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을 뛰어 넘는 차세대 리더전쟁 시작됐다
디지털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이 경쟁력
개혁과 진보, 보수까지 포용할 수 있는 리더그룹 약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지난4월 19일 서울 마포당사에서 17대 총선 당선자들을 만나 "패권 장수가 할 말이 뭐 있겠느냐"며 "오늘로 총재직을 그만두고 정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서 김 총재가 43년간의 정치인생을 마감함에 따라 그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상징되던 3김 시대도 한국 정치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제 3김이 비운 그 자리를 선점하려는 이른바 포스트 3金 자리싸움을 놓고 벌써 정가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3金 트로이카의 마지막 주자인 JP가 마침내 지난 17대 총선을 계기로 정계를 떠났다. ‘마지막 남은 3김(金)’이었던 그가 정계를 떠남으로써 김대중(DJ),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현대사를 풍미했던 3김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말을 빌려 “유권자는 사육사가 잠시 한 눈을 팔면 물어뜯는 맹수와 같다”고 말해온 그에게 17대 총선결과는 ‘사나운 맹수’ 그 자체였다.

트로이카 3金 주역 JP 퇴장
그러나 비록 떠날 때 상처를 입었지만 JP의 정치인생은 화려했다. 35세인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를 주도하며 정치 전면에 등장한 그는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권력의 2인자’에 올랐다. 1963년 6대 국회의원이 되면서 현 16대까지 9선을 기록한 선량(善良)의 첫 단추도 끼웠다. 그해 집권공화당의 당 의장까지 꿰차면서 잘나가던 그는 박 전 대통령과 혁명동기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을 떠난다.
1967년 7대 국회로 정계에 돌아와 4년 뒤 첫 국무총리로 다시 2인자로 컴백했다. 만 4년 6개월의 재상임기를 채운 JP는 10·26 직후 공화당 총재로서 드디어 절대권력에 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다시 시련을 안겨줬다. 신군부에 의해 부패정치인으로 낙인찍힌 JP는 낭인생활을 한 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대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1990년 3당 합당 주역이 됐지만 정권을 잡은 YS에게 그는 토끼사냥을 마친 뒤의 사냥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토사구팽을 당한 그에게는 영원한 우군(友軍) 충청권이 있었다. 핫바지론이 퍼지자 충청권은 JP를 중심으로 뭉쳤다. 1995년 3월 민자당을 뛰쳐나와 만든 자민련은 15대 총선(1996년)에서 50석을 얻었다. 이는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한 그에게 시작에 불과했다. 앞길에는 끊임없는 애정공세를 펴는 DJ가 있었다. 그는 내각제를 고리로 킹메이커가 됐고 1998년 ‘DJ 대통령, JP 총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속성이 있다. 2000년 내각제 개헌파기와 동시에 공동정부를 깨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충청권은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6대 총선(2000년)에서 의석수가 17석으로 줄어들며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당시 같은 충청권인 이인제 민주당 선대위원장으로부터 ‘지는 해’라는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후보를 내지 못하며 행정수도 이전을 내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자본을 크게 잠식당했고, 총선에서 재기를 노리던 그에게 탄핵역풍은 치명타를 안겼다. ‘지는 해’ 발언에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고 응수했던 JP는 내각제 관철이라는 평생의 꿈을 펴보지 못한 채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JP는 이번 17대 총선 참패가 너무나 아팠던 것 같다. 총선 후 사흘간 청구동 자택에 머물며 바깥과 대화를 끊었다. 2000년 자민련의 1차 참패 때도 측근들과의 의사소통 채널은 열어놓았던 JP다. K씨는 “몇몇 측근들이 청구동으로 장고(長考)에 들어간 JP를 찾아갔지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기사회생의 수를 찾는 것 아니냐”며 측근들이 웅성거리던 4월19일, 그는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오늘로 정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1961년 35살의 젊은 나이로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한 그의 퇴장은 생각보다 초라해 보였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했다. 그의 결단을 기다렸다는 듯 김대중(DJ),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JP의 손을 잡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김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권력무상을 상징하는 상흔만이 즐비했다.

