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의 뿌리 깊은 반미감정 미국의 민주화 로드맵 차질
지난해 3월 20일, 이라크 국민의 자유를 위해 미국은 ‘Operations Iraqi Freedom’ 작전을 발동했다. 이라크 자유라 불리는 이 군사 행동의 목적은 후세인 공포 체제에서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킨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루 5억 달러가 넘게 드는 전비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켜 세계만방에 자유와 평화의 기치를 높이 휘날리겠다는 대의를 실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7만원짜리 AK소총을 쥐고 흔드는 이라크 민병대의 머리 위로 한발에 13억이 넘어가는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675기와 발당 가격이 3천만원에서 3억원 사이를 오가는 각종 스마트 폭탄 4천여 발을 아낌없이 이라크 전 지역에 흩뿌리며 자유와 평화를 말한 미국. 그후 1년이 지났다.

부시가 악의 축 이라크를 치기까지
이라크는 1991년 4월 걸프전 (1차 이라크 전쟁) 종결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불법적인 대량 살상무기(WMD)를 보유하거나 개발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을 받았다. 이웃 쿠웨이트를 침공, 아랍 세계로부터도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던 이라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여론에 못 이겨 급기야 유엔무기사찰단(UNSCOM)을 수용, 1998년까지 250여 차례의 현장조사를 받았다. 이라크는 이 기간동안 48기의 장거리 미사일, 690톤의 화학무기 원료 등을 폐기했다.
1998년 12월 이라크가 후세인 대통령궁 등 정치,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도 현장조사를 하겠다는 요구를 거절하자 UNSCOM은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미국과 영국은 이를 빌미로 이라크가 유엔결의를 무시했다며 그해 12월 16일부터 4일간 바그다드와 WMD 개발비축의 의심을 받고 있던 시설물을 집중 폭격했다.
그 후 UN 안보리는 유엔무기 사찰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유엔 사찰위원회(UNMOVIC)를 발족, 이라크에 대한 무기사찰을 다시 시도했으나 이라크는 자국에 대한 금수조치가 해제되지 않는 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텨 실제 사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라크와 미국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고 있던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를 이란 및 북한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부시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이라크에 WMD 즉각 폐지, 테러지원 중단, 국민억압 중지 등 5개항을 요구하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이어 이라크에 대한 징벌을 전 세계에 천명한 셈이다.
드디어 부시 대통령은 2003년 3월20일 후세인 정권을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무법 정권’이라고 매도하면서 이라크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며 후세인 정권이 불법적으로 WMD를 개발하고 테러를 지원, 세계 평화를 위협하며 국민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무장해제 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미국은 침공 전 영국은 물론 한국, 호주, 덴마크, 이탈리아, 네델란드, 일본, 필리핀, 스페인 등 30개 국가로부터 이라크 무장해제 지지를 받았다. 침공 명분을 쌓기 위한 국제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내세운 침공이유는 그야말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국제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은 그들이 앞세운 명분 보다는 자국의 실리와 국제 정치, 군사무대에서의 헤게모니를 위해 침략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이라크를 무장 해제시키려는 부시의 공격적인 행동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강박관념에서 촉발된 것이다. 부시 가문이 석유 및 군사산업에 깊이 개입돼 있고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통해 개인적인 경제적 이익을 노리고 있다”고 까지 비판했다.



