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이기보다는 학자나 예술가로 평가했어야

▲ 6월23일 발행된 5만 원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뜨겁다.
신사임당의 영정이 그려진 최고액 화폐 5만 원권이 유통되었다. 이로써 1973년 발행된 1만 원권은 36년 만에 최고액권 자리를 5만 원권에 내주게 됐다. 5만 원권 발행의 의미는 화폐 종류가 하나 더 늘어난 것 이상이다. 시중은행은 수표 발행·관리 비용을 절감하게 된 반면 수표 유통기간 무이자로 돈을 굴려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잃게된 셈이고, 한국은행은 물가 상승에 대한 우려를 잠재워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됐다. 5만 원권 발행으로 뇌물 등 검은 돈의 거래가 쉬워졌다는 점도 고민해야 할 숙제다. 한은은 5만 원권 발행으로 물가 관리에 부담을 갖게 됐다. 당장 첫 날에만 1조 6,400억 원의 5만 원권이 시중에 풀렸다. 국제 원유 가격 상승으로 하반기 물가 관리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에서 상품 및 서비스 가격의 연쇄 인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반응은 뜨겁다. 한국은행 등 금융 기관에는 아침 일찍부터 5만 원짜리 신권을 교환하려는 시민들이 몰려 들었다. 한국은행은 이 날 9시부터 1인당 20장, 1백만 원 한도로 교환해줬고 시중 금융기관들도 5만 원권 공급을 시작했다. 정상덕 한은 발권정책팀 차장은 “당초 예상보다 많이 인출됐는데, 이는 5만 원권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발행번호 1번부터 100번까지는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에 전시되고, 101번 부터 2만 번까지는 인터넷 경매로 공급된다. 경매 일정과 방법은 7월 중 발표될 예정이다. 한국은행은 위폐를 막기 위해 지폐 위조방지장치 확인카드 4만개를 제작해 금융기관과 유통업체 등에 배포했다. 새로 발행된 5만 원권 앞면은 신사임당 초상과 함께 신사임당 작품인 ‘묵포도도’와 ‘초충도수병’ 가운데 가지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뒷면 도안에는 조선중기 화가 어몽룡의 ‘월매도’와 이정의 ‘풍죽도’가 사용됐다. 우리생활과 너무 밀접한 나머지 오히려 무관심하게 다뤄지는 화폐 속 인물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5만 원권 화폐 발행 기념 ‘신사임당’에 대해 알아보았다. 화폐 속에서 만날 수 있게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사임당. 그녀는 누구인가.

▲ 강릉 오죽헌에 보관된 신사임당의 영정.
화폐 속 최초의 여성위인 업적이 현모양처?
2008년 노무현 당시 참여정부가 5만 원권과 10만 원권 화폐발행을 추진했고, 한국은행에서는 고액권 화폐에 사용될 인물선정을 위해 다각도로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 압도적으로 김구 선생과 신사임당이 초상 인물로 지지를 받았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2009년 상반기에 5만 원권과 10만 원권 화폐발행 계획을 확정해 발표했고, 여기에 사용될 인물초상으로 10만 원권에 독립운동의 상징성으로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을, 5만 원권에는 교육적 측면과 여성, 가정이라는 점을 착안해서 신사임당을 최종 선정해 발표했다.
하지만 여성계의 반발로 최종 선정까지 말도 많았었다. 여성위인의 대표적 업적이 ‘현모양처’라는 이유 때문이다. 더구나 아들인 ‘율곡 이이’ 선생이 5천 원권에 등장하기 때문에 신사임당이 5만 원권에 등장하게 되면 모자가 나란히 화폐에 등장하게 된다.
신사임당 초상은 여성계와 문화계, 연고지인 강원도 강릉 등지에서 화폐인물 채택을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진보여성단체 등은 ‘가부장적인 현모양처 이미지’를 이유로 반대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은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가 기대 된다”고 선정 이유를 다시 한 번 밝혔다.
화폐발행 계획 시 양성평등 차원에서 5만 원권의 후보는 무조건 ‘여성’이어야 했다. 여성 후보 중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을 펼쳤던 인물에는 3위에 오른 ‘유관순 열사’ 정도가 있는데, 유관순 열사의 업적은 항일운동이었기 때문에 탈락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한국의 최고액 화폐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한 사람이 그려져 있다’고 생각할 우려가 있어서다.
우리나라의 지폐 도안으로 여성 인물이 사용되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1962년 5월16일 발행된 100환권 지폐에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아들이 저금통장을 들고 있는 모자상초상이 등장한 적이 있다.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된 이 지폐에는 특정 위인이 아닌 일반인이 도안 모델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그 해 6월10일 제3차 통화교체 조치로 새 화폐가 발행되면서 발행된 지 한 달이 못돼 폐기된 바있다. 따라서 사실상 신사임당이 화폐 도안 최초의 여성은 아닌 셈이다.

