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에서 고부 ‘영주정사’와 창평 ‘영학숙’의 위상과 역할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의 제6차 학술대회가 7일 YMCA 녹두홀에서 진행되고 있다(사진-이용찬).

지난 7일, 정읍 YMCA 청소년수련관 녹두홀에서 ‘한국근대사에서 고부 ‘영주정사’와 창평 ‘영학숙’의 위상과 역할’이란 주제로 사) 정읍역사문화연구소의 제6차 학술대회가 열렸다.

앞서 필자는 몇해 전, 『정읍동초등학교 교육100년사』를 집필한 바 있다. 따라서 정읍에서 근대 개화기의 교육과 정책에 관한 이러한 연구가 앞서 진행되었다면 하는 아쉬움 속에서 나름 기대가 컸던 학술대회였다.

하지만, 이날 학술대회는 시대구분이나 우리나라 근대 개화기의 교육정책 등의 변화 과정 등에 대한 논의들과 그 과정에서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된 ‘영주정사’의 ‘위상과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조차 실체를 찾아볼 수 없는 학술대회로 마무리됐다.

우리나라 개화기의 조선은 프랑스와의 충돌과정에서 병인양요를 겪었고, 미국과의 충돌과정에서 신미양요를 거치며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미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에 끼어든 일본의 강화도 침략을 계기로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갑작스럽게 개항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까지도 조선은 국제 정서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면서 제국주의 열강들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적극적으로 국가 중흥을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개항 지역에 많은 외국 상인들이 유입됨에 따라 개항 지역 주민들의 근대적 경영방식, 국제무역, 외국어, 새로운 학문에 관한 지식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이를 위한 정책 시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당시 주민들은 이러한 내용을 교육할 수 있는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치를 관(官)에 요구하게 되며 원산학사(元山學舍)가 설립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조선 후기 신교육이란 개념이 새롭게 생겨났다. 신교육은 기존의 유교 중심 한학 교육에서 서구 문화 중심의 교육내용과 대중교육 내용으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신교육 이념은 기존의 유학자 중심의 엘리트 교육에서 대중까지를 포함하는 신식 학교 교육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용찬(전북취재본부 문화국장).

이를 위해 조선은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신설하여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교육부문에 대해서는 서구식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우선 일본과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습득하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교육제도를 유지하면서 시급히 필요한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3년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同文學, 1886년 육영공원으로 개편) 등의 설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갑오개혁 이전의 신교육 정책은 대부분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학교 설립이 대부분이었고, 일반 대중을 위한 교육은 시행되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우리나라에서 신교육이 정착되게 된 계기는 1895년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선언 이후 교육행정을 관장하는 중앙관청으로 기존의 학무아문이 학부로 개편되고, 신교육체제 구축을 위한 정책들이 입안되고 실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와 함께 이때부터 신교육에 필요한 교사 양성을 위한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 교육을 위한 외국어 학교 관제, 공교육적 학제 구축을 위한 소학교령, 중학교 관제, 상공학교 관제들이 차례로 제정 공포되며 현재의 초·중·고의 학교단계와 직업 교육의 원형들도 구축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러한 신교육에 대한 의식이 고취되는 상황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각각의 사립학교 등이 건립되었는데, 이 때문에 최초의 사립학교 대부분이 각 지역 향교나 서원, 또는 그 인근 지역에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부에서는 고부의 마지막 군수 정용기의 주도로 1906년 고부향교에 사립 강화학교가 설립되었고, 1907년 태인에서도 유림들의 주도로 무성서원 일원에 인상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8년 정읍에서는 박기철과 경기전 참봉 출신이던 김기동의 주도로 정읍향교에 일원에 사립 초남학교가 설립된 바 있다.

하지만,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이러한 신교육에 대한 지역적 자각운동이나 변천과정에 따른 문제들은 논의되지 않았다. 지난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초대 학교장 논란이 일었던 현재의 정읍 동초등학교의 전신이 1908년 박기철과 김기동의 주도로 설립된 사립 초남학교였다.

박기철은 1907년 태인 유림들의 움직임과 함께 신교육 체제를 최초 상애학교로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미루다 이듬해인 1908년 김기동의 경제적 지원으로 사립 초남학교를 설립한바 있다. 하지만, 역시 경제적 사정으로 1년 남짓 초대 교장직에 머물다 1910년 초부터 김기남이 학교를 이끌다 1912년 일본이 사가시구찌에게 학교를 빼았겨야 했다.