미국은 무엇을 얻고 잃었나
“미군과 연합군은 이라크 국민을 해방하고 세계를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광범위한 공격의 초기 단계에 돌입했다.” 2003년 3월 20일. 아라비아해와 홍해상의 미 항공모함에서 발사된 토마호크 미사일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순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전쟁 개전의 명분을 이렇게 규정했다. 9 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가 주장해 온 ‘선제공격원칙(Pre-emp tive strike)’의 첫 역사적 등장이었다. 세계 37개국이 미국의 요청으로 파병에 동참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라크는 여전히 테러로 지새고 있고 주요 파병국인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는 폭탄테러로 1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13일. 미국은 이라크전쟁에서 ‘모든 것’을 얻은 듯 의기양양했다. 개전 8개월23일 만에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체포한 것이다. 프랑스 독일 등 반전국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라크와 함께 대표적 ‘불량국가’로 꼽혔던 리비아는 대량살상무기(WMD) 해체를 선언하며 ‘팍스 아메리카나’의 깃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했던 러시아의 전철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위상을 확고히 굳혔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러나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호언장담했던 WMD 발견에 실패하면서 미국의 전쟁명분은 퇴색했다. 이라크전 1주년을 앞두고 터진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폭탄테러는 또다시 세계를 테러의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라크 민주화도 험난해 보인다. ‘얻은 것은 송유관이요, 잃은 것은 평화’라는 극단적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얻은 것=미국은 개전 41일 만에 이라크를 점령하는 엄청난 군사력을 과시했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잠재적 경쟁국들이 중동지역에 갖고 있던 정치적 주도권도 사실상 독차지했다. 개전 과정에서 유럽의 우방 프랑스와 독일은 등을 돌렸지만 폴란드 루마니아 같은 동유럽국가와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북카프카스 국가들, 그리고 중앙아시아국가들을 신흥동맹국으로 얻었다.
한국국방연구원 김재두(金載斗) 박사는 “미국은 이라크전을 통해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파키스탄을 잇는 거대한 ‘친미 벨트’를 건설해 에너지 패권을 확보했으며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고 분석했다.
바그다드 북쪽 바이지 지역에서 이라크 북부 키르기스 유전과 터키의 지중해 석유기지 제이한을 연결하는 송유관을 확보했다.
한국이슬람문화연구소 이원삼(李元三) 소장은 “미국은 안정적인 원유물량 확보로 특정 국가에 대한 수입의존도를 줄였을 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산 원유가격 인하와 같은 다양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잃은 것=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국은 이라크전에서 군사적 승리를 쟁취한 것 말고는 온통 실수투성이다”고 혹평했다. 무엇보다도 전쟁 명분이었던 이라크의 WMD는 ‘부메랑’처럼 미국의 도덕성에 상처를 남겼다. ‘유럽의 9 11’로 불리는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폭탄테러는 ‘테러로부터 세계를 보호한다’는 미국의 호언장담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라크 철군을 공약으로 내걸고 총선에서 승리한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 사회노동당 당수는 “이라크전은 재앙이었고, 이라크 점령은 더 큰 재앙이 될 것”이라면서 “이라크전은 더 많은 폭력과 증오만을 낳았다”고 말했다.
로마노 프로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은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미 군사대학의 제프리 리코드 교수는 “경제제재 등으로 이라크를 컨트롤할 수 있었으나 불필요한 예방전쟁을 일으켜 새로운 테러전선을 만들어준 것은 전략적 오류”라고 비판했다.

이라크戰 1년 세계로 퍼지는 테러

“이라크는 1년전 미국에 급박한 위협이었다. 전쟁의 결과 우리 모두는 더 안전한 세상에 살게 됐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NBC방송에 나와 이라크전쟁의 성과를 이같이 자평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CBS방송에 출연해 “이라크전쟁을 감행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으며 대(對)테러전이 완수된 데 대해 만족한다”고 말했다. 미 행정부의 주장처럼 과연 테러의 뿌리는 제거됐고, 세상은 더 안전해졌을까. 적어도 미국만 놓고 보면 더 이상 위협적인 테러는 없었다. 하지만 1년을 되돌아보면 이중삼중의 안전보호막을 두른 미국과 달리 세계는 본격적인 테러 공포에 휩싸여 있다. 일부에선 “미국민이 느꼈던 9 11테러의 참담한 고통을 이제 세계가 나눠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 국무부가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단체는 9 11테러 이전 28개에서 현재 36개로 늘어났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2003년 5월 1일)한 직후인 지난해 5월 13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을 하루 앞두고 수도 리야드 내 외국인 거주지역에서 연쇄폭발이 발생했다. 네 차례 폭발로 29명이 숨진 이 테러는 이라크전쟁이 ‘국제 테러전’으로 비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3일 뒤에는 모로코에서 테러공격이 이어졌다. 동맹국의 결속을 약화시키고, 세계의 반전여론을 부추기기 위한 테러가 국경 없는 전선(戰線)을 형성한 것. 지난해 11월 20일 터키 이스탄불 영국영사관 폭탄테러는 정확히 영국을 방문 중인 부시 대통령이 토니 블레어 총리를 만나기 직전에 일어났다. 영국의 반전 분위기는 이 테러로 최고조에 달했다. ‘유럽의 9 11테러’로 불리는 이번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폭탄테러는 테러가 국제 및 국내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단계까지 발전했음을 보여줬다. 총선(3월 14일)을 사흘 앞두고 벌어진 이 대형 테러는 표심을 반전(反戰)쪽으로 급선회시키면서 정권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CNN은 “이라크 안에서 제한적으로 미군을 향해 겨눴던 저항세력의 총구는 이제 전 세계로 향했다”고 진단했다.


