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등 사회적·정치적 급변상황에 대응해 체계화

전 세계는 다양한 형태의 자연재난, 학살, 전쟁, 질병, 사고, 사회 부적응자, 우울증, 정신질환자, 이혼, 가정폭력, 아동학대, 파산, 가족의 죽음 등 무수한 희생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희생자들이 생겨나는 한 외상후 스트레스(PTSD)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생각과 의식의 변화를 통해 피해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 필자는 본지를 통해 최소한의 우리가 알아야 할 트라우마 역사의 접근과 원리, 상담방법과 외상후 성장에 관한 내용을 풀어나갈 것이다.
 
 
▲ 김상철 서울소방재난본부 마포소방서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공공정책학과 졸업/ 現 한성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박사 과정
전쟁 중 열린 1916년 독일 정신건강 의학협회 총회에서 유사하게 병사들에게서 나타나는 불안과 탈진증세의 원인으로 ‘신경증’, ‘연약한의지’, ‘장애연금을 받기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등을 꼽았다(Lerner, 2003). 이러한 시각들과 외견상 일관되게도 군인 및 민간인들의 수많은 신경쇠약 의료사례가 전투 후에 발생되었을 뿐 아니라 가벼운 노출 또는 전혀 전투에 노출된 적이 없지만 탈진과 불안을 호소하는 성향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발견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 신경학자인 Hermann Oppenheim의 외상적 신경증에 대한 체계화를 제외하면, 만성적 외상후 스트레스에 대한 초기의 임상적 관찰결과는 내과적 인상이나 질병, (여성의) 히스테리나 꾀병을 원인으로 꼽았다.
 
Freud는 동료내과 의사인 Josef Breuer(안나와의 사례)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히스테리성 신경증의 치료에 관한 정신 분석학적 접근법을 생시켜나가기 시작했다. 이 환자는 신경증으로 고통 받던 젊은 여성으로 마비, 무감각증, 환각, 실어증, 해리성 배회상태(dissociative fugue states:환자가 목적이 있는 행동을 하지만 그것을 후에 의식적으로 상기하지 못하는 상태,徘徊症), 조울증 등의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Breuer가 그녀로 하여금 그 발병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재구성 하도록 도와주자 그러한 증상들이 진정 되었다. 그녀의 실제 이름은 버사파펜하임으로 후에 그녀는 저명한 사회복지사가 되었고, 그러한 치료법에 ‘말을 통한 치료법(talking cure)’ 또는 정신의 ‘굴뚝청소법(chimney sweeping)’이라는 창의적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 사례로부터 Breuer와 Freud는 1893년 신경증의 심리 이론인 <히스테리 현상의 심리적 기제에 대해(On the Psychical Mechanism of Hysterical Phenomena)>라는 논문을 출간했다. 곧이어 Freud는 신경증에 대해 “어린 시절의 외상적 경험을 처리하기 위한 방어적 시도들의 결과로 변경된 성격구조가 그 개인을 향후에 정신병에 취약하게 한다”고 설명하는 등 ‘정신신경증(psychoneuroses)’에 관한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했다(Davis, 1994, p. 492).
이후 10여 년 동안 Freud는 정신신경증에 관한 유혹이론(seduction theory)을 재구성해 실제 어린 시절 성적 외상에 노출되는 것보다는 선천적인 정신적 갈등의 병인적 역할을 더 강조하게 된다(Davis, 1994).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의사 Charles Myers는 병사들에게서 발생한 히스테리적 신경증을 ‘포탄충격(shell shock)’이라고 설명했다. 포탄의 폭발에 노출된 후 나타난 기억, 시각, 후각, 미각이 상실된 세 가지 사례에 기초해 Myers는 환자의 청력은 정상이었으나 다른 감각들과 기억은 잃어버리거나 왜곡되었다. 즉, 해리 복합(dissociated complex)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현대의 심리학적 그리고 신체형 해리에 대한 서술과 일관성을 가진다(Leys, 1994). 또 다른 영국의사 William Brown은 3,000명의 ‘포탄충격’ 환자들을 히스테리적 증상들이 전에 일어난 특정사건들을 상세하게 다시 말하게 하도록 권하는 Breuer와Freud의 접근법으로 치료했다.
그 후 영국심리학회에서 1920년에 발표된 논문 <감정적 기억의 재생과 그 치료적 가치(The revival of emotional memories and its therapeutic value)>에서 Brown은 비록 ‘환각적이지만 선명한 기억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자 기억상실증이 파괴되면서 환자의 마음이 재통합된 덕분에 환자의 증상들이 사라졌다(Leys, 1994, p. 625)’고 기술했다.
 
