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생명의 거처 '제주바다' 화폭에 고스란이 담아내

[시사매거진/제주] 제주에서 나고 자란 화가 김용주는 제주의 숲과 바다를 그린다. 작가는 198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작년까지 총 1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을 통해 제주의 자연을 선보여 왔다. 최근에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하고 재현하는 풍경화 장르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제주바다’를 연작하고 있다. 그 문제의식은 처연한 역사를 품고 있는 제주바다가 강한 에너지를 풍기며 대기를 머금고 빛을 발산하면서 나타나는 순간적 장면에서 조형적 가치를 탐색하거나, 고향 바다가 지닌 땅의 의미나 역사적 진실을 묵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인문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특히 작년 개인전에서는 ‘제주바다’의 생명력을 격정적으로 재현해 내는 회화적 실험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용주는 자연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대상이 내포하는 의미와 본질을 구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형태는 사실에 입각하지만 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를 차용하여 자유롭게 선과 색으로 표현한다.  

이번 제11회 김용주展에서는 제주의 자연(다랑쉬오름, 성산포의 아침, 종달리와 행원리의 철새, 자구리 해안, 세화리 바다, 비자림과 한동리의 나무 등)을 다루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뒤엉키 것처럼 나무들도 바람소리에 맞추어 몸짓을 하며 움직인다. 작가에게 바람이란 이렇게 정신없이 불어대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바람을 통해 코로 호흡하듯이 제주 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작품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림이 태어나는 곳, 이것이 작가가 생각하고 표현한 ‘바람 생기는 데’이다.

 □ 작가 노트

나의 살던 고향은 제주시 무근성 ‘버랭이깍’으로 바다에 이웃한 동네이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칼바람이 불어와 걷기조차 힘든 동네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칼바람을 한차례 후려 맞으면 정신이 확 깨어나고 전투태세를 갖춘다. 바닥을 향해 최대한 허리를 굽히고 옷깃을 올린 채 눈은 방향만 볼 수 있게 좁은 눈으로 바닥을 보면서 방향만 가늠하면서 종종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싸락눈까지 오는 날이면 온몸에 매를 맞으면서 뛰어야 했다. 싸락눈 바람이 이쪽으로 우루루 몰려오다가 벽을 치더니 저리로 우루루 달려가던 광경이 떠오른다. 양볼은 벌겋게 상기되고 혹시나 장갑이 없는 날이면 도톰한 손등도 케어서(거칠게 얼은 모양)  어린 입에서도 욕이 나온다. “ 아이고 못살켜, 제주도는 보름 때문에 꽝이여.”

30세에 서울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겨울이면 살포시 내려오는 함박눈을 보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노래가 저절로 나오더라. 서울은 고요하구나. 고요하게 얼어가는구나. 서울에 감격하면서 부드러운 서울에 적응하느라 거친 몸과 마음을 애써 감싸며 부드러운 ‘서울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원했다.

부드러운 서울 사람(육지 사람)으로 28년을 살았는데 나이 60 앞에서 애써 감싸 두었던 거친 바람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더니 몸과 마음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28년간 정을 두고 살았던 육지 살림을 정리하고 거친 바람의 땅, 제주도로 돌아왔다. 주변 사람들, 육지 사람들은 갑자기 떠난다고 놀라워하고 제주 사람들은 갑자기 와서 놀랐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온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 못했고 바람 따라 돌아다녔다. 바닷가에서 바람이 오면 양팔을 활짝 펴고 바람을 맞는다. “내 가슴으로 들어와라, 바람아, 내게로 와다오. 나를 채워다오.” 

그림을 그리면 손이 바람처럼 움직인다. 파도가 되어 거칠게 몰아치다가 잔잔한 바다 위를 피아노 건반처럼 두드리며 지나간다. 캔버스 위에 물감이 발라지는 순간 손과 바닥 사이에 바람이 인다. 붓끝에서 바람이 인다. 바람은 움직임이구나. 손끝에 이는 바람이 있어서 캔버스가 채워지고 그림이 되어가는구나. 나도 바람을 일으키는구나. 나도 바람인거야?

이진경 작가가 내 작업실에 이름을 써 주었다.
‘바람 생기는 데’
이진경 작가는 바람을 알고 있었을까?
작업실이 바람이 생기는 곳이라는걸.