국민은 변화를 선택했다

군부정권의 총칼 앞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였고 대통령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던 DJ, YS와 마지막 불꽃을 태워보려던 JP의 퇴진을 몰고 온 것은 17대 총선을 계기로 폭발한 변화와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이었다. JP의 마지막 시도는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3김 시대는 DJ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2003년 2월24일로 사실상 끝났다. 그러나 JP와 3김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3김의 ‘관’을 부여잡고 기득권을 연장하려 했다. 올 1월6일 DJ의 팔순잔치가 열린 서울 프라자호텔. 총선을 앞둔 민주당 인사들과 신당세력들이 경쟁적으로 DJ를 찾았다. 4월 초에는 민주당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수시로 동교동 담을 넘어 SOS를 날렸다. 상도동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청원, 최병렬 등 한나라당 전·현직 지도부는 물론 부산 출마를 앞둔 정치인들이 신년하례를 명분으로 상도동을 찾았다. 겉으로는 3김 종식을 외쳐온 정치인들이 속으로는 3김의 영향력에 안주하려는 몸짓을 보여준 ‘역겨운’ 정치현실이었다. 대통령직을 퇴임한 양김은 이런 정치권의 흐름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또 그 속에서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3김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3김은 갔지만 시대는 3김의 포로였다.
이런 현실 정치의 아이러니를 깨뜨린 것은 바로 17대 총선이었다. 메스를 들이댄 것은 변화를 갈구하던 유권자의 힘이었다. 민주당이 DJ의 아들 김홍일 의원을 통해 ‘김심’을 흉내냈고 추미애 의원이 햇볕정책 계승론을 내걸고 3보1배까지 했지만 광주는 과거와의 단절에 실패한 민주당을 처절할 정도로 짓밟았다. DJ 측근들로 동교동계의 핵심이었던 김옥두, 최재승, 정균환, 박상천 의원 등이 차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동교동계의 몰락은 광주가 DJ에게서 독립했음을 시사하는 듯했다.
출마한 차남 현철씨를 지원하기 위해 경남 거제를 찾은 YS도 달라진 세태에 낙담하며 빈손으로 귀경길에 올랐다. 그가 서울로 올라온 며칠 뒤 현철씨는 출마를 포기했다. 빛바랜 YS 깃발을 부여잡고 재기하려던 박종웅 의원도 부산시민한테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부산도 YS와 이별했다. 충청권을 압박했던 78살의 노정객 JP에 대한 충청권의 응징은 더욱 처절했다. 당지지율 2.8%로, JP의 입지를 근본부터 흔들었다. 그렇게 3김 시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변화와 개혁 17대 총선에서 만개
‘3김’은 현대 정치사의 모든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3김은 ‘한국적’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조선왕조와 외세침입, 일제 강점기,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의 역사 위에 3김은 정치적 상징과 조작으로 권위와 카리스마를 만들었다. 권력에 대한 집념과 의지, 이를 실천하는 과정은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장면들이다. 장·노년층 국민들 머릿속에는 3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존재한다.
3김은 카리스마의 정치인들이었다. 젊은 시절 선박회사를 운영했던 DJ는 유능한 전략, 전술가였다. 그는 냉철하고 조직적인 사고에 능했다. 반면 부잣집 아들 태생인 YS는 감성과 직관이 뛰어난 정치가였다. 돌파력도 탁월했다. ‘양김’은 한국 민주화 세력을 대표한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뒤따른다. 엘리트 군 출신인 JP는 유연한 실리주의자로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 그러나 정치적 결단과 돌파력이 부족했다. 늘 2인자였지만 산업화 세력이라는 평가는 JP의 정치 자산이다. 3김은 수시로 ‘경쟁과 협력’의 틀을 넘나들었다. 1971년 대선 출마를 놓고 DJ와 YS는 선의의 경쟁을 벌였고 막판 DJ의 대역전극은 한국 정치사의 ‘빅 이벤트’로 지금도 많은 국민들은 그때의 짜릿함을 기억한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도 주도권을 둘러싼 양김의 물밑 다툼은 이어졌다. 87년 대선 때는 JP까지 합세, 3김 경쟁을 폭발시켰다.
3김은 돈과 조직을 거머쥐었고, 공천권으로 정치를 주물렀다. 절대적 카리스마로 지역패권을 고착시켰다. 고질적인 지역감정과 계보, 패거리 정치는 바로 이런 정치공학의 부산물이다. 3김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었다. 그들의 카리스마에 저항하는 행위는 곧 정치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3김의 활동 폭과 권력욕이 커질수록 한국 정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일그러졌고 국민들의 절망감은 깊어갔다. 그런데도 대안은 그 3김이었고, 국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3당합당 승부수를 던진 YS가 집권에 성공한 것은 92년. 이를 역의 발판으로 이용해 DJ도 97년 승리를 거머쥐었다. 3김의 언저리에 서 있던 JP는 내각제 카드로 정치적 빅딜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김 누구도 내각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JP는 내각제 카드를 가슴에 앉은 채 쓸쓸하게 사라졌다.
DJ, YS 등 민주화세력의 집권은 보수세력 중심으로 이뤄졌던 한국정치의 주류를 민주화세력으로 교체하는 씨를 뿌렸다. 이때 뿌려진 씨는 2002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통해 꽃을 피웠고 이 꽃이 17대 총선을 맞아 변화와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으로 만개했다.

