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혼신을 바쳐 조각한 여인상에 반해 그 조각상이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강렬한 기도는 아프로디테를 감동시켜 아프로디테는 그 조각상을 사람으로 변하게 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인간이 마음속에 진정으로 강렬하게 염원하고 있는 것을 강렬하게 바라면 상대방도 그 기대에 부응하여 그 꿈을 실현하게 하여 준다하여 이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한 사람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끝없이 원했던 강렬한 바램과 그 바램에 상응하는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 지표는 성장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얼어붙은 내수는 아직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민들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지속되면서 중산층까지 그 여파가 영향을 미치면서 소비심리는 물론 소외된 계층을 위한 도움의 손길은 예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들어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더 늘어나게 마련이지만 정부가 이를 해결해 주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배고픔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잉여 식품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이제는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다시 되풀이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소외된 계층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열두광주리 나눔회의 주경식 회장을 만나 그의 봉사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을 들어보았다.

나눔 사랑의 모든 것이 담긴 열두광주리
열두광주리나눔본부는 경기도 FOODBANK(잉여식품나눔은행)로서, 생산, 유통, 판매, 사용과정의 잉여식품을 기탁받아 결식 노인 및 아동에게 전달, 활용함으로써 식품을 통한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고 식품 자원의 낭비를 줄이는 역할을 담당하는 비영리사단법인이다. 또한 어려운 이웃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사랑을 이어주는 결연 및 일반후원을 통해 생계비 보조, 생필품 지원, 무료급식 및 장학사업 등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푸드뱅크라는 개념이 1998년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후원을 해주는 회원이 점차 늘어 현재 전기적으로 220여 곳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음식물을 공급해 주는 업체는 80여 군데가 넘어서고 있어 이제 점차적으로 푸드뱅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열두광주리나눔본부 중앙회의 주경식 회장은 이제는 조금씩 사람들이 푸드뱅크의 개념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는 것에 작은 만족감을 느낀다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주 회장은 열두광주리 나눔본부를 이끌어 나가면서 단 한번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인지 이 곳에서는 다른 복지단체나 봉사단체에서 관공서나 시청에서 명단을 받아서 지원을 할 사람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열두광주리나눔 본부 내에 채용된 사회복지사가 직접 찾아가서 확인절차를 거친 뒤에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주 회장은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지원자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상황인데 어려울 때일수록 따뜻한 마음으로 작은 보탬이라도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시절을 넘어-더 이상의 고통은 없다.
열두광주리나눔본부 중앙회의 주경식 회장은 일산의 한 쇼핑몰인 뉴서울프라자를 재래시장 개념의 쇼핑몰로 지역주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가져오게 한 최고경영자로서 지금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물러앉았다. 시쳇말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제 봉사로 눈을 돌리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 회장을 만나 보면 그가 그런 공명심이나 명예심 때문에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남을 돕는 일에 열심인 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순탄치 않았던 탓도 있다. 경남 함안이 고향인 주 회장의 부모는 당시 보기드문 엘리트였다. 교육자였던 부친 주문홍씨가 국회의원에 몇 번의 낙선으로 집안은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주 회장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형제들은 친척들 집으로 흩어지고 저와 어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에 상경해 군용 텐트를 치고 살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치약과 구두 솔을 팔기도 했고, 신문팔이 등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해야했죠.” 상급학교를 진학하면서 입학식 때 한번도 새 교복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는 주 회장은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배움의 끈은 놓지 않았다고 한다. “배워야만 내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참으면서 악착같이 학교는 다녔습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굽힐 줄 몰랐던 그는 국민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기까지 힘겨운 생활을 해야했고, 생의 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어린 나이에 생활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이기에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여러 번의 실패도 맛보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저의 지난 과거 시절이 너무도 아팠기에 내 생에 마감이 올 때까지 어떤 아픔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이 실패하거나 내리막길이 있을 때도 항상 성공하기 위한 하나의 전주곡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고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데 감사했습니다. 새롭게 도약할 일만 남았으니까요” 여러 번의 실패와 성공을 뒤로하고 주 회장은 지금의 뉴서울프라자의 최고 경영자가 되어 죽어 가는 상가를 최고의 상가로 만들어 놓았다. 주민들이 재래시장을 가고 싶지만 신도시에 그러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착안해 재래시장 개념의 쇼핑몰로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갔고 당시 대부분의 유통업체가 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뉴서울프라자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이곳에 입주해 있던 상인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소유보다는 베푸는 마음으로 영혼을 채울 것입니다.”
현재 뉴서울프라자의 경영권을 물려주고 이제 열두광주리나눔회와 대한 우슈협회의 회장으로서의 일에 더욱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주경식 회장은 지금까지 부에 대한 욕심을 가져 본적이 한번도 없다고. “부라는 것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에너지의 역할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을 돕는 것이 바로 저의 행복입니다.” 주 회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자신의 인생은 없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면이 좋아지면 또 다른 도움을 줄 곳을 찾아다닌다며. 하지만 주 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은 한시적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머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마음은 바로 저의 영혼을 채우는 일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항상 행복합니다.” 오늘도 도움을 줄 곳을 찾아다니는 주경식 회장의 마지막 한마디는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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