신사임당의 일대기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신사임당은 현재의 강릉시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에서 1504년(연산 10년) 10월29일 신명화공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성은 신, 이름은 인선. 어려서 외조부 이사온의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1510년(중종5년) 7세 때 안견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1522년(중종 17년) 19세에 덕수 이씨 원수공에게 출가했으나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몇 달 후 부친의 별세로 3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서울로 올라가 실질적인 혼인생활이 이루어졌다. 얼마 뒤에는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1524년, 그의 나이 21세에 서울에서 맏아들 선이 태어났고, 26세에 맏딸 매창이 태어났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1536년 33세, 훗날 대학자가 되는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특히 율곡 이이의 태몽은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른 봄 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 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다. 다시 그해 12월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 선생이다.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고 한다”
현재까지도 이 꿈을 꾼 곳은 강릉 오죽헌에 ‘몽룡실’이라 이름 붙여져 남아있으며, 남편 이원수는 이 꿈 이야기를 듣고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현룡’이라 지었다. ‘현룡’은 이이의 어릴 적 이름이다. 1541년(중종 36년). 그의 나이 38세, 강릉 친정에서 어머니를 하직하고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같은 해 넷째 아들 우가 태어났다. 아래의 시는 어머니를 향한 사임당의 시조 한 가락이다.

산 첩첩 싸인 내 고향 천리이지만
꿈과 생시 오직 돌아가고픈 마음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 스치는 한 가닥 바람갈매기 떼는
모래밭에 모이고 흩어지고
바닷가에 고깃배 동서로 오락가락 어느 때나 고향길 다시 돌아가
색동옷 갈아입고 바느질할까

이때부터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서 살다가 그의 나이 47세, 여름에 부군이 수운판관으로 임명되었고,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세곡을 운반하는 일로 남편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 강릉 오죽헌에 있는 신사임당의 초충도 화단.
신사임당의 타고난 예술가 기질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외에 ‘시임당’, ‘임사재’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것으로, 당대에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화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율곡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더욱 성숙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일 등은 그녀의 감수성이 남달랐음을 시사한다.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극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는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고한 정신과 기백을 엿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 율곡이이는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신사임당은 정말 ‘현모양처’였나
사임당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남편이 완고하고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임당의 남편은 부인의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그녀는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 없는 본연성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남편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인정해주었다.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신사임당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사료는 셋째 아들 율곡 이이가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선비행장)이다. 이이는 부친 이원수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지만 모친 신사임당의 일대기는 남겼다.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이가 남긴 행장을 보면 많은 의문이 생긴다. 신사임당의 실제 모습은 삼종지도에 충실한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이가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아버지께서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하셨다”고 적은 것처럼 신사임당은 여필종부보다는 때로는 남편도 꾸짖는 여인이었다. 신사임당의 꾸짖음은 이원수가 윤원형과 함께 사림을 탄압한 이기와 어울리는 것에 대한 훈계로 해석된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 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화폐는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모바일 시각예술품’이다. 이렇다 보니 화폐인물 선정에 그만큼 말도 많다. 가장 최근에는 10만 원권 발행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최고액권 주인공으로 백범 김구가 거명되자 보수층이 반발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물 제850호)에 대해서는 독도가 없으니 새로 그려 넣으라는 여론까지 일었다. 결국 10만 원권 발행은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기 연기된 상태다. 화폐가 단순한 상거래 수단 이상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한국에 온 외국인이 가장 먼저 만나는 그림이자, 갑남을녀의 지갑 속에 들어간 문화유산. 화폐 도안의 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5만 원권은 신사임당을 현모양처가 아니라 어려서 경전에 통달한 ‘학자’이자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다(선비행장)는 ‘예술가’로 기려야 실제와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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