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정당성 천명, 위엄과 신성으로 단장한 종묘

[시사매거진272호] 조선왕조는 유학(儒學)’을 통치기반으로 건국된 나라다. 당시 고려 멸망을 자초했던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합리화하고, 무신정권의 난립으로 전시상황을 방불케 하던 시대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중국 당나라에서 전래하여 지성인 또는 학식인의 지표로 일컬어지는 유학은 일반인의 선비정신과 더불어 강력한 지도력으로 새 왕조의 정치 이념이 되기에 적합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가(儒家)에서 출발해 유학으로, 다시 성리학이 추가되면서 종교적 성향의 유교(儒敎)’로 고착화되면서 백성의 생활상을 통제하는 데 매우 용이했다.

그러한 정치적 의도와 정신적 푯대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상징적인 것이 바로 종묘(宗廟)’종묘제례(宗廟祭禮)’. 역대 임금들의 혼이 담긴 신주(神主)와 공신들의 위패(位牌) 그리고 칠사를 모시는 사당(祠堂)을 지음으로 확고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유엔(UN) 산하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 역사적 의의와 문화적 가치를 고양하고 있다.

(사진_뉴시스)

서울 사대문 안 최고의 자리는 조선시대 정치와 경제, 행정과 문화를 관장하던 정궁이며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이 차지한다. 이를 중심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묘(宗廟)’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이 위치한다. 왕궁, 종묘, 사직은 유교의 정통성에 따라 한 왕조 국가의 정통성과 상징성을 나타내는 성 삼위일체의 기구다.

이러한 역사문화유적 탐방을 위해 제일 먼저 종로3가역 8번 출구를 이용해 종묘(宗廟)를 찾아가 보았다.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종묘근린공원을 지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으로 들어서자 종묘의 핵심인 정전(正殿)’에 이르는 신로(神路)’가 놓여 있다. 정중앙은 혼백의 길이고, 오른쪽엔 임금이, 왼쪽엔 왕세자가 걸어가는 박석돌길이다. 그 외 신하와 시종은 흙길을 걸었다.

이 신로는 종묘제례 등 의식을 위해 만든 특별한 길이다. 가운데가 약간 높고 양옆이 약간 낮은 세 길 중 가운데는 신주와 향, 축이 들어가는 그야말로 ()의 길이다. 동쪽의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 측의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이러한 신로는 외대문 안에서 정전과 영녕전의 남신문 밖까지는 거칠고 널찍한 박석으로 되어있고, 남신문 안에서 상월대 아래까지는 전석으로 설치되었다.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으로 이어진 다음 정전과 영녕전 동문 안 상월대 아래까지 설치돼 있다. 신하와 제관은 모두 지면 위 흙길을 걸었다.

외대문에서 정전으로 향하는 박석돌로 만든 신로.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외대문에서 정전으로 향하는 박석돌로 만든 신로.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 종묘의 정전(正殿)’

조선왕조는 새 왕조를 건국하며 유교를 통치이념의 근간으로 삼았다. 태조 이성계는 국가의 도읍지에는 반드시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도선 계획 원칙에 따라 왕이 정무를 보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동쪽)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묘를, 오른쪽(서쪽)에는 신에게 제사는 지내는 사직단을 두었다. 그리고 1395929일에 경복궁과 함께 종묘를 완공했다.

이후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3년상을 치른 뒤 신주(神主)’를 종묘로 옮겨와 모셨다. 정전(正殿)에는 공덕이 뛰어난 임금들을 모셨는데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해 고종과 순종까지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모셨다. 이러한 정전은 종묘의 중심 부분으로 긴 정전의 앞에 넓은 월대(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 신문으로는 혼령이, 동문으로는 임금을 비롯한 제관들이, 서문으로는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종묘제례 때 여러 줄로 서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출입했다.

1395(태조4) 당시에는 규모가 신실 7칸이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늘려지어 현재는 19칸에 이르는 매우 긴 목조 건물이 되었다. 그러한 정전의 묘정 월대는 안정을 의미하고, 건물 전면에 무한하게 반복되는 듯한 기둥의 배열은 왕위의 영속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평으로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상징하고, 그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현재 정전은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울러 정전 맞은 편 왼쪽(동쪽)에는 배향공신당(配享功臣堂, 이하 공신당)이 있다. 이곳은 역대 임금들을 보좌한 공신들의 사당으로 총 16칸 규모이며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안에는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모두 83위의 공신 위폐가 있다. 임금의 생존 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1대 태조의 공신 조준(趙浚)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의 공신 서정순(徐正淳)까지 모두 제왕 19위에 해당하는 공신 83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 외 특기할 만한 사항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신주가 배정되었다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이다. 생전에 공적이 많은 사람을 해당 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선정한 것인데 이완용은 을사오적중 하나로 왕조의 수치인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서쪽)에는 칠사당이 있다. 그 옆쪽 서문 밖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을 두었다. 칠사당은 일곱의 작은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기원하는 사당이다.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칠사 국행지신(國行之神, 도로를 주관하는 신), 공려지신(公厲之神, 후사가 없는 제후의 신), 국문지신(國門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중류지신(中霤之神, 당실과 거처를 주관하는 신), 사조지신(司竈之神, 음식의 일을 주관하는 신), 사호지신(司戶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사명지신(司命之神, 사람의 선악에 따라 응보하는 신)으로 봄의 사명과 사호, 여름의 사조와 중류, 가을의 국문과 공려, 겨울의 국행을 이르는 말이다. 사계절에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이를 통해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결합한 국가 의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정묘의 정전 19칸에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가 모셔져 있다. 그 외 특기할 만한 사항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신주가 있다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 하나로 왕조의 수치인 것이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정묘의 정전 19칸에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가 모셔져 있다. 그 외 특기할 만한 사항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신주가 있다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 하나로 왕조의 수치인 것이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별묘 영녕전

