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형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생명의 전화 자살예방센터(02-763-9193~5)에는 하루 종일 상담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SOS를 치는 곳이다. 끝없는 전화벨 소리는 ‘45분에 1명꼴로 자살한다’는 통계 수치를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3년째 상담활동을 하고 있는 한관계자는 “평소에도 상담건수가 많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자살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날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상담이 폭증한다”며 “저렇게 잘나가던 사람도 죽음을 택하는데 나같은 사람이 살아서 뭐하겠는냐는 하소연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만연된 자살풍조로의 예방을 위해서 그 실태와 유형을 재조명해 본다.

45분에 1명꼴 자살...명예 실추나 외모, 왕따, 무력감 자살 늘어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자살 건수는 1만 3,000건에 달한다. 5분만에 1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5분만에 1명이 목숨을 잃는 셈이다. 지난 94년에 7,000여건 인점을 감안하면 10년만에 두배나 증가했다.
이런 표면적인 통계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살 동기의 변화 추세다. 실제 상담센터에 걸려오는 전화내용 중 상당수는 상담원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허탈한’ 이유로 자살충동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 중에는 ‘엄마가 핸드폰을 안사줘서’ ‘다이어트를 하는데 살이 안빠져서’ 죽고 싶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카드빚이나 가족 붕괴, 절박한 경제적 압박 등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지만 최근에는 명예실추나 외모, 왕따, 삶에 대한 무력감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사회지도층의 연이은 자살도 이런 추세와 무관치 않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투신자살과 구치소에서 목매 숨진 안상영 부산시장, 한강에 투신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지난달 29일 한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박태영 전남지사 의 경우에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한 경우다. 또 김인곤 광주대 이사장은 삶에 대한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3월 초 허공에 몸을 던졌다.

자살 유형의 변천사

자살 유형은 시대에 따라 변천해왔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인이 선택하는 가장 쉽고도 일반적인 자살 유형은 익사(溺死)였다. ‘사의 찬미’를 노래한 가수 윤심덕(1897~1926)이 기혼자 애인(김우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 동반자살을 선택한 장소는 현해탄이었다.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동경음악대학에 유학, 성악을 공부하다 한국 유학생들이 결성한 극예술협회 중심 인물인 김우진을 만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귀국한 뒤 다시 일본으로 사랑의 도피를 벌인다. 1926년 일본에서 관부연락선 덕수환 편으로 귀국하던 윤심덕은 김우진과 현해탄 검푸른 파도에 몸을 던진다. 유부남을 사랑한 신여성 윤심덕은 구시대의 도덕과 가치관 속에 갈등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자살은 남성중심 사회에 의해 주로 여성에게 요구되었다. 가문의 명예와 절개 같은 도덕적 규범을 지키는 수단으로 여성에게 자결을 요구한 게 조선이었다. 형식은 자살이지만 내용면에서는 반(半)타살이었다. 정묘호란(1626)을 겪은 조선의 국가지도부는 재발 방비책을 세우는 대신 정묘호란 때 절개를 지키다 죽은 부녀자들을 칭송하는 데 열을 올린다.
조선 사회는 부녀자들이 이렇게 목숨을 바치면 마을 입구에 ‘열녀문(烈女門)’을 세워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곤 했다. 열녀문은 “여자는 일부종사(一夫從事)하고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는 의식화 교육의 상징물이었다.
반면 남성 사회에서는 자살은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 인조를 비롯한 국가지도부는 남한산성으로 피해 성 안에 갇힌 채 대청(對淸) 투쟁을 벌이다 40여일 만에 인조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항복 선언을 하면서 끝이 난다. 당시 대신들 사이에는 ‘차라리 항복할 바에야 자결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으나 국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선비가 적의 칼에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자결을 할 수 있느냐”고 반대, 결국 항복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일본 사회의 ‘자살 의식’은 유명하다. 봉건시대 이후 무사(武士)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칼로 배를 가르는 할복 자살(하라끼리)이 유행했다. 그러나 할복 자살은 에도 시대 이후 사형방법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현대 일본에서 할복 자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1970년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은 극히 예외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명성황후의 조카로 구한말 고위직을 지낸 민영환(閔泳煥)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망국의 슬픔을 자결로 마무리한다. 민영환은 가족들을 만난 뒤 자택에서 칼로 배를 찔러 자살한다. 민영환의 자살 방법은 한국인의 자살사(史)에서 매우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1896년 단발령이 발효되었을 때도 남자들은 단발을 거부하며 저항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배를 가른다든지 동맥을 끊는 등의 방법을 쓰지는 않았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네로 황제로부터 역모(逆謀)를 받자 65년 스스로 손목 혈관을 끊고 자살을 한다. 조선시대 이래 한국인이 자살을 선택하면서 할복 자살과 같은 육체를 훼손하는 방법을 피한 것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머리를 자르는 일(단발령)에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이 극렬하게 저항한 까닭 역시 신체는 부모로부터 받았기에 비록 머리카락조차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작용했다. 조선의 여성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물에 뛰어드는 자살을 택한 것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서양에서 동맥을 끊거나 총기 자살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신체 훼손에 대한 인식이 한국인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동반자살은 한국에만 있다
1970년 청계천 피복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자살, 1980년대 초 대학생들이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에 대항해 보여준 잇단 분신은 자살 방법과 동기에서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일본과는 달리 사회적 명분이나 정의 실현보다는 개인적인 이유가 자살 동기의 대부분을 차지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족 동반자살은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현상이다. 인천 네 가족 동반자살에 이어 7월 31일에도 울산에서 흡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의 주식 실패로 야기된 생활고를 비관한 30대 여성이 남매를 먼저 살해하고 자신은 아파트 13층에서 뛰어내렸다.
동반자살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모자(母子) 동반자살이 부자(父子) 동반자살보다 그 빈도수가 훨씬 많다는 점. 어머니의 자식 집착이 아버지의 그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증거이다.
자살 동기에서도 한국적인 현상이 있다. 7월 31일 서울 강서구에서 여고생 2명이 신축공사 중인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한 여학생은 성적 부진을 고민하다 목숨을 끊었고 다른 여학생은 70여일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임신 5주째인 것을 알고 혼자 고민하다 투신을 결심했다.
2002년 자살자 1만 3,055명 중 11~20세 자살자 405명의 자살 동기를 분석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비관 자살’이 163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 중 대부분은 성적 부진을 비관한 자살이었다. 서구의 경우 청소년 성관계가 우리보다 훨씬 자유롭지만 여학생이 임신을 했다고 해서 자포자기 끝에 목숨을 끊는 예는 거의 없다. 사회와 가정에서 미혼모를 손가락질하거나 백안시하지도 않는다. 또 공부를 못한다고 자살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심지어 성형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고민하다 목숨을 끊는 사건도 일어난다. 이러한 자살 동기는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청소년들에게 일방적 가치관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준다.

