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새 왕조 큰 복을 누려 번영할 터전이다”

[시사매거진274호] 조선왕조 정치의 1번지로 손꼽히는 경복궁은 유교적 사상과 이념에 기반해 건축된 법궁(法宮)이며 정궁(正宮)이다. 큰 대문이며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중심으로 남쪽에 관청가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를 조성하고, 그 연장선 위에 중문인 흥례문 안쪽으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주요 궁궐 건물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각 전각마다 유교적 이상주의를 담은 이름을 부여해 조선왕조의 건국 통치 이념을 담았다. 매우 상징적이면서 정치적인 명명이다. 정도전은 경복(景福)’이란 이름을 통해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기원과 의지를 담았다. 그러한 경복궁을 찾아가면 오전 10시경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서 왕실의례에 따라 수문장 교대의식파수의식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조선왕조는 풍수지리 사상에 기반하여 북쪽에 있는 백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남산, 남쪽), 나락산(낙산, 동쪽), 인왕산(서쪽)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수도로 정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거쳐할 5개의 궁궐을 짓는다. 특히 북궐로 지칭되는 경복궁(景福宮)을 개국 4년째인 1395년에 가장 먼저 건축한다. 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며 정치와 법과 제도를 세우던 법궁이며 정궁으로 왕과 왕비, 왕세자만이 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에 반해 동궐은 이궁으로 불리며 창덕궁과 창경궁을 지칭한다. 유교적 사상과 이념보다는 자연형세에 따라 전각과 아름다운 후원을 두었으며 주로 왕대비와 대비, 비빈과 후궁들이 거주하는 생활 공간이다. 북궐에 속한 경복궁이 남성들의 공간이라면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 왕실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법궁이며 정궁인 경복궁이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270여 년간 폐허가 된 채 270년을 보냈다. 1867(고종 4) 흥선대원군 당시 중건하였으며 가장 대표되는 십여 곳의 전각을 다시 세웠다. 그러다가 또다시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이후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조선 초기 계획한 <북궐도>에 따라 경복궁 본래 모습을 복원했다. 당시 왕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외전과 궐내각사들, 왕과 왕비 그리고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전각들, 휴식을 위한 정원 등 500여 동의 건물을 현재까지 차례로 복원 공사 중이다.

흥례문 앞 수문장 교대의식(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법궁인 경복궁’,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실현하다

<북궐도>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조선 초기 때의 경복궁 모습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 후 고종 때 경복궁을 재건했다. 외전, 내전, 동궁은 조선 초기의 모습과 같이 배치하고 그 외에 조선 후기 창덕궁 등을 참조하여 궐내각사, 대비를 위한 전각, 흉례를 위한 전각 등을 조성했다. 또 북쪽으로는 후원을 조성하여 궁전 구역을 확장하였다.

고대 중국의 예법을 조선 왕실의 전통이나 현실과 조화시켜 전체적으로 규칙적 배치를 따르면서 부분적인 변화와 파격을 가미하였다. 재건된 경복궁은 691.921의 광활한 대지에 약 500여 동의 건물을 지어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었다. 중심부에 정무 공간을 두고 좌우 뒤편으로 왕족의 생활 공간, 그리고 곳곳에 정원시설들을 배열했다.

그러한 경복궁에서 중문인 흥례문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근정문과 근정전이다.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이 문무백관과 조회를 하던 곳이다. ‘근정이라는 명칭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복궁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최고의 제1 궁궐이다. 왕의 즉위식이나 조회, 과거는 물론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오늘날 근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867(고종 4)에 중건한 것이다.

