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랑을 전염시킨 ‘20세기 성녀’ 마더 테레사

   
▲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조국 알바니아를 떠나 빈자의 땅 인도로
마더 테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건물 청부인이요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으로 엄격하면서도 다정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10년대 흉흉하고 복잡했던 유럽 상황 속에 끼인 작은 나라, 알바니아에서 정치 활동을 하던 중 암살 당했다.
이후 남겨진 아그네스의 가족들은 카톨릭 종교 속에 화목한 가족으로 그들의 삶을 가꾸어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옷과 수예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 중 막내딸이던 아그네스의 신앙은 각별했다.
아그네스는 성장기의 대부분을 성당에서 보냈고 자신의 일생을 신의 뜻에 따라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녀는 해외에서 들려오는 선교 소식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아그네스는 소녀 시절 신우회라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예수회 사제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열여덟 살 때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는 이른바 첫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 역시 영국 식민지이던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서는 많은 선교인단을 파견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인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아그네스는 먼저 아일랜드로 사서 영어를 배운 다음 인도로 가서 콜카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6일 콜카타에 도착한 아그네스는 1931년 5월 24일 로레토 수녀로서 허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 외의 ‘테레사’를 수도 명으로 선택했다.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과 테레사를 허원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마더 테레사의 힘과 특징 그리고 목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테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또 다른 임무, ‘부르심 속의 부르심’
마더 테레사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4년에는 교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별로 튼튼하지 못했던 테레사는 결핵에 걸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다릴징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저 신 안에서 평온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것만 같았던 테레사 수녀에게 어느 날 신의 부르심이 들려왔다. 그녀가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46년 9월 10일 기차 안에서였다. 그것은 그녀가 로레타 수녀회를 나와 거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과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종교에 일생을 바치고 있던 테레사 수녀에게 또 다른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훗날 테레사 수녀는 이 일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 그녀가 평생 몸으로 보여준 사랑은 거창하지 않지만 테레사 수녀의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빈민가로 들어가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다

1946년 열차 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뒤 인도의 빈민가로 직접 들어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봉사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길고 지루한 절차를 거쳐 어렵게 교단의 허가를 받아낸 뒤 기초적인 의료기술 등을 습득하자 1948년 빈손으로 콜카타의 빈민가로 들어갔다. 이제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홀로 캘커타의 빈민 거리로 나선 1950년대 인도는 복잡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2차대전 이후 마침내 200여 년 간의 영국 지배를 벗어난 인도는 독립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종교적, 정치적인 상황에 맞물려 여러 곳에서 전쟁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회는 불안정했고, 인도 거리 어디를 가나 난민들이 넘쳐 흘렀다. 그들은 대부분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굶주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갔다.
테레사수녀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지만 처음에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게다가 막 독립을 한 인도에서 영국계 수녀회 출신의 수녀는 반목의 대상이었다.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 주었지만,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테레사 수녀의 봉사의 손길을 선교의 뜻으로 오해하고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수녀회를 벗어나 홀로 인도 사람들 앞에 나선 테레사 수녀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품었던 선교의 뜻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신의 부르심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다. 이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다. 그녀는 사리에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푸른 줄을 새겨놓았다. 그리고 인도의 국적을 취득해 인도인이 되었다.
그녀가 베푸는 봉사와 박애는 이미 카톨릭을 벗어난 더 큰 의미의 종교 같은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처음 5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몸부터 씻긴 뒤 벵골어와 산수, 재봉을 가르쳤고, 봉사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힌두교도인 인도 사람들의 오해와 적대감을 극복하면서 점차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된 그녀는 학교를 더 늘렸다.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든 사람들을 간호하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조용히 임종할 수 있는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집이 만들어지고 나병환자들이 모여 재활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마을이 생겼다.