영녕전은 1421(세종4)에 정전의 별묘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으로 이성계의 4대조와 정전에서 옮겨온 왕들의 신주를 모셨다. 따라서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비슷하지만 규모가 좀 더 작고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과 같이 2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쪽, 남쪽, 서쪽 세 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에 칸을 만들어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제왕의 신주 16, 왕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그중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는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을 두었다. 이곳에는 정전과는 달리 공신당이 없다.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추존 임금이기 때문에 배향공신이 없을 뿐 아니라 영녕전에 모셔진 후대 임금들이 공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조상에게 올리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쪽 협실과 동쪽 협실에 각각의 공신이 포함돼 총 92명을 배향공신으로 모시고 있다. 현재 보물 제821호이다.

이러한 종묘에는 신위명단 중 폭군으로 낙인되어 각각 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한때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가 세조에 의해 축출된 노산군은 숙종 때 단종으로 복권되면서 신위가 영녕전으로 들어간 유일한 왕이다. 또한 마지막 증축인 헌종 때 이후 마지막 제실에 들어간 왕은 영친왕으로 불리는 의민황태자영왕이다. 이를 끝으로 정전과 영녕전의 제실이 정확하게 딱 채워지게 된다. 이 외 후대에 왕으로 추존된 이성계의 4대조와 더불어 덕종, 원종, 장조, 문조 등 추존왕도 종묘에 모셔져 있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추존왕 문조(효명세자)는 영녕전이 아닌 정전에 모셔져 있으며 황제로 표기돼 있다.

공신당에는 역대 임금들을 보좌한 공신들의 사당으로 총 16칸 규모이며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임금의 생존 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제1대 태조의 공신 조준(趙浚)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의 공신 서정순(徐正淳)까지 모두 제왕 19위에 해당하는 공신 83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칠사당은 사계절에 7신에게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망묘루는 왕이 제향할 때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그 외 부속 궁청과 공민왕 신당의 의미

이러한 종묘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것은 역시 높다란 담장과 외대문(外大門)’이다. 정묘의 정문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불렸다. 정면 3칸짜리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어있고 그 좌우로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 전면 중앙에 돌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노면이 높아져 땅속에 묻혀 장대석 기단만 노출돼 있었다. 2009년 다시 계단을 발굴해 주변을 전체적으로 낮추고 외대문의 계단을 노출함에 따라 오늘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외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위치한다. 왕이 제향할 때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 연못도 조성돼 있다. 또한 그 옆으로는 향대청(香大廳)’이 있다. 제례에 사용하는 향, , 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일자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배치돼 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망묘루 뒤쪽과 향대청 옆쪽으로 공민왕 신당이 붙어있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지을 때 명령을 내려 같이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초상화)이 모셔져 있다. 정식이름은 고려 공민왕 영정봉안지당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준마도 3점이 있다. 조선왕조의 최고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정전 남신문 옆으로는 부석 궁청 중 하나인 재궁(齋宮)’이 있다. 왕이 왕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어재실 또는 어숙실이라고 불렀다. 북쪽에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그리고 전사청(典祀廳)’에는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이곳에 제사용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자 모양의 건물로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 정전 동문 옆의 수복방(守僕房)’은 종묘를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하던 곳이며 그 앞에 찬막단과 성생위가 있다. 찬막단은 제사에 바칠 음식을 상에 올리고 검사하는 곳이며 성생위는 제물인 소, , 돼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용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로 네 면을 담장으로 두르고 남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일각문을 달았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갑다고 한다.

정전과 영녕전 바깥 서남쪽에는 악공청(樂工廳) 2곳이 각각 위치한다. 종묘제례시에 곡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준비하고 연습하며 대기하는 곳이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6,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있다. 또한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3,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보다 규모가 작다.

공민왕 신당은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지을 때 명령을 내려 같이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초상화)이 모셔져 있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용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로 네 면을 담장으로 두르고 남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일각문을 달았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 종묘 & 무형문화유산 종묘제례

유엔(UN) 산하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UNESCO)세계유산무형문화유산그리고 세계기록유산으로 나누어 특정 지역, 역사적 맥락 등에 구애받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와 자연유산을 보존하고 보호하고자 1972년에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 협약(세계유산협약)을 채택했다. 그중 우리나라는 세계유산 14, 무형문화유산 20, 세계기록유산을 16건 보유하고 있다. 그중 종묘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특히 종묘제례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써 정전(正殿)에서 1년에 5, 영녕전(永寧殿)에서는 1년에 2번 왕이 주관하는 국가 최고이며 최대의 종합 행사다. 왕은 물론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하였으며 음악, 노래, 춤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했다. 제사 외에도 종묘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알리거나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을 비롯해 종묘제례악은 장식과 기교를 배제하고, 단순명료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징이 있다. 또한 그 단순함 속에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게 느낄 수 있는 음률과 춤사위가 일상성처럼 더해진다. 그리고 엄숙함 속에는 왕조의 신성한 권위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우리나라의 종묘는 건축물과 더불어 종묘제례에 있어 제사 가무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따라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악 역시 2001년에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행해지고 있다.

전사청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이곳에 제사용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ㅁ자 모양의 건물로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정전과 영녕전 바깥 서남쪽에는 악공청(樂工廳) 2곳이 각각 위치한다. 종묘제례시에 곡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준비하고 연습하며 대기하는 곳이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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