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외길 인생 'DQ양복점‘ 자존심 승부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맞춤양복 만들기 ‘외길’

언제나 우리의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이 있다. 한번도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지만 묵묵히 세상을 살아가는 얼굴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초스피드시대, 사람들은 변하는 세월에 살아남기 위해 발 빠르게 변해야 산다면서 발버둥을 친다. 변하지 않으면 마치 뒤떨어진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여기 이 사람을 보면 세월이 정지된 느낌이다. 흐르는 세월을 꽁꽁 붙들어 매두기라도 한 듯 변하지 않는 사람 DQ양복점 김형철 사장.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고 4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단 한치 흔들림 없이 오직 한 가지 일에 몰두해 온 자체만으로도 그는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기성복이 없던 시절 양복점은 구멍가게처럼 동네마다 흔했다. 언제부턴가 동네 양복점이 하나둘 사라졌다. 이젠 유명 인사가 찾는다는 서울 명동의 내노라하는 양복점쯤 돼야 명함을 내놓는다. 인터넷에는 이태리 명품 스타일 운운하는 사이버 양복점이 생겨났다. 세상이 참 많이도,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

맞춤양복의 자존심 ‘DQ양복점’
그러나 1977년 서울역 대우빌딩 아케이드에 문을 연 'DQ양복점'은 옛 모습 그대로다. 지난 60년대 리조사 의류업체와 인연을 맺으면서 40년 동안 양복을 지으며 외길을 걸어온 김형철 사장. 그는 평범한 양복장이다. 진열장에는 흔한 기능인대회 황금색 메달이 없다. 수백만원대의 명품 양복을 만들어 본 적도 없다. 다만 손님 몸에 편안하고 어울리는 양복을 만들었다는 자부심만은 대단하다. 꼼꼼한 솜씨와 성실함으로 국내에서 사랑받는 양복장이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지만 맞춤양복 분야에서 외길을 걸어오며 나름대로 많은 보람도 느끼고 열심히 장인정신으로 맞춤양복의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오로지 최고의 양복만을 고집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한올한올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
김 사장은 양복 만들기를 천직으로 여긴다. 맞춤양복 만들기 외길을 걸으면서 맞춤양복의 자존심과 명성을 굳건히 지켜왔다. 더욱이 최근의 기업화된 기성양복과는 달리 맞춤양복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작품성을 표방하며 명품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혀나가고 있다.
김 대표는 “아직도 변함없이 국내의 유명인사는 물론 수많은 단골손님이 찾아오는 이유는 기성양복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수작업, 즉 수만번의 손바느질을 통해 이뤄지는 한 벌의 작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누구라도 맞춤양복을 한번 입고나면 다시는 기성양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다양하고 민감한 패션의 변화를 일순간도 놓치지 않고 있는 김 사장은 아직도 장인정신이 살아 숨쉬는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단골고객에게 제공,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한올한올 정성 ‘고객만족 100%’
이제는 양복재단일을 배우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양복점의 맞춤양복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위해 김 사장은 가위를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양복업계는 내부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어왔다. 맞춤양복과 기성복이 서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치열한 경쟁을 거듭해온 가운데, 현재는 막강한 자금력과 '기업'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기성복이 양복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다. 갈수록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도 이러한 양상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
우리 맞춤양복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60대 이상의 나이 '지긋한' 분들인 것도 이런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맞춤양복을 굳이 고집하지도 않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사장은 요즘 맞춤 양복이 기성복에 밀려 주위에서 양복점 찾기도 어렵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찾는 고객의 100% 만족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에 맞춤양복의 매력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40년 단골을 고집한다. 내 몸에 딱 맞는, 나만의 위한 딱 한 벌의 양복. 40년 단골친구의 편안한 발걸음처럼 ‘DQ양복점'의 양복에는 정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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