세계 120여 개국으로 퍼져나간 ‘사랑의 선교회’
그녀의 헌신적인 봉사와 박애를 지켜 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를 마더 테레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테레사 수녀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선교수녀회’가 결성되고 후원 단체도 생겼다.
성 마리아여고의 제자들도 그녀의 활동에 합류하였고, 후원자들도 점점 늘어났다. 빈민가의 어려운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녀의 활동영역은 곧 질병을 앓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버려진 아이들, 나병환자처럼 기피받는 악성 질병자들로 확대됐다. 무료진료소,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인 ‘니르말 흐리다이’,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인 ‘사슈 브하반’, 평화의 마을인 ‘산티 나가르’ 등이 잇따라 문을 열고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독립교단인 ‘사랑의 선교회’가 설립되고, 그 연장선에서 ‘사랑의 선교 수사회’도 결성되었다. 그 뒤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 120여 개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전세계적으로 4천여 명의 수녀들이 참여해 빈민봉사 활동을 벌이는 규모로 발전해 나갔다. 한 수녀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을 섬긴다는 결심를 한 뒤 50년도 채 안 되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마침내 카톨릭 교단에서 인정받았다. 교황도 테레사 수녀의 활동에 감동하였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들어오는 기부금은 통째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고, 본인은 다 낡아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역력한 흰색 사리 하나만을 걸친 채 나병 환자를 씻기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 테레사 수녀가 콜카타에 세운 사랑의 선교회는‘마더 하우스’로 불리우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의 선종 후 선교회가 제대로 운영될 지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난 오랜 기간 동안 선교회는 더 확대돼 더 많은 국가에 병원이 지어졌으며 소속된 수녀도 4천 800명에 750개 이상의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아기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낙태는 자궁 내 살인이다”
마더 테레사는 낙태에 대해 유독 단호했다.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사랑을 느끼고 싶어 한다. 죽어가는 아이가 사랑 속에서 최후를 맞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낙태를 죄악시했다. “아기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낙태는 자궁 내 살인이다. 만약 당신이 아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에게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엔이 정한 아동의 해인 1979년 10월 7일 마더 테레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세계 언론은 “정치만이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준 일대 사건”이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어느 일에서건 자신을 내세우기를 바라지 않는 테레사 수녀는 이 때도 수상행사의 연회를 열지 않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달고 상금 19만 2천 달러 전액을 나환자 구호소 건설기금으로 내놓았다. 상을 받을 때도 ‘사랑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았다. 그렇게 인류에게 깊은 감동을 남기는 삶을 살던 마더 테레사는 1997년 심장병으로 눈을 감았다.
테레사 수녀는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더 나은 의료 시술을 거부한 채 자신이 돌보았던 환자들과 똑같은 치료를 해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1997년 마더 테라사의 임종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던 인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것은 테레사 수녀의 삶 자체가 보여준 희망,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어지는 또 다른 한 면, 숭고함이 저물어 가는데 대한 애도였다.
그러나 그에게 찬사와 칭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신학자들은 “‘가난은 아름답다’는 마더 테레사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비판자들까지 보듬었다. 성녀의 사랑의 샘물은 이승의 삶을 마칠 때까지 차고 넘쳤다. 1997년 87세로 눈을 감기 전 남긴 말. “나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 껴안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랑’이 주는 큰 울림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인도 콜카타(Kolkata)를 비롯 세계 곳곳에 그녀의 사랑의 흔적은 아직도 여전하다. 현재 테레사 수녀가 콜카타에 세운 사랑의 선교회는 여전히 ‘마더 하우스’로 불리우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의 선종 후 선교회가 제대로 운영될 지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난 오랜 기간 동안 사랑의 선교회는 더 확대돼 더 많은 국가에 병원이 지어졌으며 소속된 수녀도 4천 800명에 750개 이상의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테레사 수녀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힌두교 신자인지, 이슬람교도인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절실한 곳에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권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깊이 감동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하면, ‘신부님에게 가보라’고 말할 뿐이었다.
테레사 수녀의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녀가 평생 몸으로 보여준 사랑은 거창하지 않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멀리 있는 이를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밥 한 끼를 나누기는 쉽지만, 외롭고 힘든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을 위로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모든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까운 이들에게는 냉정하면서도, 민족 사랑, 인류 사랑을 외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권한다. “나는 그대가, 당신 가정 안의 가난한 이를 찾아 나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사랑은 거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녀는 또 주는 기쁨을 강조한다. 한 번은 그녀에게 2만 루피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담긴 소포가 전해졌다. 테레사 수녀는 그 돈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20년 넘게 마비 상태로 지내는 남자가 준 15달러는 기꺼이 받았다. 그 돈은 남자가 1주일 동안 담배를 끊어서 모은 돈이었다. 담배는 오른손만 쓸 수 있었던 그 남자의 유일한 낙이었다. 베품은 결코 남는 것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기꺼이 떼어 줄 때, 주는 기쁨은 가슴에 오롯이 새겨진다.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삶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버려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거뒀다. 구더기가 끓고 살이 썩어가는 사람을 만지면서도 수녀는 역겨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믿는 기독교 성경은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환자를 쓰다듬을 때 예수님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세상의 종교들은 하나같이 사랑과 헌신, 나눔과 배품을 강조한다. 국가와 단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의와 평화를 외친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성자(聖者)의 가르침은 언제나 단순하다. ‘사랑은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질 것 없이, 그 자체가 바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증언입니다.’ 진심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각박한 현대 인류사에 끊임없는 자기희생으로 빛나는 정신을 보여주었던 테레사 수녀의 가르침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