따라서 현재의 정읍 동초등학교 역사는 1912년부터의 졸업생을 1회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일제가 정한 방침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일뿐, 실제적 역사는 1908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4년의 역사를 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날 학술대회가 단순히 창암(蒼巖) 박만환(朴晩煥, 1849~1926)의 '영주정사(瀛州精舍)'와 창평에서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 1863~1933)가 세운 '영학숙(英學塾)'을 비교하기 보다 정읍에서의 신교육 100년을 돌아보는 학술대회로 이루어져 전체적인 신교육 정착 배경에 대한 논으로 이루어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903년 현재의 정읍시 흑암동, 당시의 고부 영주정사에서는 조정의 교육정책에 반(叛)하는 기존의 유교 중심의 한학 교육이 이루어졌던 사실을 신교육의 요람이었던 것으로 잘못 소개했다. 

영주정사와 관련하여 당시의 신교육은 오히려 박만환의 아들인 박승규(朴升圭, 1894~1925)가 1920년경 현재의 정읍시 용계동에 세웠던 ‘승동학교(升東學校)’에서 다시 1923년 ‘영동학교(瀛東學校)’로 교명을 개편했던 학교에서 신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박만환은 영주정사 뒤편에 ‘영양사(瀛陽祠)’를 건립하고 기자와 공자를 비롯해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의 4성과 주돈이·정이·정호·장재·소옹·주희 등의 6현을 차례로 봉안하고 배향했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현재까지 개화기의 분명한 사상적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간재 전우와 그의 제자들과의 교유를 고집했다. 

박만환은 1886년 통훈대부 행 의금부도사에 임명된 후, 1890년에 삼례도찰방(參禮道察訪)을 역임했다. 당시 도찰방의 직임이 중앙과 지방간에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궁중으로 진상되던 공부(貢賦) 등의 관수물자(官需物資)를 운송하며, 청나라 사신 왕래에 따른 사신 접대〔迎送〕와 숙박 등을 담당했다.

당시의 도찰방이 관리하던 역참은 조선시대의 육상 교통기관으로서 일반인들을 검문하고 규찰(糾察)하던 기관이자 현시대 경찰과 군 헌병대의 검문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기에 부와 명예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박만환의 증손 박철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관료들과 아전 등 수탈의 주체였다는 점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도찰방직을 2개월로 마감하고 관직을 떠나 선대의 재산으로 영주정사를 건립했다"고 밝힌바 있다.

따라서 이부분은 그의 선친 박만환과 달리 박승규는 초기에 설립한 ‘승동학교’의 경영이 어려워져 1923년 다시 새로운 ‘영동학교’로 교명을 개명해 재설립했던 역사가 있었다는 점에서 박만환이 삼례 도찰방직을 이용한 부의 축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손의 증언이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규장각 직각(奎章閣 直閣)의 직임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선대의 재산으로 고향 창평에서 영학숙과 창평학숙을 연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의 경우는 그가 앞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던 중국계몽운동가 양계초의 저술인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의 저술을 읽고 서구 문명의 수용을 제창하고 애국 계몽운동을 주창하였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영주정사의 구학문 교육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실제로도 춘강의 영학숙에서는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이표(李瀌)라는 귀화인을 서울에서 초빙하여 그를 숙장(塾長)으로 예우하며 영학숙을 맡겼는데, 당시의 이표는 영어뿐만 아니라 일어와 수학, 역사, 지리, 체육 등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김상욱 목포대 김상욱 박사의 논증이었다.

따라서 이날 학술대회에 대한 소회는 정읍 신교육문화의 변천에 대한 학술적 발견보다는 박만환의 아들 박승규(朴升圭)의 신학문에 대한 교육적 열의에 대한 학술적 발견이 더 큰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박승규는 박만환의 아들이었지만, 박만환이 지향하던 구학문으로의 회귀를 따르지 않고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와 같은 신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두번이나 학교를 재설립했다. 따라서 신학문의 장려를 위해 헌신한 지역간의 인물로는 박만환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아들 박승규가 춘강 고정주가 비견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지난 학술대회의 큰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찬 기자 chans0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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