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페스티발앙상블 '불꽃같은 예술혼을 느끼다' (일신홀, 6/23 오후 2시)

작곡가 이영자 (c)최윤하

[시사매거진] 올해로 6·25전쟁은 71주년을 맞았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수많은 죽음과 희생은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의 초석이 됐다. 그러한 희생 가운데 한참 꽃다운 19세 여대생이 치른 전쟁은 드라마이자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분단의 상징 DMZ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날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포동 자택에서 만난 작곡가 이영자 선생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전 요즘 날마다 감동하며 삽니다. 김치, 깍두기 먹고 자란 한국의 음악가들이 유럽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에서 세계 여러 곳에서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서양인 보다 더 잘 치는 모습을 보니 감격의 눈물이 자꾸만 납니다.”

최근 ‘미나리’의 오스카상 쾌거와 BTS의 빌보드 4관왕과 더불어 ‘K-클래식’은 바로 한국 문화의 세계화이자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과거 서양인들이 지도에서조차도 찾기 쉽지 않았던 한국은 이제 ‘가고 싶은 나라이자 닮고 싶은 선진국’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과 안정이 결코 공짜가 아니었음을 작곡가 이영자 선생의 이번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번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곡가 이영자 (c)최윤하

이영자의 6·25, 서울수복까지 95일간의 사투

내 나이 19세 때 전쟁이 났다. 1950년 5월 10일 이화여자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피아노과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한 달 보름 만에 그 사태가 벌어졌다. 난리 통에 가족, 친구들과 생이별하고 오로지 살기 위한 처절함 속에 정처 없이 춘천 집을 향해 걸었다. 사방을 돌아봐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씻지도 못하고 새까맣게 거지 행색으로 신분을 감추고 그렇게 인민군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당시 이화여대 학생 신분이 들통나면 끌려가거나 죽는다고 해서 거지처럼 살았다. 두려움 속에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목숨만 살려주세요. 죽는 날까지 사회에 헌신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3일을 걷고 또 걸었다.

춘천 우리 집에 가보니 인민군이 이미 관사로 쓰고 있었다. 전쟁 전 아버지는 강원도 내무국장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미 주요 인사들과 가족들은 목적 없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청천벽력으로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비어 있는 빈 집을 찾아 숨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고추장, 된장과 마당에 자란 상추, 쑥갓 등으로 장국을 만들어 겨우 연명했다. 그렇게 두 달을 버티다가 어느 날 아버지를 도와 일했던 관리가 도청에서 빨간 완장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8월 하순, 죽기 살기 이판사판. 이래죽나 저래 죽나 도박하는 심정으로 그 아저씨 집을 찾아갔다.

작곡가 이영자 (c)최윤하

그가 대번에 나를 알아봤다. 그렇게 다행히 나는 그 집 아이들 세 명을 돌보며 식모처럼 집안일을 한 달여간 했다. 그 때 그 집은 흰쌀밥을 먹고 있었다. 쫄쫄 굶었던 당시 눈이 확 뒤집어져서 부엌 땅바닥에 앉아 허겁지겁 먹다 남은 찬밥까지 먹었다. 어찌 보면 이게 다 하나님의 섭리이자 나를 살리기 위한 길이었다. 그러던 9월 23일, 동회에서 쌀 한 말 남짓을 나눠주며 인민군 식량 나르기를 강요했다. 그 누구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밤에 인솔자를 따라 쌀자루를 등에, 머리에 얹고 알 수 없는 길을 향해 또 걸었다. 다음날 홍천강을 건너는데 미군 폭격기 B29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인솔자가 다급하게 "모두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앉으라" "비행기가 움직이는 것들은 다 쏘아 죽인다"고 소리쳤다. 쌀자루, 옷들이 흠뻑 젖었다. 그 상황이 지난 후 목적지 횡성을 향해 다시 걸었다. 저녁 무렵, 산마루치 고개에 도착했다. 그 곳엔 이미 많은 인민군을 위한 쌀들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한 침엽수 나무들 속에 거대한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오래전, 나와 1931년생 동갑이었던 박완서 작가(1931-2011)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며 지금도 산더미 같았던 쌀자루를 생각하니 강원도 9월의 들판을 가득히 채운 금 빛깔의 고개 숙인 벼들이 생각난다. 그나저나 "그 많던 쌀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컴컴한 밤이 되자 돌아가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가야만 했다. 내내 굶은 상태라 기진맥진 상태다. 그러다 저 멀리 희미한 불빛 하나가 보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인민군 고급장교가 지프를 몰고 어디론가 피신하는 듯했다. 그게 빨갱이든 국군이든 뭐든 간에 부탁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길을 막고 살려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결국 나는 밤 길을 무사히 차를 타고 춘천에 도착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징검다리처럼 곳곳에 나를 구원하는 알 수 없는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음을 느낀다.