그림이 태어나는 곳
바람 생기는 데

생명이 창조되는 곳
바람 생기는 데

2022년 3월
한동리 작업실에서 김용주

□ 평론

그가 제주로 내려간 이후 한동안을 못보고 지냈다. 정년을 앞두고 몸과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아 있던 나에게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개인전 서문을 내가 썼으면 한단다. 글보다도 그를 만나러가는 제주행이 나를 들뜨게 했다. 성산 일출봉이 바라다 보이는 종달리 해변에서 잔을 기울였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 검은 현무암 돌덩이들을 해변에 뿌려 놓은 것 같다고 했다. 그 사이사이로 서있거나 드물게 얼레 짓을 하는 무수한 갈매기들이 하얀 물감으로 그어 놓은 붓질 같다고도 했다. 해가 서서히 내려앉고 하늘빛이 더욱 깊고 푸른 기운을 띨 즈음 명멸하는 잔물결이 바다의 모든 것을 삼키며 홀로 빛을 내다 사라지곤 했다. 검게 뭉뚱그려진 방파제와 돌섬들은 이제 그 어떤 형상이 아니라 묵직한 한 획의 먹 자국으로 남는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저거야. 저것들은 물결이고 돌덩이이고 갈매기이지만 결국은 한 획이야.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몸짓이야. 나이가 들어가며 우리는 조금씩 체념이라는 것을 하며 산다. 그런데 우리가 무심코 이해하고 있는 체념이라는 의미,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뜻은 본래의 의미가 아니다. 옥편에서 ‘체諦’는 ‘깨닫다’ ‘살피다’ ‘비로소 나를 알다’ 등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래서 체념한다는 것은 기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욕망 따위들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포기한 듯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비로소 깨닫고 내려놓는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규정하고, 부풀리고, 편집된 세상과 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그의 작품은 어쩌면 체념의 길에서 부득이 남겨진 깨달음의 흔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1986년 1회로부터 1995년 5회 개인전으로 이어지는 김용주의 젊은 시절 작업은 대체로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굵고 빠른 선들이 큰 화면을 소용돌이치듯 누빈다. 아크릴은 그때나 지금이나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재료이다. 김용주는 즉흥적인 재료의 뒤엉킴과 우연성을 좋아한다. 마치 초서체 글씨를 쓰는 듯 순간의 호흡으로 매질의 자연적 특성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획을 긋는다. 번지고 흐르는 자유로운 맛을 표현하기에 아크릴은 그의 체질에 맞다. 그렇게 매질과 화면이 뒤엉키는 선긋기 놀이의 어느 순간 어떤 형상이 그것인 듯 아닌 듯 모습을 드러낸다. 숲과 나무는 그렇게 해서 드러난 주된 형상이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숲과 나무는 그의 내면 어딘가를 아주 크게 차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김용주의 숲과 나무의 표현 방식은 인상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그냥 풍경화라고 말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바깥세계가 드러내 주는 시각적 인상에 머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꿈꾸는 나무>, <불길한 나무들>, <환호하는 숲> 등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순간의 기억과 내면의 감성이 작품의 저변을 지배하고 있다. 기억의 소환을 위해 표현주의적 즉흥성이 요구되었다고 할까. 아니면 자유로운 몸짓을 통해 기억이 소환되었다고 할까. 기실 이 둘은 하나이다. 자연은 바깥에 있는 대상만이 아니다. 나의 감성과 자유로운 몸짓 또한 내 안의 자연이다. 그래서 김용주가 그린 나무는 그곳에 엄연히 존재하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내 안의 나무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형상이기도 하다.

제주로 내려 온 이후 김용주의 작품들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젊은 시절보다 더 구체화된다. 유년의 기억, 의인화된 숲과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드러난 숲에서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제주의 강한 바람은 일정한 방향도 없이 나무를 흔들어 대고 춤을 추게 한다. 먼 길을 에둘러 다시 찾아온 제주의 자연은 마치 처음 보는 듯 과거의 자연과는 다르게 느껴진다고 했다.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야 보이는 듯하다. 세월 때문일까. 본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일방적인 시선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연은 언제나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스스로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 왔다. 이제 비로소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이 많이 편안해 졌을 것이다. 고향에는 여전히 바람이 분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는 수많은 개인사가 담겨있다. 그는 나에게 제주에 불어오는 소남풍(小男風)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다. 음력 2월 영등 할망이 몰고 오는 서북계절풍 ‘영등바람’은 한 방향에서만 불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정신없이 불어댄단다. 옛날에는 이런 바람을 어린 소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에 빗대어 ‘소남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도 소남풍이 분다. 방향도 없이, 쉼 없이 불어대는 소남풍은 나무와 숲에 변덕스런 숨을 내뿜는다. 그는 거친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춤추듯 붓질을 한다. 몸의 리듬과 호흡이 제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다소 거칠거나 불완전해 보이는 표현은 감수해야 한다. 바깥의 자연과 내 안의 자연에 몸을 맡기는 것만이 단지 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작품과 달리 김용주는 정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언성이 높거나 행동이 급하지도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와 작품은 아이러니 하게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표현은 감성의 솔직함에서 나온다. 나를 주장하고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내 안의 자연에 성실하게 화답하는 솔직함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을 거스르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경서(미술평론가) 

