷을 벗었어, 벗겼어" "똑바로 말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A씨는 "어머니가 곁에 있기를 원했지만 거절당했으며 공개된 자리에서 수사가 진행돼 수치심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엄마가 다니던 학원강사에게 성폭행 당한 B양(9)은 가해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바람에 경찰 대질수사, 검찰 수사를 되풀이 받아야 했다. 1년여에 걸친 여러 차례의 진술에 심적 타격을 받은 B양은 자폐증세를 보여 소아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성폭력 범죄 피해자가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또 한번 겪게 되는 정신적․심리적 고통인 성폭력 '2차 피해'가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피해자 보호제도가 미흡하고 수사관 등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 2002년 성폭력 2차 피해로 상담한 건수는 모두 267건. 이는 전체 상담건수 2961건의 9% 수준이다. 상담 결과를 분석해 보면 일선 수사관의 인식 부족이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함께 즐긴 뒤 고소하는 게 아니냐" "피해자가 가해자를 유혹한 것" "남자의 애정 표현" 등으로 가해자를 편파적으로 비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것. 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무고죄'등을 들먹이며 피해자를 협박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지난해 4월 '성폭력 사건 조사지침'을 만들어 전국 일선 경찰서에 내려보냈다. 이번 밀양 성폭행 사건에서 지침은 무용지물이었다. 지침에 따르면 경찰은 피해 여성 조사 때 피해자에게 심리적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 여학생들은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에게서 "밀양 물 다 흐렸다"는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지침에는 여자 경찰관이 상담실 같은 별실에서 여성 피해자를 조사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피해 여학생들은 여자 경찰관에게 조사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으나 1차 조사 때 여경이 잠시 입회한 것을 제외하곤 형사계 사무실에서 남자 경찰관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또 "대질 조사는 최후 수단으로 시행하라"는 지침이 있음에도 피의자 앞에서 자신을 괴롭힌 남학생을 지명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지침에는 이를 어겼을 때 징계, 처벌 규정이 없는 실정이다.
전국의 성폭력 전담 경찰관은 10월 현재 774명. 이 중 여성경찰관은 264명에 불과하다. 아동, 청소년 성폭력 사건이 올해에만 1만2,000여건인 점을 감안하면 여성 경찰관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한 실정이다.

'유명무실’한 성폭력 증거보전제
또한 성폭력 피해자가 경찰과 검찰, 법원에서 똑같은 진술을 되풀이하면서 입는 정신적 충격이나 수치심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증거보전제도가 수사기관의 무관심 속에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증거보전제도는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 건강 등 이유로 법정에서 증언하기 어려울 때 수사기관으로 판사를 불러 한번만 진술하고 이 진술서를 법원에서도 증거로 사용하는 제도다. 경찰에서 작성된 일반 진술서는 법원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법정 진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경찰과 검찰, 법원에서 진술을 반복하는 것이 성폭력 피해만큼이나 깊은 상처를 남긴다고 입을 모은다. 대부분 적게는 2번, 많게는 10번까지 진술을 해야 한다. 강간을 당한 대학생 A(21)씨는 증언을 하러 법원에 찾았다 잊지 못할 공포를 경험했다. 법정 밖에서 피고인과 마주친 것이다. 그는 "복도에서 어떤 남자가 웃으며 걸어와 누구씨죠?'라며 아는 척을 했다. 그 순간 가해자란 사실을 알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고 말했다. A씨는 증언에 나섰지만, 정신적 충격 탓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다른 성폭력 피해자인 대학생 B(20)씨는 경찰, 검찰, 법원에서 자꾸 불러 결국 한 학기를 휴학했다. 그는 "직장 다니는 사람은 어떻게 수사와 재판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법원에 오느라 학교 수업을 빠질 때마다 교수한테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고, 마음도 혼란스러워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 나온 군인에게 강간을 당한 고등학생 C(16)양은 가해자가 현역 군인이라는 이유로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은 "성경험은 있느냐"는 등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몇차례 조사받던 C씨는 성폭력 때 받은 정신적 충격에다 수사과정에 겪은 모멸감으로 부분 기억장애를 얻고 말았다.