외도로 인한 자살 급증 추세

자살자를 대상으로 경찰청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자살 동기는 비관·병고·가정불화·부정 순이었다. 생활고, 부채, 카드빚 등은 ‘비관’ 항목에 포함된다. ‘비관과 병고’가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동기는 ‘부정’이다. 1998년 ‘배우자 부정’으로 인한 자살이 411명이던 것이 2001년에는 805명, 2002년에는 1,040명으로 늘었다. 이는 우리나라 가정에 외도(外道)가 얼마나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혼자의 외도가 이혼을 넘어서 어느 일방의 자살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일제 식민지 36년과 전란(戰亂)과 보릿고개를 넘어온 지난 시대에 자살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드문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한국인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빈궁했지만 자살 사건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천재 작가 전혜린(1934~1965)이 1965년 자살했을 때도 자살이라는 문제는 식자층에서만 거론되었고 보통 사람들 사이에 자살은 사치스러운 ‘문명병’쯤으로 간주되었다. 2003년을 사는 우리들은 1950~1960년대보다 살기가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자살 건수는 그 어려운 시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늘고 있다.

사회적 예방시스템 필요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자살징후를 드러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장 이홍식 교수는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보통 주위와 접촉을 끊고 우울해지며 말수나 식욕이 줄어들거나, 주위 사람에게 자살 고백을 하거나 갑자기 여행을 떠나거나 성직자를 찾는 경우가 많다”며 “이럴 경우 고민을 깊이 들어 준다든지 전문의와의 상담을 유도하는 등의 관심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안전망 확충이다. 실업이나 카드빚, 사고 등으로 좌절을 겪을 때, 이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지면 극단의 선택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증가하는 ‘명예 자살’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투명성 강화가 관건이라는 지적이 많다. 고위인사들이 비리에 연루되기 전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관계자는 “이런 측면에서 검찰은 연이은 자살에도 위축되지 말고 발본색원한다는 자세로 비리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자살예방센터 하성훈 원장은 “자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듯한 언론보도 및 사회적인 분위기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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