테러훈련장으로 변한 이라크
불안한 치안상황을 틈타 이라크는 테러조직의 훈련장 혹은 실험장으로 변했다. 동맹국에 대한 저항의 수단일 뿐 아니라 종족 대립으로 인한 내전 수준의 테러도 빈발하고 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가 증가한 것은 이 때문이다. 테러의 ‘수요’가 급증하자 외부 용병도 유입되고 있다. 한국이슬람문화연구소 이원삼(李元三) 소장은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 등은 지금 다른 정파나 종족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며 “테러가 그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해도 제2, 제3의 빈 라덴이 계속해 나타날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조지 테닛 국장은 의회증언에서 테러작전의 어려움을 이같이 토로했다. 그는 테러조직이 모로코 케냐 터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도처로 조직을 확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미국의 일방주의와 테러는 비례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샤시태루 유엔 사무부총장은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2003년 9, 10월호에서 “테러는 미국 혼자의 힘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며 다자주의(Multilater alism)에 입각한 해법을 강조했다.
프랑스 파리1대학 장 클랭 교수는 “힘에 호소하는 미국식 접근법으로는 국제질서에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했고, 브루킹스연구소 케네스 폴락 선임연구원은 “무엇보다 미국의 중동정책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라크발 민주화 실험 ‘성공 미지수’

미국의 구상대로 이라크에는 적어도 형식과 제도적인 면에서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졌다. 서명된 임시헌법에 따라 이라크는 6월 말 주권을 건네받아 내년에 스스로 헌법을 제정한다. 국회의원과 대통령도 뽑는다.
미국은 이라크를 지렛대 삼아 중동 전체를 민주화한다는 대중동 구상(the Greater Middle East Initiative)을 세웠다. 이는 중동의 권위주의가 테러의 근원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왕정(王政)과 독재 종식 민주화를 통한 우호세력 집권 테러 소멸이라는 ‘로드맵’이다. 이라크는 그 첫 번째 실험장인 셈이다.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이라크에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시리아 이란 레바논 등 반미 성향의 아랍국들도 연이어 민주국가가 될 것”이라는 민주주의 도미노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권의 뿌리 깊은 반미감정은 미국의 구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달 초 방한한 이라크 기업인 11명에게 본보가 설문조사한 결과 ‘미국은 적국’ 혹은 ‘두고 봐야 안다’며 반미감정을 표출한 응답자가 10명, ‘우방’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명뿐이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센터가 중동 주요국 8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미국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응답이 요르단 93%, 모로코 68%, 터키 63%, 파키스탄 61% 등으로 나타났다. 이라크발 민주화 실험은 아랍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권의 맹주이며 왕정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벌써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1981년부터 통치하고 있는 이집트, 무아마르 카다피 최고지도자가 35년간 독재체제를 굳힌 리비아, 87년부터 벤 알리 대통령이 통치하는 튀니지 등도 영향권이다. 이를 의식해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전격 방문, 파드 국왕과 ‘중동의 독자적 개혁 구상’을 발표했다. 미국의 구상대로 따라가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동국가들의 움직임에 유럽은 적극지지 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미국이 대중동 구상을 폐기하거나 절충안을 만들지는 미지수다. 종족 종파 갈등뿐 아니라 십자군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내재된 뿌리 깊은 외세에 대한 반감도 관건이다.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김경민 교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보편적 선으로 볼 수 없다”면서 “주입식 민주화보다는 다양한 종족, 복잡하게 얽힌 역사를 고려한 ‘이라크 방식의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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