이러한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난해 3월 성폭력 특별법을 개정, 증거보전제도를 한층 강화했다. 일반 형사사건과 달리 성폭력 사건에선 경찰, 검찰 뿐 아니라 피해자가 직접 증거보전을 신청할 수 있고, 피해자가 13세 미만이거나 정신장애인일 경우 영상물을 이용한 증거보전을 원칙으로 규정했다. 법원도 지난 9월 성폭력전담 재판부를 만들면서 증거보전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담 판사가 증거보전을 맡도록 대법원 규칙을 변경했다. 증거보전 때 피해자의 진술을 지켜본 판사가 나중에 사건을 처리, 피해자의 법정증언이 없어도 유, 무죄 판단에 어려움이 없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증거보전 방법 아무도 안 가르쳐 줘
그러나 강화한 증거보전제도가 활용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검찰 관계자는 "올해 서울 지역에서 발생한 13세 이상 성폭력사건에서 증거보전이 신청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에게 증거보전을 설명하지만, 대부분 복잡하다며 신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정을 찾은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증거보전제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성폭력 피해자 D(24)씨는 "경찰관이나 검사 누구도 진술을 한번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길 해주지 않았다"면서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뭐하러 수치심에 몸을 떨며 5~6차례씩 불려 다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수사기관이 증거보전을 기피하는 것은 진술서 작성보다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 때문이다. 증거보전을 위해선 피해자, 가해자, 판사, 수사기관 등이 한 시간에 한 장소에서 만나 진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사건이 많은 경찰, 검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또 판사 앞이라 경찰, 검찰이 평소대로 수사하기가 껄끄러운 점도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수사란 고유한 영역에 판사가 개입하는 것도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지난 9월 '범죄피해자 보호, 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증거보전제도 활성화 방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여성단체 등은 13세 미만뿐 아니라 모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증거보전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지원 변호사는 "판사의 업무가 너무 늘어난다는 지적도 있지만, 피해자의 인권을 고려하면 증거제도 의무화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 상담소 정유숙 상담인권국장은 "피해 진술을 최소화하도록 모든 성폭력 피해자에게 비디오 진술 등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편안한 공간에서 진술하도록 법정 밖에서 진술하는 방안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술녹화 기록에 드러난 '아동 성폭행' 백태
"진술녹화 활용으로 '성폭행 수사' 개선해야"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온 국민이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경찰청이 아동 성폭행 진술녹화 기록을 모아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 자료집은 수사에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아동 성폭행 사례를 제시하는 한편, 진술녹화를 적극 활용해 피해자가 정신적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면서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선생님도 모른다"=경북의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중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밀양 사건과 너무도 유사해 학교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현재 중학교 1학년인 A양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학교짱으로 불리는 싸움 잘하는 남중생 6명으로부터 7차례나 집단 성폭행을 당해왔다.
A양은 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이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미친듯이 소리도 질렀지만 아무도 A양을 도와주지 않았다. 학교짱으로 불리던 이들의 주먹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결국 임신의 두려움에 지난해 8월말 경찰에 신고한 뒤에야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자료집에 밝혀진 상당수 사례는 아동 성폭행이 피해 아동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충남 대전에서는 집을 드나들며 선배의 딸을 수십차례 성추행한 이모씨가 경찰에 검거됐고, 경기 연천에서는 30대 남성이 삼촌으로 부르며 따르는 10살짜리 동네 여자아이 3명을 차례로 성추행한 사건도 있었다. 서울에서는 아내가 가출한 뒤 친딸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가한 `안면수심'의 친아버지가 친딸의 신고로 경찰에 검거된 사례도 있었다.
경찰청 이금형 여성청소년과장은 "성인 성폭행은 물론 아동 성폭행도 상당수가 친구 아버지나 가족, 친척 등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며 "아이들을 혼자 놔두거나 맡길 때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진술녹화 힘은 놀랍다”=지난해 7월 부산에서는 B양(5)이 친구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려움에 범인을 지목하지 못하고 사건에 대해 얘기하기를 극도로 꺼리던 B양은 담당 여경이 2~3일간 같이 지내며 과자도 사주고 놀이터도 같이 가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언어적 표현이 미숙해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
담당 여경은 B양을 놀이방처럼 아늑하게 꾸며놓은 경찰서 진술녹화실에 데려가 편안한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B양의 어머니도 같이 지내자 마음이 놓인 B양은 자신도 모르게 피의자 검거에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진술녹화실에 있던 성인 남자의 인형과 여아 인형으로 성추행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것.
