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가치 재정립해 새로운 모델 제시

▲ 이대범 단장은 “인문학은 연구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는 경우가 많지만 주체와 대상이 분리된 학문은 생명력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서 외부와의 관계에서 인문학의 실용적 요소를 소홀히 여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문치료’ 연구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 2007년 11월부터다. 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인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인문학 진흥을 위한 인문한국사업(HK)’ 일환으로 시작된 연구 주제 ‘인문치료’.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이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HK인문치료사업단(단장 이대범 교수)이 출범한지는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단은 그동안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들을 거두었다. 전국 규모의 학술대회를 세 차례 개최해 인문치료학 정립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지난 8월21일에는 인간의 건강과 질병 그리고 치료에 그간 커다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온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 치료사들이 모여 ‘한국인문치료학회’(회장 김남국 교수)를 결성했다. 사업단은 현재 문학치료, 철학치료, 언어치료, 예술치료, 치료사 등 5개 분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HK교수 5명, HK연구교수 8명, 공동연구원 15명 등 총 28명의 연구진과 17명의 보조연구원이 연구와 임상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인문치료, 국제적 관심 연구주제로 부상
인문치료학은 간단히 말하면 ‘인문학적 가치와 방법을 통해 현대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정서적 안정, 올곧은 가치관과 세계관의 정립을 돕는, 일종의 지속가능한 삶의 행복학’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소 인문한국 사업단이 추진하고 있는 인문치료 학술총서 제1권에서는 인문치료 활동을 “육체적·정신적 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거나 혹은 그런 고통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인문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자아통찰과 인식론적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정서적·정신적 건강을 확보하는 통합적 병인 극복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 인문학을 통해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제시해주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인문학교.
인문치료는 전통 인문학에서 활용해 오고 있는 읽기·쓰기·말하기와 더불어 음악·영화·연극·미술 등 표현 기술적 기법들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통합적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흔히 음악치료에는 음악이, 미술치료에는 미술이 도구로 사용되지만 인문치료는 인문학을 기본적인 매체로 하여 그 외의 모든 것들을 탄력적으로 모두 포함한다. 또 하나의 특징을 꼽자면 인문치료의 치료 대상은 사람 그 자체라는 것. 사람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사고, 역사적 인식, 문학적 상상력 등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그가 처한 환경과 더불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인문치료다. 때문에 인문치료는 심리치료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처음 출발할 때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고 회상하는 이대범 단장(강원대 국어국문학교 교수)은 ‘인문치료’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해 발생한 에피소드들도 많다고 술회한다. 하지만 2년 만에 인문치료는 국내는 물론 유럽이나 미주에서까지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연구주제가 되었다.
실제로 사업단이 지난 9월18일∼19일 강원대에서 ‘현대사회에서의 인문학과 치료’라는 주제로 개최한 세계 최초 인문치료 국제학술대회에는 미국, 프랑스, 스위스, 캐나다, 벨기에, 일본, 중국 등 8개국 총 28명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하여 인문치료학이 국제적인 관심 대상으로 부상되고 있음을 증명했다. 발표자로는 철학치료의 창시자라 불리는 뉴욕시립대 루 메리노프 교수를 비롯한 프랑스 예술치료의 이론적 토대를 확립한 유럽산업대 리샤르 포레스티에 교수, 인문학적 가치를 청소년 범죄의 이해와 대책 마련에 접목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프랑스어권 국제범죄학회 회장 스위스 프리부르그대학 니콜라 켈로즈 교수, 전미문학치료학회 회장을 역임한 캐슬린 아담스, 세계적인 신화학자인 중국 사회과학원의 엽서헌 교수 등 각 분야의 명망 높은 교수들이 참여했다. 언어학의 거장 노암 촘스키도 대회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일정상 참석하지는 못했다. 한편, 사업단은 국제학술대회가 끝나고 미국철학상담가협회(회장 루 메리노프)와 MOU를 체결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인문치료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강원도춘천교육청 후원, 인문학교 운영
사업단은 생활 현장에서도 연구 활동을 펼친다. 사업단 연구진은 군부대, 초중고, 교도소, 도서관, 법무보호복지공단 등에서 군 장병, 농산어촌 및 저소득층 학생, 재소자 및 출소자, 새터민 등을 대상으로 직접 인문치료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주부, 직장인, 다문화 가족 등 다양한 대상에게 인문학을 통해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제시해주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인문학교. 사업단의 인문학교 사업은 2008년 강릉 평생학습도시추진단 후원으로 강릉 성덕반딧불 도서관에서 ‘저소득층 가정 자녀들을 위한 어린이 인문학교’를 운영하여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현재 강릉중학교까지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진행하고 있으며 금년에는 강원도춘천교육청의 지원으로 춘천 가산초등학교, 강서중학교, 광판중학교 등에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그 반응이 무척 뜨겁다.
또한 사업단은 한국법무보호공단 강원도지부에서 출소자들을 대상으로 ‘인문치료 실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출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출소자들이 새로운 삶을 건설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밖에도 육군 21보병사단과 MOU를 체결하여 장병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청정교육 프로그램을 매월 1회 5일간 실시하고 있으며, 원주교도소에서는 매월 1회씩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전개한다. 사업단은 새터민들과 다문화 가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9월22일, 23일 양일간에는 새터민들의 안정적인 정착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새터민을 위한 인문치료, 행복의 의미 찾기를 위한 행복프로젝트’를 진행하여 큰 호응을 받았으며, 강원도 내 다문화 가족을 위해서는 교재개발, 다문화 강사단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 지난 9월18일∼19일 개최한 세계 최초 인문치료 국제학술대회에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하여 인문치료학이 국제적인 관심 대상으로 부상되고 있음을 증명했다.
‘인문학이 있어 모두가 행복한 세상’
현재 전국 각 대학의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고초를 겪고 있다. 사업단이 탄생하게 된 것도 위기가 거론되는 인문학의 실질적인 가치를 재정립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다. “인문학은 연구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는 경우가 많지만 주체와 대상이 분리된 학문은 생명력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 단장은 외부와의 관계에서 인문학의 실용적 요소를 소홀히 여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문학은 엄연히 사회현상의 변화에 따라 부침이 수반되는 수요와 공급의 산물이며, 이에 인문학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요구들을 수용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전하는 이 단장은 인문치료야말로 이런 문제의식을 공감하는 강원대학교의 의미 있는 도전이라며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이 도전이 성공한다면 우리 대학의 인문학 관련 학과들은 인문학의 위기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업단은 앞으로 ‘인문학이 있어 가치 있는 세상, 인문학이 있어 고양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세상, 인문학이 있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구 활동과 실천 활동을 병행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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