외상적 스트레스와 PTSD의 추가적인 개념화는 전쟁이나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급변상황에 대응해 체계화 되어왔다(Lasiuk and Hegadoren, 2006).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중과 그 이후 Abram Kardiner와 Herbert Spiegel 같은 군병원 정신건강 의학과 의사들은 ‘전쟁신경증(war neurosis)’, ‘전투스트레스반응(combat stress reaction)’, ‘전투피로증(combat fatigue)’ 등으로 표현하고, 위험으로부터의 일시적 퇴각과 휴식 그리고 전투부대와의 계속적이 연락을 유지할 것 등의 즉각적인 예방과 처치의 원칙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민권, 여권, 인권운동들이 강화되던 시기에는 정신건강전문가와 옹호자들은 ‘강간외상증후군(rape trauma syndrome)’과 ‘매 맞는 여성증후군(battered woman syndrome)’을 제시하면서 성적·가정적 폭력의 외상적 결과에 대해 묘사했다. 1970년대에는 귀향한 미국 병사들과 관련해 ‘베트남전후증후군’이 부각되었고, 이 증후군은 PTSD가 1980년에 하나의 진단범주로 참조되는데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Herman, 1992b).
인간이 인간을 스스럼없이 죽이고, 또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아야 하는 전쟁은 생존 본능의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만큼 가장 큰 스트레스 경험에 속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전쟁 기간, 더 나아가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도 엄청난 후유증을 낳습니다. 그것이 PTSD의 시발점이다.
 
외상후 스트레스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한 전사가 가지는 다치지 않았음에도 눈앞에 병사가 죽을 때마다 눈이 머는 증상을 보였다고 썼을 때부터 알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1700년대 도미니크 장 라레가 전쟁터의 부상자를 치료하면서 PRSD처럼 보이는 증상을 기록했는데, 처음에는 강한 흥분과 상상, 이어서 열감과 소화기 증상, 나중에는 좌절감과 우울 증상의 세 단계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이나 대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다치거나 죽는 병사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심리적 외상은 현실적으로 의사와 지휘관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병사가 훈련을 덜 받았거나 애국심이 적어서 생기는 개인적 나약함,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부리는 꾀병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문제가 소수의 부적격 병사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지루하고 긴 진지적 공방 속에서 꽤 많은 병사들이 충격, 놀람, 혼란함, 예민함, 악몽에 시달렸다.
포격으로 죽는 병사들을 가까이서 목격하거나 포탄소리로 인한 충격으로 발생한 문제로 보고 셸 쇼크(Shell shock)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부 군인들에게 나타난 전쟁신경증이다”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후방 캠프에서 며칠 쉬면 65% 정도가 회복하는 것을 보면 뇌가 손상 되었다기보다는 전쟁 자체가 주는 참혹함과 스트레스가 정서적인 혼돈을 주고, 극심한 공포 방응을 일으킨 것이다. 한편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도 아들들을 전장에 보냈고, 전쟁의 궁핍함과 끔찍함을 견뎌내면서 병사들의 심리적 고통을 목격했다. 그는 정신분석과 전쟁 신경증을 출판하면서 전쟁 신경증의 개념을 제안 했다. 그는 병사들의 증상을 마음 안의 전쟁 자아와 평화 자아 사이의 무의식적 갈등의 결과물로 해석했다. 이런 정신분석적 해석이 나올 정도로 PTSD는 의학적으로도 실제 전쟁 상황 측면에서도 주요 문제로 떠올랐지만 여전히 원래부터 심약한 병사들에게 생기는 문제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군의관과 군 지휘관들은 문제가 생길 병사를 입대 전에 걸러내기 위한 심리검사를 개발하는 데만 주력했다. 하지만 유사 증상을 호소하는 병사는 사라지지 않아 개인적 나약함보다는 환경적인 상황에 의해 발생하며 모든 병사에게 생길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때부터는 작전 지역 인근에 병사들을 위한 휴양지도 함께 건설했다. 전투 중의 심리적 피곤과 소진을 휴양지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복귀한 군의관들도 일반인들을 치료하면서 교통사고, 자연재해, 강간이나 강도와 같은 큰 스트레스로도 비슷한 증상이 발생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글_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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