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엔 단호하고 주변엔 따뜻했던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주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마지막 말 가슴깊이 새겨야 할 때

지난 16일 밤, 명동성당에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도착했다. 믿을 수 없었던 그의 선종이 현실로 다가왔고 국민들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속보를 전해들은 시민들은 너나 할것 없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었고 그가 가는 마지막을 추모했다.
국민들의 가슴은 먹먹했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향년 87세의 삶을 오롯이 가난하고 핍박받은 이웃을 위해 보낸 그를 위해 우리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음에 뒤늦은 후회가 생긴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김 추기경이 남긴 마지막 말을 실천하며 살 용기조차 없어,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누구와 의논을 할 것인가. 누구에게 길을 물을 것인가. 대한민국의 정신적인 지주, 시대의 양심이었던 그를 떠나보내던 날은… 하늘도 울고 있었다.

명동의 십자가 내려놓고 편히 쉬소서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2월 20일 오전 11시40분, 닷새간의 장례일정을 모두 마치고 40년간 정들었던 명동성당을 떠났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김 추기경의 장례미사는 교황청으로부터 교황의 이름으로 장례 집전 권한을 부여받은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1시간40분 동안 경건하게 진행됐다. 전국에서 올라온 사제와 신자, 내·외빈 900여 명이 좌석을 빼곡히 메웠다.
정 추기경은 우선 “추기경단 일원으로서 여러 해 동안 교황에게 충심으로 협력해 오신 김수환 추기경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한다”는 내용의 교황 추도사를 대독했다. 이어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교황청 대사의 추도사와 한승수 총리가 대독한 이명박 대통령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조문이 끝났지만 이른 아침부터 집결한 1천여 명의 신도들은 명동성당 문화관 코스트홀, 명동성당 마당, 가톨릭회관 마당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장례미사를 봉헌했다.
김 추기경의 관은 지난해 서울대교구에서 서품을 받은 젊은 사제 8명의 손으로 운구차에 옮겨져 오후 1시40분께 장지인 경기도 용인 천주교공원묘지 성직자 묘역에 도착했다. 고인의 관이 운구차 쪽으로 빠져나가자 추모객들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울부짖으며 눈물을 쏟았다. 운구차가 삼일로에 접어들자 인도 행렬을 알아본 시민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편히 쉬세요”, “잘가세요”라고 외쳤다. 그의 고된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장지에는 서울 명동성당의 장례미사가 채 끝나기도 전인 오전 11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김 추기경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칼바람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렸다. 용인 성직자 묘역은 주교묘지 18기, 신부묘지 97기 등 116기가 조성돼 있으며 고인의 자리는 고 노기남 대주교의 옆이다. 장례위원회 허영엽 신부는 “현재 용인 성직자 묘역에 가면 묘지 조성이 안된 곳이 일부 있는데 이곳에 납골묘를 조성할 예정”이라며 “용인 묘역이 꽉차게 되면 순서대로 화장을 해 납골묘에 봉안할 계획이며 이는 신부뿐 아니라 주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수십 년 뒤 주교 묘역이 꽉 찰 경우 김 추기경은 노기남 대주교에 이어 두번째로 용인 성직자 묘역 납골묘에 봉안된다.