작곡가 이영자 (c)최윤하

자유를 기억하는 날… 9·28 서울수복

9월 25일, 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발걸음을 향했다. 강촌 즈음 오니 커다란 괴성과 함께 산이 무너지는듯한 산울림이 있었다. 너무나 무섭고 공포스러웠지만 그게 바로 인천 상륙의 함포 소리였다. 그 소리가 바로 자유와 희망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게 가평, 청평, 마석, 금곡을 지나 사흘째 되는 날 청량리에 도착했다. 해질 무렵, 종로에 오니 사방에 악취와 더불어 시체더미가 가득했다. 과거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던 파고다 공원 옆 낙원 여관에 들어갔다. 아버지 이름을 대니 방을 주었다. 당시 아는 얼굴 한 명이 바로 내 편이자 힘이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새벽에 여관 지붕이 유탄에 맞아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다. 더미에 깔려 머리가 깨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도 죽지도 않고 살아남았다. 여관 주인이 솜 이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주고는 밖으로 피신시켰다. 거리에 나와보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여기저기 팔다리가 끊어져 널브러져 있고 주검이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멀리서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9·28 서울수복의 날이었다.

이후 며칠 동안 시청 앞에서 강원도 선발대가 입성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선두에서 강원도 선발대로 입성하는 아버지가 보였다. “니 영자아이가? 니 살았었나?” 그렇게 난 영화처럼 극적으로 아버지를 만났고 후에 부산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해후(邂逅)했다.

난 그 당시 생사를 가르는 그 먼 길을 오가며 수많은 독백으로 예측할 수 없는 내 삶을 희망으로 열었다, 닫았다 했다. 나는 그때처럼 두려움과 외로움 가운데서 깊은 사색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열아홉 나이에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수없이 생각했다. 훗날 내가 음악가로서 작곡을 하게 된 동기의 배경에 이러한 생사를 넘나든 역경의 삶이 원천이 되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이영자’가 겪은 6·25다.

작곡가 이영자 (c)최윤하

운명적인 만남, “네 가슴속에는 음악이 있어!”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나는 평창초등학교를 나오고 춘천여자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평창에서 춘천 유학은 대단한 출세였다. 지금 평창은 대단히 아름답고 세계적인 도시가 됐지만 당시 강원도에서 평창, 정선은 시골 중에 아주 척박한 시골이었다. 음악은 열 살 때 일본인 선생(구니오까 다모쯔)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게 시작이었다. 그러다 춘천여고 시절부터 학교 피아노를 치면서 혼자 독학했다.

이화여대 입학시험에 <쇼팽의 환상 즉흥곡 Op.66>을 쳤다. 다음날 면접에서 KBS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임원식 교수(1919-2002)가 날카롭게 “그게 피아노냐? 모두 8명이 이 곡을 쳤다. 그런데 가운데 토막은 네가 제일 잘 쳤다. 네 가슴속에는 음악이 있어!” 이후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지만 작곡으로 전과를 추천한 분이 바로 임원식 선생님이었다.

이후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의 시작은 1951년 부산 피난 생활 중에 만난 나운영(1922-1993) 선생으로부터였다.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운영 작곡교실’ 간판을 보고 호기심으로 들어간 것이 첫 운명의 시작이었다. 훗날 그분을 통해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을 비롯 음악사적인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교류를 이루며 유럽을 배경으로 심도 있게 음악을 공부하게 된 일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길의 인도함이었다.

