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현 변호사(법률사무소 확신)

지인들과의 유쾌했던 술자리는 공포가 되어 돌아왔다.

A씨에게 유독 과도한 음주를 권했던 B씨. 그가 연신 술병을 기울인 데는 '다 계획이 있었다'.

B씨는 술에 취한 A씨가 비틀거리자 부축을 해주겠다는 핑계로 A씨를 추행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A씨를 인근 모텔로 끌고 가려 했고, 이 과정에서 몸에 상처를 입혔다. 놀란 A씨는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B씨를 고소했다.

함께 술을 마시던 지인 사이에서,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법정에 선 두 사람.

하지만 B씨는 연신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피해자가 동의한 스킨십이었다", "어떻게 상해를 입은 건지 나는 모르겠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긴 싸움 끝에 법원은 B씨가 강제추행을 한 게 맞다며 벌금형을 선고했다. 다만 A씨의 몸에 난 상흔에 대해서는 "추행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면서 무죄 결론을 냈다.

민사소송까지 이어진 긴 다툼⋯위자료 0원이 1500만원으로 뒤집힌 결정적 이유는?
A씨는 다시금 법정다툼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되어버린 신체 피해에 대해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심 법원은 더는 B씨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며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지 3년이 경과해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민법은 누군가 불법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었다면, 손해를 입은 사실과 가해자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 이내에 청구를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제766조). 이 기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돼 더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본다.

1심 법원은 이러한 논리에서 가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앞서 형사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3년이 경과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 이대로라면 A씨는 더이상 B씨에게 추가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돼버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심에서 판도가 뒤집혔다. 2심 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피고가 원고에게 1500만원을 손해배상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간 A씨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연손해금까지 지급하도록 했다.

법원이 태도를 바로잡은건 "아직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는 변호사의 주장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2심에서 피해자를 대리한 황성현 변호사(법률사무소 확신)는 "A씨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최초 범행 시점이 아니라, 형사재판의 첫 결론이 나온 때부터 기산하는게 맞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변론했다.

황성현 변호사는 "앞선 형사재판 당시, 가해자 B씨 측은 자신의 범죄 사실 일체를 부인하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 A씨는 적어도 형사 1심 판결이 선고된 다음에야 자신에게 손해배상청구권이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황 변호사의 논리는 우리 대법원의 태도와도 일치한다. 대법원은 '민법상 손해배상이 가능한 시점'은 청구권자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문제를 인식했을때부터로 기산해야 한다고 본다. 손해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위법한 가해행위가 있었는지, 가해행위와 손해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인과관계가 있는지가 명확해졌을때 비로소 "손해를 알게됐다"고 봐야 한다는 취지다(대법원 2008. 4. 24. 선고 2006다30440 판결 등).

황 변호사는 "가해자 B씨는 A씨를 추행한 것도 모자라 강제로 모텔로 끌고 가 추가 범행을 시도하려 했다"며 "그런데도 줄곧 자신의 범행을 부인했고 잘못을 반성하지도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변호사 선임을 위한 비용은 아끼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범행으로 인해 발생한 A씨의 피해 회복을 위해선 한푼도 줄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황 변호사는 "형사소송에서 가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됐더라도,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는 가능하다"면서 "변호사의 조력을 통해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