DJ, YS 등과 특별한 인연… 전직 대통령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 이어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에는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시국이 어려울 때마다 그의 따끔한 충고가 약이 되었던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큰 어른이 가셔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으며, 남다른 인연을 가진 DJ, YS 등은 더욱 비통해 했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9년 추기경에 임명된 이후 70~80년대 격동의 시대를 겪으며 당대 대통령들과도 다양한 인연을 가졌다.
전직 대통령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야 지도자 시절부터 서로 민주화운동을 상의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추기경은 김 전 대통령이 1976년 명동성당 앞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 직접 면회를 가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했고,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됐을 때 당선 미사를 베풀었다. 김 전 대통령 측은 “군사독재 시절부터 김 추기경은 강력한 지지자였고 후원자였다”며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와 싸울 때나 중요한 결단을 할 때 항상 김 추기경과 의논했고, 신앙인으로서도 정신적 유대가 남달랐다”고 전했다.
민주화에 헌신했던 김 추기경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박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가장 뜻깊은 기억으로 꼽고 있다고 했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금됐을 때 김 추기경은 박 전 대통령을 만나 지 주교를 풀어줄 것과 사형선고를 받은 유인태, 이 철 전 의원 등의 감형을 주장했고, 박 전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김 추기경은 1980년 1월1일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쓴소리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에 김 추기경을 만났을 때 “주위에서도 (권력을) 놓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저는 내놓을 겁니다”라고 말해 권력무상을 실감케 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국가 원로로서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지만 개인적 인연은 깊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추기경은 1992년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되자 “아, 이제 목소리를 높여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또 2003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에는 “노 당선자도 세례를 받았으니 신앙을 다시 찾아 이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고 믿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공식반응은 내놓지 않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김 추기경이 종교와 이념, 계급을 넘어서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된다.

격동의 세월을 사랑으로 녹여낸 김수환 추기경
그의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BOVIS ET PRO MULTIS)’다. 이것이 곧 그의 삶이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옹기장수나 숯장수는 주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위해 택한 직업이었다. 그는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이었다.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에 진학한 그는 당시 교장이던 장면 박사의 추천으로 일본 상지대로 유학을 떠났지만 태평양전쟁에 학병으로 끌려가 전쟁터에서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학업을 마치고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5년간 안동·김천본당의 주임사제, 교구장 비서로 일한 그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64년에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에 임명됐다. 이어 1966년엔 주교로 수품돼 신설 마산교구장에 오르고, 2년 후엔 대주교로 승품돼 서울대교구장이 된다. 다시 1년 후인 1969년엔 만 47세의 나이로 한국 최초의 추기경에 서임된다.
1970~8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이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다. 1971년 성탄절 자정미사에서 그는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TV로 전국에 생방송되는 미사였다. 1972년 8월 9일엔 광복절을 앞두고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 시절 그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부(代父)’로도 불렀다. 엄혹한 시절 종교 지도자로서 할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천주교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게 교계의 평가다. 그러나 그는 “나는 젊은 신부들이 자꾸 시국기도회를 여는 것을 말리는 편이었다”면서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6·10 항쟁 때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
이 말은 김 추기경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에 반미친북(反美親北) 경향이 강해지는 점을 우려하고 북한의 인권 개선과 체제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파와 이념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혼돈을 겪던 국민은 언제나 김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격동의 시절을 고스란히 겪으며 살았던 그다. 새삼 돌이켜보면 김 추기경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이 지금과 같을지 의문이 생긴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살리라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기증을 약속했으며, 선종 직후인 이날 오후 7시2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 수술을 마쳤다. 이는 70대 두 노인에게 기증되어 새로운 빛을 찾아주었다. 두 눈을 기증하고 영면한 추기경이 퍼뜨린 ‘사랑 바이러스’ 덕에 장기 기증 참여자가 30배 늘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홈페이지에 등록된 온라인 기증자는 평소 25명 정도였지만 선종 사흘째인 지난 2월 19일에는 30배에 가까운 740명으로 늘어났다.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히는 전화도 3~4배 늘었다. 그는 갔지만 그의 사랑은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명동성당에 늘어선 40만 명 추모객들 중 가톨릭이 아닌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이같은 엄동설한에 4시간 씩이나 줄을 서서 김 추기경을 조문한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나라의 큰 어른이 돌아가셔서 그런 것일까. 그들은 아마 자신의 삶에 대한 허전함과 막막함을 추기경이 가는 그곳에서 달래려 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한 사람의 죽음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하고 애도했던 일이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참 고단했으리라 생각된다. 나라에 어떤 큰일이 있을라치면 으레 그의 입만 쳐다본다. 그의 말 한마디는 엄청난 사회적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시대의 양심이었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삶이었지만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근심걱정을 버리고 나무 묵주 한 개만을 가지고 하나님 곁으로 갔다. 온 국민의 가슴에 사랑을 심어놓은 채…. 이제 그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고 편히 쉬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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