본래 메시앙과의 만남은 나운영 선생이어야 했다. 메시앙으로부터 초청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뻐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러나 나중에 본인은 여러 가정사의 일로 갈 수 없으니 당신이 파리로 건너가 메시앙을 만나 공부를 이어가라고 했다. 당시 내 상황 또한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낯선 외국 땅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상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던 때였다. 더욱이 부모님의 반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나를 등 떠밀어 그 낯선 땅에 내려놓았다.

예술의 천재들은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예술의 보자기에 싸여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나는 태어날 때 내 작은 주먹 속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음악의 씨앗을 하나 꼭 쥐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이 씨앗이 음악의 여신 ‘Muse’라고 믿고 있으며 나의 첫 번째 뮤즈는 처음으로 피아노를 가르쳐준 일본인 선생이었고 두 번째 뮤즈는 나운영과 임원식 선생님이었다.

나의 곡 작업은 육체가 한다기보다 내 혼이 한다. 그게 바로 ‘혼풀이’를 하는 것이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시작하지 않았다. 내 영혼을 쏟아내 만든 음악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치유해 주기를 바랐을 뿐. 생사를 오갔던 전쟁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그 기도를 지금도 이루어 가고자 한다.

최근 누군가 ‘내 인생 중에 버릴 것이 하나가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사랑이든 원수든 그 영혼이 내 인생 가운데 깔려있다. 곰곰이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니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들이 가득하다. 연필 10자루면 심포니 한 곡을 작곡한다. 이 연필을 가져다준 사람이 내 머릿속에 있고, 저 화병에 꽂힌 꽃들을 보면 그가 생각나고, 내 인생 중에 거저되는 것 없이 모두가 감사한 일들뿐이다. 눈 감으면 19세, 그 당시로 훌쩍 떠나 나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분들을 생각하고 지난 나의 90인생 세월을 되돌아보면 감동의 눈물이 난다. 다만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의 삶을 다하고 하늘에 갈 때 그제야 모두 내 손에서 놓아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곡가 이영자 (c)최윤하

인터뷰를 마치고...

아끼는 소장품이 작곡할 때 썼던 닳고 닳은 ‘몽당연필’이라고 해맑게 웃어 보이는 이영자 선생님. 본인은 작곡가 이전에 ‘가정주부’라며 이 집에 거주하는 다섯 식구를 돌본다고 한다. 스케이트를 타듯 덧신을 신고 바닥 청소는 물론 온갖 집안일들을 손수 하신다. 그런 그 분의 모습에서 여느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1958년 여의도 비행장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던 최초의 여성 작곡가 이영자, 이는 하노버 학파로 불리며 대한민국 작곡계의 큰 거성으로 자리했던 그분들보다도 먼저였고, 여성 작곡가로서도 최초였다. 1년간 파리에서 수학하고 독일로 자리를 옮긴 윤이상(1917-1995)의 뒤를 이어 학업을 마치고 귀국, 이화여대에 몸담으면서 후학 양성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작곡계의 대모로서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작곡가이지만 오랫동안 외교관 남편(전 주불대사 한우석)을 내조하며 세계 속에 대한민국을 알리는데 공헌을 했다. 작곡가 나운영 선생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바이올린 소나타 “1955”>를 비롯, 200여 곡을 작곡했으며 늦은 밤에도 못다 한 위촉곡을 위해 여전히 스튜디오로 향한다. 올해 90세를 맞는 선생은 약관의 젊은이 못지않은 활기찬 에너지를 발산하며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금년 1월, 2월에 작곡한 여섯 편의 연가곡 “DMZ는 이렇게 말한다” 전장(戰場)의 애가(哀歌) (작사 한명희)가 오는 6월 23일 일신홀에서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의 연주로 세계 초연된다. 역사의 산증인 같은 선생의 이번 곡들은 6·25를 맞아 더욱 뜻깊다고 할 수 있겠다.

몽당연필, 내 방 두 대의 피아노 위는 어지럽다. 쓰다가 던져버린 오선지, 완성된 작품, 빛바랜 사진 액자, 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애장품들. 그 한복판 투명한 유리병 안에 깎이고 또 깎여 6센티 된 몽당연필이 불규칙 한 자세로 있다. 볼 때마다 행복하고 신선한 영감을 준다. (이영자 자서전, ‘불사조의 노래 中에서) (c)최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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