일직선상에 놓인 사상전(思想戰, 보물 제1759)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으로 최고통치자인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하가 매일 왕을 배알하던 약식 조회인 상참을 비롯하여 경연, 윤대 등 일상적인 국정운영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사정전 역시 1867(고종 4)에 중건됐다. 과거에는 이곳에 좌우로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재 공터이다. 향후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강녕전(康寧殿)은 왕의 일상생활 공간인 침전으로 연침, 연거지소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왕은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료들과 편안히 만나 국정 현안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865(고종 2)에 중건되었다. 1917년 화재로 창덕궁이 소실되자 희정당 궁건을 위해 옮겨지고, 지금의 강녕전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경회루(慶會樓, 국보 제224)는 왕이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그 외 과거시험이나 기우제 등이 설행되기도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태종 12)에 연못을 새로 만들고 누각도 크게 지었다. 현재의 경회루는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867(고종 4)에 중건한 것이다. 높은 2층 누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인왕산, 동쪽으로 궁궐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며 주위의 넓은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중건 당시 경회루 연못에 두 마리 청동용을 넣었다는 기록이 있는다. 실제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재보수 중이라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수정전(修政殿, 보물 제1760)은 세종 당시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던 곳이다. 궐내각사는 수정전 앞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일본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었다가 1867(고종 4)에 지은 건물이다. 당시의 궐내각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근정전을 관람하는 관광객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내명부 수장인 왕비, 궐안 살림을 총지휘하던 곳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이다. 이곳에서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였다. 1440(세종 22)경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865(고종 2)에 중건되었다. 이후 1917년 화재로 창덕궁 대조전이 소실되자 대조전 중건을 위해 그곳으로 옮겨졌다. 현재의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또한 이곳에 있는 아미산은 교태전의 후원으로 화단을 계단식으로 쌓아 만든 화계(花階).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 6각형으로 된 아미산 굴뚝(보물 제811)’의 벽에는 덩굴무늬, ,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이러한 교태전 우측으로는 자선당, 비현각, 내소주방, 외소주방, 소주방, 생물방, 자경전과 십장생 굴뚝이 있고, 좌측으로는 홍경각, 함원전, 흥복전 등이 위치한다. 그중 자경전(慈慶殿, 보물 제809)1867(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할 때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지은 것이다. 조대비는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중건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고종 25)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자경전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은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든 것이다. 굴뚝 한가운데는 십장생 문양을 구워 박아 넣었고, 위아래로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벽사의 의미를 담았다.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 우측에 위치하는 소주방(燒廚房)은 조선시대 왕의 수라와 잔치음식을 준비하던 궁중 부엌으로 1395(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건립되었다. 소주방은 왕과 왕비의 일상진지를 지어 올리는 내소주방, 궁중의 장치, 고사 음식을 차리던 외소주방, 왕의 간식인 다식, , 떡 등을 차리던 생물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것을 2015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 아래쪽으로 동궁(東宮)이 위치한다. 이곳은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가 활동하는 공간이다. 왕세자는 떠오르는 해처럼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궁의 동쪽에 배치하고 동궁이라 불렀다. 조선 초에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으나 1427(세종 9)에 세자의 안위를 염려하여 궐 안에 동궁전을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고종 4) 중건되었다. 또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구실로 일본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가 1999년에 동궁 일원은 발굴했다.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근정전 내부의 왕좌. 그 뒤편으로 일월오봉도 병풍이 보인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경복궁 역사와 부침을 함께 한, 안쪽 왕실 생활 장소

경복궁의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다. 항상 닫혀 있다가 국가의 위기가 닥칠 때 한 번씩 열린다. 하여 북문이 열리면 국가의 재난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북쪽 신무문 방향으로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은 집경당이다. 그 곁에 온갖 장 항아리가 늘어선 장고가 있다.

또한 뒤쪽으로 조성된 향원정(香遠亭, 보물 제1761)은 궁궐 내 후원 영역에 속한다. 연못인 향원지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위쪽에는 건청궁, 장안당, 복수당, 곤녕합이 있다. 그중 건청궁(乾淸宮)은 향원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873(고종 10)에 건립되었다. 왕의 처소인 장안당,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옥호루로 이루어졌으며 곤녕합은 1895(고종 32)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기도 하다. 1909(융희 3)에 훼철된 후 1939년에 조선총독부미술관이 들어섰으며 2007년에 복원하였다.

집옥재(集玉齋)는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건청궁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891(고종 28)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 협길당 등을 옮겨 세운 것으로 외국 사신 접견 소로 사용하였다. 집옥재는 양옆을 벽돌로 쌓아 전통양식에 중국풍을 일부 가미하여 만든 건물로 좌우에는 팔우정과 협길당이 하나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태원전(泰元殿)1868(고종 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72(고종 9) 태조와 원종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1890(고종 27)에는 신정왕후의 빈전으로, 1895(고종 32)에는 명성황후의 빈전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2005년에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있는 왕실의 생활 처소지만 신무문과 더불어 역사적으로는 가장 슬픈 비운의 공간이기도 하다.

경회루 연지 북쪽에 있는 하향정(정자)과 뱃놀이 하던 작은 배가 보인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오경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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