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런던의 템스강변에 있는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 한해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이곳은 10년도 안 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영 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등과 함께 영국 최고의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숨은 사연이 이채롭다. 지금의 이 멋진 미술관이 과거에는 잿빛 벽돌에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던 화력 발전소였다는 것. 공간에 얽힌 역설적인 스토리가 오히려 지금의 테이트모던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런던‘테이트모던’미술관 전경(좌), 철도역사를 재활용한 파리‘오르세 미술관 내부(우)

#.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이 미술관에 들어서면 정면 상단에 커다라 원형시계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곳이 예전 철도역이었음을 나타내주는 징표다.

지난 1986년 개관한 이 미술관은 원래 1900년 만국 박람회 개최를 위해 오를레앙 철도가 건설한 철도역이었다. 폐쇄된 기차역이 아니라 평범한 장소에 세워졌더라면 지금처럼 화젯거리가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세계 곳곳에 불고 있는 ‘재활용’ 바람

이처럼 문화예술계에서 ‘재활용’이 가져다주는 부가가치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 사례만 해도 이미 세계 도처에 널려있다.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화력발전소 ‘테이트모던’과 함께 영국에는 제분소를 재활용한 ‘발틱 현대미술관’도 있다. 폐광산을 재활용한 독일의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설탕공장을 재활용한 이탈리아 파르마의 ‘파가니니 음악당’도 대표적인 재활용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베이징의 ‘따산즈 798예술특구’는 군수공장이 아티스트들의 작업공간 겸 갤러리로 탈바꿈한 사례다. 일본의 경우, 항만이전적지를 수변복합지구로 재활용한 일본 기타큐슈의 ‘모지항 레트로지구’, 삿포로 맥주공장을 재활용한 ‘삿포로팩토리’가 대표적이다.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쾌거들이다. 이들은 모두 낡음과 새로움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과 문화의 요소를 더했을 때 도시 경쟁력과 이미지가 바뀔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왜 버리지 않을까? 왜 새로 만들지 않을까?

인구의 유입이 많고, 가용 토지는 부족한 대도시권에서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 땅을 확보하고, 건물을 새로 짓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다. 세계 어느 도시든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선진도시들이 환경의 가치에 눈 뜨게 되면서 오염의 근원지이자, 도시 이미지 저하의 원인이 되고 있는 과거 산업시설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영국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기획한 ‘존 메이저’ 수상 역시 오랜 기간 방치되었던 템스강 남부의 재활성화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 당시로서는 버려졌던 화력발전소 건물을 미술관으로 재활용한다는 발상부터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에 그 공간이 가진 과거의 스토리가 더해졌으니 그 경쟁력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강동진 교수는 재활용되거나 남아 있는 산업유산들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은 지난 6년간 약 1조5천억 원에 이르는 경제 효과를 창출해냈다.

그는 “산업유산은 해당 도시의 사람들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했던 터전이며, 이 시설들로 인해 오늘날의 자신이 존재하고 잇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며, 때문에 “산업유산은 단순한 문화시설도, 교육체험시설도 아닌 모두가 지나온 삶의 진정성이 강하게 스며있는 생활유산”이라고 강조했다.

더욱이 공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은 ‘자원 재활용’이라는 시대의 흐름과도 부합하면서 지역의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스페인의 쇠락해가던 광산도시 ‘빌바오’는 멋지게 디자인 된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만으로 도시 전체가 먹고사는 문화도시로 탈바꿈했다.

■ ‘옛 서울역사’, ‘당인리 발전소의’ 변신

국내에서도 2000년 정수장 건축물을 재활용한 ‘선유도 생태공원’의 성공 사례를 비롯해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작업공간으로 변모한 서울 문래동 공장지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되는 옛 서울역, 이전되는 당인리 발전소의 문화공간 재활용 등의 사례들이 차츰 문화공간으로서의 변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동 통폐합으로 잉여공간이 될 뻔한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사무소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이뤄지는 홍대의 특색을 살려 ‘서교예술실험센터’로 변모했다. 동사무소로 설계됐던 공간을 없애는 대신 기존의 구조와 인테리어 등을 살려 공방과 극장, 갤러리 등으로 재활용한 것.

1925년 일본인의 설계로 준공된 뒤 경성역이라 불리다 광복 이듬해부터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뀐 옛 서울역사. 2004년 KTX 신 역사 준공 뒤 그 기능을 접어야만 했다. 사적 제284호로도 지정됐지만, 한때 노숙인들이 진을 치고 있어 음산한 모습까지 연출했던 이곳은 앞으로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같은 문화공간의 역할을 맡게 된다.

▲ 복합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할 옛 서울역사의 1층(왼쪽), 2층(오른쪽) 예상도

마포구 당인동 한강변에 위치한 ‘당인리 발전소’. 1930년 국내 최초 화력발전소로 지어진 이곳은 오랜 기간 서울의 전기 공급원의 역할의 해왔지만, 분진과 대기오염의 진원지라는 오명도 늘 함께 따라다녔다. 더욱이 위치상 한강을 끼고 있어 가뜩이나 회색빛 아파트와 도로로 둘러싸인 한강변을 더욱 삭막하게 만드는 주범이 돼왔다. 그랬던 이곳이 ‘테이트모던’의 영광을 재현할 문화발전소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다.

하수종말처리장과 취수장 등 강변의 폐시설도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강변의 폐시설과 강변마을 공가, 폐교 등 유휴공간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조성하기로 한 것. 산업시설의 부지와 구조물을 그대로 남기면서 그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재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밖에도 2012년까지 지역의 폐교, 간이역 등의 유휴시설 45곳을 문화공간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 도심의 폐허에서 찾아낸 문화경쟁력

10월 셋째 주 토요일은 ‘문화의 날’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역문화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지난 2003년부터 매년 지역도시를 순회해가며 개최하고 있는 문화의 날 행사는 올해는 인천에서 개최된다.

정부가 올해 기념식을 인천에서 열기로 한 데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인천은 지난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근대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곳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부두창고와 무역·해운업체들의 사옥들도 잇따라 들어섰다. 그러나 인천항 배후의 구도심이 쇠퇴하면서 근대 건축물들도 흉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창고 건물들이 지금은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대 건축물들을 시가 매입해 리모델링한 후 전시장과 공연장, 아카이브와 창작 스튜디오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시는 ‘박물관 확충’, ‘개항장 역사문화자원 스토리텔링사업’ 등 개항장 일대를 문화 지구로 조성하는 사업도 함께 펴나가고 있다.

이런 사업들은 단순히 공간을 재활용하고, 문화시설을 늘리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설들이 토대가 돼 우리 문화가 꽃을 피우고, 그것이 과거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던 개항 도시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이제 반대로 우리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발신지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발상의 전환이 가져다준 문화경쟁력, 이제 도심의 폐허 속에서도 우리는 문화의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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