3金이후의 차세대 리더 ‘군웅할거’

이 시대정신은 의회권력과 리더십의 세대교체를 몰고 왔다.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30대 23명, 40대 106명 등으로 전후세대와 386세대의 원내 진출이 뚜렷하다. 30, 40대와 초선그룹이 의회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국정의 주도권이 과거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 세대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3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정치권에 새로운 질서를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벌써 정치권에서는 3김이 비운 자리를 선점하려는 군웅들의 할거가 열을 발산한고 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그 선두에 서 있고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와 김혁규 비례대표 당선자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외곽에서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가 ‘행정 경험’을 앞세워 한나라당의 차기주자를 노리고 있다.
이들의 리더십은 과거와 다르다. 돈도 조직도, 계보도 없다. 과거처럼 카리스마를 내세운 대중조작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오로지 감성과 이미지로 무장한 대중성만이 이들의 무기이자 지지기반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불안정한 리더십이다. 그렇지만 이런 흐름이 대세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이미지 정치의 귀재인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과 영국의 블레어 총리가 이미 이 같은 리더십을 통해 일정 부분 긍정적 평가를 받아놓았다.
바뀐 리더십은 열린우리당에서 먼저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근태 의원이 재야운동권 출신의 대표로 부각되며 정의장과 ‘투톱’으로 등장했다. 정의장의 지원군이었던 신기남 천정배 의원도 이미 홀로서기에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을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부겸, 김영춘, 임종석 의원 등은 개혁과 진보, 보수까지 포용할 수 있는 차세대 리더그룹으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의 변화는 박근혜 대표가 이끌어간다. 그를 중심으로 박진, 김문수, 남경필, 원희룡 의원 등 이념적으로 유연한 소장파 리더들이 전진배치되고 있다. 포스트 JP로 끊임없이 거론돼온 심대평 충남도지사, 김학원 의원도 JP가 떠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장고에 들어갔다. 반면 3김이 비운 자리를 향해 승천하려던 최병렬 서청원(이상 한나라당), 추미애 조순형 의원(이상 민주당) 등은 변화의 흐름에 거스르다 추락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리더십의 실질적 교체인지에 대해서는 정치권 내에서도 아직 견해가 엇갈린다.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은 “지역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3김 정치의 완전한 퇴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과도기를 거친 이후 토론과 집중의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이 창출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새로운 리더십이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는 분석은 3김 시대 이후 정치현실의 가변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DJ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정치와는 철저히 거리 … 새 역할 부여받아

민주당 당직자 일각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만든 당이 망가지면서 쓰러지는데 아무런 지원사격이 없었던 까닭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같으면 진작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 지원사격에 나섰을 텐데 DJ는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실제 YS는 아들 현철씨와 박종웅 의원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 나들이를 감행했다.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민주당을 지켜야 DJ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정치철학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DJ가 위기에 빠진 민주당을 외면했고,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추락했다. DJ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교동 DJ 사저를 지키는 김한정 비서관의 설명이다.
“민주당의 직접적 요청은 없었다. 설사 요청이 있었더라도 당과 정치를 떠난 이상 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정말 그랬을까. 방송과 신문이 온통 추미애 의원의 3보1배를 보도하는데도, 몸이 불편한 아들(김홍일 의원)이 표를 얻기 위해 호남을 누비고 평생을 함께했던 동지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데도, DJ는 왜 정치를 외면했을까. 이어지는 김비서관의 말이다. “민주당 운명은…. 애석하게 생각한다.”
동교동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DJ도 사람이다”는 말도 덧붙인다. DJ인들 자신이 만든 민주당이 쓰러지는데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역할이 끝난 자신이 민주당을 일으켜 세우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DJ는 알고 있었고 그 자세로 총선에 임했다는 게 이 인사의 해석이다. 손을 내미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역류요, 지켜보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DJ는 총선 내내 이런 자세를 견지했고 총선이 끝난 지금 그만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DJ는 5월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국고 보조를 받아 프랑스, 노르웨이, 스의스 등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김전대통령은 파리에서 열리는 ‘OECD 포럼 2004’ 개회식에 참석, ‘21세기와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데 이어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해 망네 본데비크 총리를 예방한 뒤 노벨연구소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 자격으로 ‘햇볕정책,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이번 방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에서 국제회의 참석을 공식 요청해 이뤄졌다. 그리고 경비 국고지원은 공무 여행시 여비 등을 지급하게 돼 있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DJ는 이번 방문을 통해 자신의 분신과 같던 햇볕정책과 통일정책 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할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DJ 비서실 관계자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왕성한 민간 외교활동을 하고 있는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처럼 DJ가 이번 순방을 계기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걸맞게 적극적인 민간 외교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