결국 거짓 알리바이까지 대며 발뺌하던 피의자는 녹화된 B양의 행동과 진술이 증거로 채택되면서 꼼짝없이 쇠고랑을 차게 됐다. B양 사건이 진술녹화실을 활용해 성폭력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사건이라면 밀양 사건은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만하다. 밀양 사건은 여경을 불러달라는 피해 여중생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질신문 과정에서 여중생이 가해 고교생으로부터 욕설을 듣게 하는 등 성폭행 수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피해 여중생의 무료 변론을 맡은 강지원 변호사가 "전국 247개 경찰서 중 진술녹화실이 없는 곳은 단 4곳인데 울산 남부서가 그 중 하나"라고 강조한 것도 진술녹화제의 효용성과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경찰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진술녹화제는 경찰이나 심리전문가가 피해자를 상대로 면담하는 장면을 녹화, 증거로 제출하는 것으로 지난해말부터 전국 일선서에서 실시되고 있다.

성폭행 피해여성 조사 “이렇게 하세요”
‘범죄와 무관한 질문’ 금물 ‘분노 표출’ 도와줘야
성폭행 피해 여성들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이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충실히 수사하려면 어떤 점을 유의해야 할까. 법무부의 연구 용역을 받아 ‘성폭력 피해자 조사기법’을 개발한 한림대 심리학과 조은경 교수가 최근 열린 여성관련 범죄 수사혁신 토론회에서 40명의 검사들에게 수사시 유의해야 할 점을 강의한 내용이 9일 알려져 눈길을 끈다.
조 교수는 우선 수사 담당자들의 잘못된 통념과 부적절한 조사 환경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조사자들이 무심코 내뱉는 질문 속에 피해자들에게 제2의 상처를 줄 수 있는 위험이 숨어 있다고 경고했다.
조 교수는 성폭력 피해자 진술조서에 나타난 2차 피해 유발 질문에 대한 연구결과 187개의 질문 중 15.5%가 범죄사실의 증명과 무관한 질문이었고 특히 4.3%는 가해자의 ‘사정(射精)’ 여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됐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기본적으로 피해자 조사는 피해자가 사건을 자유롭게 회상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사 장소는 다른 수사관이나 범죄자들이 드나드는 곳보다 밀폐된 장소가 좋고 조사실 크기는 산만하지 않게 피해자와 조사자가 들어가고 탁자를 놓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좋다. 출입구는 하나인 것이 좋고, 변기는 없어야 한다. 조사자는 우선 피해자에게 자신의 이름, 직위, 소속 부서 등을 소개하고 조사를 시작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서 정말 유감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피해자가 견뎌낸 시련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다.
또 피해자가 조사시 분노 등 감정을 표출할 때 조사자는 이런 감정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확인해 주면서 감정을 발산할 수 있도록 해줘서 피해자가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비워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조 교수는 조언한다. 조사자는 피해자의 반응을 진지하게 듣고 공감을 전달하는 것이 좋지만 절대 피해자에게 "당신 기분이 어떤지 압니다"라고 말해선 안된다고 조 교수는 충고한다. 이런 말을 들은 피해자가 ‘나의 기분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화를 내거나 뒤로 물러날 수도 있기 때문.
"모든 게 잘 될 겁니다", "울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모두 아물게 마련입니다", "이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다친 곳은 없잖아요"와 같은 말은 금물이다. 조 교수는 피해자가 자유롭게 당시 상황을 진술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만일 피해자가 말하기를 주저하면 조사자는 적어도 7초간은 인내심을 가지고 잠시 침묵을 허용해주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조사자는 개방형 질문을 통해 자세한 답변이 도출될 수 있는 방법으로 질문하되 피해자의 답변이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되도록 영향을 주어서는 안되며 "왜?"라는 질문은 가급적 맨 마지막으로 미뤄야 한다고 조 교수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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