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

매년 7월17일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법률인 헌법을 만들어 널리 공포한 날이다. 1948년 5월10일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거의 결과 구성된 제헌국회가 같은 해 7월12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14일 국회의장 이승만의 서명을 거쳐 7월17일 헌법을 공포한 것을 기념하는 제헌절(制憲節)이다. 이날은 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한 것으로 그 의미가 깊다.
제헌절은 1979년 10월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시행함으로써 국경일로 정해졌다. 이날에는 정부 주관의 기념식전과, 헌법을 존중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앙양하는 내용의 각종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그러나 2005년 6월, 2005년 7월부터 시행되는 행정기관 주 40시간 근무제에 맞춰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개정문과 시행 규칙에 따라 2008년부터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쉬지 않는 국경일)로 바뀌었다.
모든 법률은 헌법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헌법에 위배가 되면 법으로서의 효력을 잃게 된다. 비록 제헌절이 휴일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 왕위에 즉위
조선왕조의 창업주인 이성계가 1392년 7월17일 왕위에 즉위했다. 홍건족의 침입 때에 무공을 세운 그는 요동정벌 중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장군을 제거하고 사전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물질적인 기반을 박탈하였다. 그의 일파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위에 앉혔다.
1335년 음력 10월11일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있던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환조 이자춘과 의혜왕후 최씨(崔氏)의 적자로 태어난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武臣)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기가 그지없어서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수군의 주력 대파, 임진왜란의 3대 대첩 ‘한산도 대첩’
1592년(선조 25) 5월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6일 이억기와 더불어 47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여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워 일본 수군의 주력을 대파했다.
당시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 ‘만보산사건’
1931년 7월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다.
만주 길림성 장춘 부근 만보산에서 조선인 농민과 현지 중국인 농민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만보산 지방의 많은 미개간지를 조선 농민이 개간하자 중국 주민들이 반대함으로써 발생했다.
7월1일 농민 약 400이 봉기하여 이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현장에 있던 조선인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주민 사이에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일본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냈으며, 중국 정부측은 이에 강경하게 대항하였으나 일본은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조선 내 각 신문에는 동족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조선 민족의 순진한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조선 내에 거류하는 중국인을 적대시하는 운동을 도발시켰다.
이 때문에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 등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동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총독부와 그 하수인인 일본경찰은 이 사태를 방관시하는 한편, 형식적으로 제지의 태도를 보였으나 극히 소극적이고 냉담하였다. 그러나 이 폭동이 가라앉자 총독부 당국은 단호한 태도로 광범위한 검거를 시작하였다. 「동아」,「조선」양대 신문사에서 진상을 조사한 결과, 이 사건의 이면에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음모가 숨어있으며, 사건이 일본의 모략선전으로 과장되게 알려져 결국 일본의 농간으로 발생된 사건으로 알려졌다.

미국,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성공
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8.5~), 에드윈 앨드린(Edwin Eugene Aldrin,Jr, 1930.1.20~), 마이클 콜린즈(Michael Collins, 1930.10.31~) 등 세 우주인을 태운 아폴로 11호가 1969년 7월16일 오후 10시32분(한국시간) 케네디 기지 발사대를 떠난 지 102시간 45분42초만인 1969년 7월20일 오전 5시17분 40초에 인류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했다. 이는 지구로부터 35만 5,000㎞를 비행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 2006년 7월24일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이글호의 알려지지 않은 후일담이 영국 일간 데일리 미러에 공개됐다. 이글호에 탑승해 달 표면을 밟았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과 동료 버즈 올드린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달에서 이륙하려고 하다가 회로 차단기의 스위치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이륙을 못할 뻔 했다. 그 순간 올드린은 볼펜을 스위치가 부러져 생긴 구멍에 넣었고 비로소 회로 차단기를 작동시켜 달에서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의 달 착륙 시도가 실패할 것을 대비해 당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암스트롱 등 우주비행사 3명의 죽음을 전 국민에 알리는 연설까지 준비했었고 미국 정부는 우주비행선에 치명적 문제가 생기면 미국의 우주비행사가 우주미아가 되는 장면을 전 세계가 볼 수 없도록 통신을 끊으라고 미항공우주국(NASA)에 명령하기도 했다.

