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유광남

 

일패공주는 눈치가 매우 빨랐다.

“여자로군요....음......설마 장예지? 예지낭자를 만났어요?”

김충선은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하지만 기다리겠노라고 약속했는데...어디론가 사라졌어요. 혹시 봤소?”

일패공주는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했거늘...당신들이 지금 만나고 있다는 거예요?”

김충선은 무엇이라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한 번도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 본적은 없지 않았던가.

“그게......저......”

“난 본래 솔직한 걸 좋아해요. 서로의 진심을 감추고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혐오하죠. 두 사람은 그동안 가면으로 살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들을 벗었군요. 그러나 축하하고 싶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네요.”

그녀는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조선여인과는 사뭇 달랐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토록 솔직하게 표현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김충선은 일순 당황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은 친구여자와 잘 해 보세요!”

여진의 공주 아율미는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쏘아 대고는 순식간에 말을 몰아서 인파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전쟁은 언제라도 하겠는데 여자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렵구나.’

김충선은 더이상 지체 할 수가 없어서 장예지를 찾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의금부의 이순신에게로 달려갔다.

“이 사람아, 어딜 그리 급하게 가나?”

김충선을 부른 것은 승정원의 친구 구대일이었다. 그가 손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김충선은 마음이 급했다.

“약속이 있어서!”

“소식 들었네. 통제사가 방면되신다고?. 축하하네.”

소문은 정말 빠르기도 하다. 김충선은 구대일에게 웃어 보이며 발걸음을 빨리 서둘렀다.

“미안하네. 나중에 보세...내가 좀 급해서.”

서애대감 일행과 그곳 의금부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었다. 구대일이 그의 등 뒤에 대고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은 급한 사람들이 많군. 좀 전에는 어떤 몽고말을 탄 여자가 다른 어떤 낭자를 급하게 말에 태우고 달려가더니!”

이순신은 긴 잠에서 깨어나 몽롱한 의식 속에 있었다.

“장군께옵서 심신이 허약 하시어 오래도록 혼미해 계셨습니다. 이제는 기력을 수습하셔야 합니다.”

이순신은 잠깐 눈을 감았다. 교토를 기습하고 천황을 사로잡아 조선으로 당당히 귀국한 것이 생생하였다.

“조일전쟁의 원흉 히데요시는 처형했는가? 도쿠가와 영주의 군대가 승리는 했겠지? 왜적들은 남김없이 물러갔고?”

김충선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옥중 수감으로 더욱 피폐해진 이순신의 몰골이 가슴 아픈 연민으로 뭉클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아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장군, 꿈을 꾸시었군요. 적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아군이 달라졌습니다. 장군의 무고가 밝혀졌습니다. 조정에 올렸던 서장이 발견됨에 따라 장군은 방면되실 겁니다.”

이순신의 파리한 안면에 미묘한 경련이 일어났다. 꿈이었다니? 교토의 한복판을 가로 지르며 천황이 머무는 고쇼를 불태우고 항복을 받아냈던 그 통쾌함이 꿈이었다니! 방면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차라리 죽는 것도 괜찮다. 지난 일본의 기습 공격이 사실이라면 어찌되어도 좋았다. 게다가 이순신의 나라를 위한 반란이었다니!

‘꿈이라니...참으로 허망하다.’

감옥은 허무라는 이름의 절망으로 심연(深淵)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구덩이는 깊었고 손은 닿지 않았다. 이순신은 나락의 끝에서 허우적대며 부유(浮游)하는 꿈을 잡으려 했다. 김충선이 그의 앙상한 편린(片鱗) 같은 손을 감싸 쥐었다. 온기는 없으나 극도의 아픔이 전해져 왔다. 그 손끝으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바다를 뒤덮은 왜적의 함대가 되어 밀려 들어왔다. 그 격노(激怒)를 김충선이 삼켰다.

“장군이 석방 되시면 우린 다시 꿈을 꿀 수 있을 겁니다. 조선을 구하는 그 어떤 꿈이라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장군이 돌아오시면 그것

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렇구나.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아버님, 잠시 일어나시지요. 아버님을 뵙고자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충선의 부축을 받으며 이순신이 몸을 일으켰다. 제일 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이는 조선의 영의정 서애 유성룡이었다.

“서애대감께서 어찌 이런 걸음을 하시었소이까?”

“통제사, 그 어디엔들 가지 않을 수 있겠소?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정으로 고통 받는 장군을 위해서라면 내 지옥이라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소?”

“지옥은 사양하겠소이다. 거긴 두 번 다시 갈 데가 못되오이다. 다음 번에는 극락으로 모시겠소이다.”

이순신이 여유를 찾고 있었다. 그의 농담에 좌중의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며 웃음소리가 넘쳤다.

“통제사는 꼼꼼하게 전황을 기록하고 군비를 조사하며, 작전도 치밀하게 점검하고 수군의 훈련 역시 반복해서 여러 차례 시행하는 등 장수로서의 행동이 완벽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분이거늘...... 오늘 뵈니 입담에도 소질이 있으시구려.”

언제나 재치 있는 언변으로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꾼인 병조판서 오성대감 이항복이었다. 그를 발견한 이순신이 가볍게 묵례를 보냈다.

“이 사람은 죄인이온데 병권의 수장께서 오셨으니 감읍할 따름이외다.”

“죄인이 아님이 백일하에 밝혀졌소이다. 주상께서도 여기 지중추부사의 통제사를 위한 신구차(伸救箚)를 감격해 하시며 내일 날짜로 백의종군(白衣從軍)에 석방을 명하시었소이다.”

이순신이 무릎을 꿇으며 대궐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조선의 왕 선조는 눈물로 호소하는 정탁의 상소를 받아드려 통제사 이순신을 방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꾸몄던 졸렬한 음모가 발각되자 어쩔 수 없이 무마하고자 한 선택의 결과였다. 왕은 비열 하였으나 그 또한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순신의 손을 거머쥐었다.

“장군을 구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첫 번째 공은 바로 사야가 김충선이었소이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감탄조로 거들었다.

“지당한 말씀이요.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는 않을 것이요. 그의 노고는 참으로 컸소이다.”

이순신은 사야가 김충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난 한 달 간 그는 이순신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 애썼을 것이다.

“고맙구나.”

김충선은 울컥 하는 심정이었으나 말을 아꼈다. 밤을 새워가며 한산도에서 올라 온 이울과 이회 형제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도 이구동성으로 김충선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아버님의 구명을 위해 견마의 노고를 펼쳤습니다. 우리도 감히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냈습니다.”

조선의 영의정 유성룡도 찬사를 쏟아냈다.

“지난 한 달은 내 생애 가장 긴 한 달이었소. 그와 같은 열정을 지닌 조선의 충신, 장군의 충신은 처음이었소. 나를 진이 빠지도록 고뇌하게 만들었소이다. 김충선이란 반쪽 일본인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요!”

그들은 사야가 김충선이 꿈꾸었던 이순신의 나라를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사야가를 응시 하였다. 신기한 놈이었다.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할 그가 왜 조선을 선택 하였고, 자신을 선택 했을까? 조선인보다도 더 조선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순신, 자신을 조선의 왕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장계만 발견되지 않았다면......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이순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는 말이 새어나왔다.

“그래!...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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