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류역사의 새로운 전기를 연 ‘양복’
현재 양복이 정착되기까지 지난 100여년의 흐름
개화파 정치가 서광범의 최초 양복에서 기성복으로의 변천과정



서양사람의 옷이라고 정의되는 ‘양복’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초로 접한 것은 17세기초다. 1627년 네델란드인 벨트브레가 항해중에 파선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서울로 호송되면서 비록 선원의 복장이긴 하지만, 그때의 옷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초로 접한 양복인 셈이다. 19세기까지는 이처럼 조난을 당한 서양 선박의 선원이나 승객들의 복장을 통해 양복을 접하게 되었으나, 19세기 중반부터는 서양의 개방압력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한 군인, 상인 그리고 선교사의 복식까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다. 그 후 1837년 프랑스 주교 앙베르가 입국할 때 입고 온 옷이 오늘날 우리가 입는 '양복'의 개념과 비슷한 복장이다.


◈ 양복 역사의 시작 서광범
우리나라 최초로 양복을 입고 타이를 맨 사람은 구한말 개화파 정치가 서광범으로 1881년, 신사유람단 중의 한 명이었던 서광범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 양복을 입게 되었다. 서광범이 구입한 일본 요코하마 양복점의 30달러 짜리 양복이 우리나라 양복사의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는 순간이다. 서광범의 양복을 보고 김옥균과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 바로 양복을 구입했는데 당시 그들이 구입한 양복은 라펠이 작고 앞단추가 3~4개 달린 풍성한 실루엣의 ‘섹코트’였다.
그 뒤 1833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전권대신 미국을 찾은 민영익과 수행원들은 여객선을 타고 유럽 여러나라들을 구경하면서 양복을 구입했다.

◈ 고종 32년, 양복착용 공인

고종 32년(1895)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양복의 착용은 공인되으며 우리나라 서양 의복 정착에 가장 큰공을 끼친 사람들은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의 상황은 1910년 합일합방으로 ‘양복은 곧 매국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렇지만 서양의 물결을 내부적인 힘으로만 막을 수 없어서 19세기말부터는 서울을 비롯한 평양, 부산 등 대도시에 양복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맞춤 양복점은 일본인 하마다가 설립한 ‘하마다 양복점’으로 양복 공인 후 점차 규모를 갖춘 양복점으로 번창해 한인 기술자들도 양성해냈다.
1903년에는 한인이 설립한 ‘한흥양복점’이 생겨났으며 이로부터 3년뒤에는 서울에 약 10여개의 한인 양복점들이 생겨났다.

◈ 양복 실루엣 변천

서광범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일본에서 사입은 섹코트 양복을 시작으로 1905년을 전후해서는 서양의 예장인 프록코트가 선을 보였다. 1910년경에는 프록코트에 실크햇과 스틱을 갖추어 개화 양복신사의 격식과 품위를 표현했다. 1910년대에 양복 스타일은 영국형의 브리티시 모델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수트와 코트. 예복 등 양복에서 갖추어야 할 종류들이 모두 들어왔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오늘날 콤비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세퍼레이츠’가 많이 팔렸으며 이 시기에 스프링코트와 오버코트, 양산과 레인코트 등이 들어와 우리나라 남성복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기를 맞이했다.
1930년대 양복의 유행은 당시 ‘권번’이라고 불렸던 기생들의 역할이 컸다. 당시의 양복은 프록코트와 싱글, 더블수트, 인버네스 코트, 체스터필드 코트 등으로 다양했으며 풍성한 느낌의 볼드룩도 처음으로 등장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대동아 전쟁의 발발과 세계대전의 확전 등으로 사회 전체에 긴장감이 조성되면서 딱딱한 군복풍의 양복이 유행하게 되었다

◈ 멋의 극치, '마카오 신사'의 등장
1945년, 일제가 물러난 자리를 채운 것은 미국 문화였다.
신사복도 미국의 영향을 받아 '박스스타일'이 크게 유행, 헐렁한 실루엣의 볼드룩이 붐을 탔다. 곧 이어 아메리칸 스타일 쪽으로 신사복의 경향이 완전히 기울었는데, 어깨에 심이 거의 들어가지 않고 허리 실루엣이 파이지 않아 '내추럴형'이라고도 불렀다.
전쟁 뒤에는 군복을 개조한 신사복이 오랫동안 유행했으며 바지에 단추대신 지퍼를 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휴전 직후에는 마카오신사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 말은 마카오로부터 불법 유통된 원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신사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마카오신사들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넥타이, 즉 선이 붉은 캘리포니아 레드를 즐겨 맸다. 마카오에서 생산된 고급 복지에 선 붉은 넥타이가 한 쌍을 이룬 스타일은 우리나라 신사복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될 만큼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55년 무렵부터 온전한 틀을 갖춘 신사복이 새롭게 유행했다. 재킷과 바지, 조끼가 한 벌을 이루는 쓰리피스 수트가 출현했고, 멋쟁이들의 상징이던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에는 국내 처음으로 미국의 '아이비 룩'이 선보였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폭 10cm넓이의 와이드 타이가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신사복의 깃이 넓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유럽 스타일을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시도와 변화를 거쳐 한국적 스타일을 찾기 시작했다.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변화
1960년, '복장연구회'와 '대한 복식디자이너협회'가 공동 주최, YWCA회관을 빌려 거행했던 패션쇼를 비롯, 1965년 4월 '지큐 양복점'이 개최한 '남성복장 발표회'가 맞춤복 시대의 큰 길을 열었다.
이때부터 충무로, 광교 등에 신사복을 전문으로 하는 양복점들이 문을 열면서 맞춤복 시대를 열게 되었다.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1960년대 후반부터 신사복이 일부 특수층에서 다수 대중들의 의복으로까지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그 수요도 증가했다. 이때부터 양복 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신사복이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변화한 것이다.
1970년 1월 13일, '대한복장협회'와 '대란 복장기공조합연합회', '대한복장학원', 한국소모방협회' 등 서울 태평로 건설회관에서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스타일을 확립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1월 13일을 복장의 날로 정했다. 1980년대 이전은 양복의 대향생산과 소비가 조화를 이루면서 기성복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 21c, 다시 돌아온 맞춤정장 시대
최근 개성을 중시하는 2030세대 사이에 맞춤양복선호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맞춤복의 최대 장점은 역시 여러 체형의 결점을 보완해 주며, 예전의 개인 양복점과는 달리 제작기간 또한 일주일 이내로 단축됐다는 점이다. 또한 개개인의 취향과 트렌드를 최대한 살릴 수 있어 자기만의 연출이 가능해 비교적 비싼 가격임에도 최근 각광 받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동시대 역사와 문화를 표현하는 의복은 앞으로도 꾸준한 변화를 통해 인간의 최고 가치를 부여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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