북한 독재 체제 역사적 인물 김일성 주석 사망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서 태어난 고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이고, 동생으로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英柱)가 있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으로 이사하였고, 1926년 지린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으나 1929년 중퇴하였다. 그 뒤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1945년 소련군 장교가 되었다.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의 붉은군대를 따라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평양에 들어와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다. 곧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하고, 그해 10월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일성 장군’이라고 그를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북한으로 입성한 직후인 8월26일부터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개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했으나 후에 점차 공산진영 인사의 수를 늘려 결국 공산진영 독점체제를 만들어 북한의 관리와 조직을 구성해나갔다. 그리고 1948년 9월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으로 들어와 1당 독재·1인 독재·1족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김일성은 1족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김정일(金正日)에게 정치 경험을 쌓게 한 후 후계자로 삼고 1994년 7월 묘향산으로 휴양을 갔다가 동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서울-부산 잇는 고속국도 제1호 ‘경부고속도로’ 개통
서울-부산을 잇는 대동맥고속도로로 정식명칭은 경부고속국도이며 고속국도 제1호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을 기점으로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까지 연결된다. 총연장 428㎞, 4차선으로 노폭은 22.4m이다. 1968년 2월1일 착공하여 1970년 6월30일 완공, 민족의 대동맥을 뚫는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강행한지 2년 반 만인, 애당초 세운 공사기간보다도 6개월 앞당겨 19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되었다. 서울-수원간은 1968년 12월21일에, 수원-오산간은 12월30일에, 오산-천안간은 1969년 9월29일에, 그리고 12월10일에 천안-대전간이 완공되었고, 대구-대전간은 그 뒤 20일 후인 12월29일에야 개통되었다.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2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로 불릴 만큼 총공사비 429억 원(금g당 854원 할 때) 연인원 890만 명이 동원된 대공사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외국의 도움 없이 순수 노력으로 이룩했다는 사실에 더욱 의의가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이 1일 생활권으로 좁혀지고 항만과 주요 도시가 연결됨으로써 산업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미국,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미국은 1945년 7월16일 뉴멕시코주 앨러머고도(Alamogordo) 인근 사막의 화이트샌즈 미사일 실험장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한다. 이 실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다음달 초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원자폭탄은 1939년 8월2일 대통령 F.루스벨트가 A.아인슈타인으로부터 권유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은 독일보다 앞서서 원자폭탄 제조계획을 세웠고, 그 해 최초로 정부기구인 ‘우란(Uran)자문위원회’를 설치해 1940년부터 영국과 연구정보의 교환을 시작하였다.
원자폭탄 제조계획을 담당한 미국 정부의 ‘과학연구개발국’은 1941년 12월 계획을 본격적으로 확충·강화하기로 결정하고, 1942년 8월 육군 공병단 속에 ‘맨해튼관구(管區)’라는 암호명을 붙인 원자폭탄제조담당 부문을 설치하였다. ‘과학연구개발국’과 육군과의 공동 관리는 1943년 5월에 끝났고, 그 후로는 육군의 ‘맨해튼관구’가 그것을 관리하였다.

휴전 협정 조인, 6.25전쟁 종결
1951년 6월16일 트리그브리(Trigbri)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전의 휴전을 정식제의 하며, 6월27일에는 그로미코(Gromyko)소련 외무상이 휴전관련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소련의 제의에 대해 검토 후 휴전회담 가능성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1951년 6월29일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Ridgeway)장군으로 하여금 휴전을 제의하도록 지시를 하달했다.
1951년 7월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래봉장’에서 대령급을 대표로 하는 에비회담을 개최키로 합의, 최초의 접촉을 갖게 되었다. 그 후 7월10일 첫 휴전회담이 개최, 26회까지 개성(래봉장)에서 회담을 갖고, 1951년 7월20일부터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이동, 휴전을 위한 회담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7월27일 유엔측 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측 대표 남일이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에서 개전 후 3년 1개월 2일 만에, 회담 개시 후 2년 17일 만인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제159차 본회의장인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서 마침내 전문 5개조 63개항으로 된 휴전협정에 조인함으로써 6.25전쟁은 종결됐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