□ 평론

제주바다는 늘 요동한다. 제주의 환경이 바다를 평온하도록 내버려두질 않는다. 여기에 의지해서 제주인들은 고기를 잡고 물질을 하며 삶을 지탱해왔다. 김용주는 어린시절부터 이런 제주바다를 보고 자라왔을 것이다. 잠시 평온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요동치는 바다는 스스로 생명이면서 또한 수많은 생명을 포괄하는 삶의 거처이다. 작가는 “제주바다를 바라보면 누군가 검은 현무암 덩어리를 해변에 뿌려놓은 것 같다. 그 사이사이로 서 있거나 드물게 얼레짓을 하는 무수한 갈매기들이 하얀 물감으로 그어놓은 붓질 같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것들은 “물결이고 돌덩이이고 갈매기이지만 결국은 한 획이라며 언젠가는 살아져버릴 몸짓”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작가는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그 하나는 표현의 대상으로 제주바다가 지닌 매력요인이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짝이는 물결이나 거친 파도, 그리고 바위 사이로 휘감아 도는 물길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헛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소위 ‘윤슬’ 현상에서 작가는 바니타스(vanitas) 개념을 떠올린다. 작가는 이를 단순히 ‘헛된 것’이라는 고전적 개념보다는 ‘고정된 형태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유동’하는 것이므로 “그곳에 이런 형태가 있었다”는 확대된 공간개념으로 대상을 해석하고 있다. 이는 형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대상을 해석하게 하고 보다 차원 높은 조형개념을 도출시킨다. 

약 한 세기 전 대상의 재현이라는 전통적 회화관의 해체는 ‘색채의 해방’과 ‘형태의 해체’라는 양방향으로 전개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20세기를 추상회화의 시대로 이끈 중요한 사건이다. 김용주는 여기에 규정된 관념마저 해체함으로써 회화를 자유롭게 해방시키고 자신도 이에 편승하여 표현적 자유와 회화적 실험을 즐기고 있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방법론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모든 재현 이미지는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의미가 확대·재생산되는 시뮬라크르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가 형태라는 것은 잠시 “그곳에 있었던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상함’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자연체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재현 이미지는 현상적 존재자가 아니라 그 현상적 존재자와 이어져 있는 배후의 어떤 체계, 여러 가지 표현 요소들을 지니는 역동적 체계”라고 말한 들뢰즈(Deleuze)의 언명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그의 바다그림에서 보이는 생동적 체계, 힘들의 관계, 시간 간의 관계로써 존재하는 흑백 이미지는 현재적(actual)이지 않고 현상적으로 존재하지만, 현재적인 것만큼이나 실제적인 실재(existence)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김용주가 말한 바다 개념의 축약적 내용이다.

형태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그의 바다그림은 건강한 활력을 보이며 왕성한 생명성을 보이는 격정적인 화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세화리에서>, <평대리에서>, <사라짐>과 같은 작품들은 굳건한 바위와 조우하는 물결, 하늘과 바다가 분리되지 않은 일체감, 강박적으로 기교를 멀리하고자 하는 태도, 강한 명암대비를 통해 주제를 부각시키는 방식 등 김용주 회화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무엇을 그리려고 했다기보다는 붓의 간섭을 가능한 배제하고 물감 스스로 추동하여 활력을 보이도록 배려한 작가의 태도에서 우리는 모더니즘 시대 전능한 작가의 모습보다는 현상에 순응하는 동시대 장인의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도했던 안 했던 간에 회화적 기교를 그의 화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대한 횡폭으로 우리를 압도하는 <성산포의 아침>이나 <종달리의 아침>에서 그가 붓과 도구를 사용하여 “해변에 뿌려진” 현무암 덩어리와 “하얀 물감으로 그어 놓은” 물새들의 표현은 ‘대단한 기교’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서술한 단어를 찾기 쉽지 않다. 무기교의 극치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성산포의 아침>에서는 우리를 진정한 회화성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게 한다. 최소한의 형태와 색채로 작가는 동시대 회화의 진정한 가치를 모색하고 이를 실험적으로 구현해 낸 것이다. 이처럼 형태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서투름’을 들어내면서 그는 무한한 표현적 가능성과 자유를 얻었다. 그의 매력적인 바다그림은 점, 선, 획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산물임에 틀림없지만 이의 기저에는 형태의 구속에서 붓을 자유롭게 방임함으로써 예기치 않게 얻어진 것들이 많다. 그리고 살아있는 제주바다는 이러한 그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이경모 미술평론가(예술학박사)  

오형석 기자 yonsei68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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