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이어 베트남 국제학교 이장형 선생의 글을 소개드린다.

왼쪽부터 찌엔 주장, 유재호 베트남 초대감독, 하노이 한국국제학교 최광익 교장, 베트남 초대 야구협회장 쩐득펀 , 이장형 선생(사진_헐크파운데이션)

베트남 하노이 꺼우저이(Cau Giay)의 한 공터.

놀랍게도 이 주소를 검색하면 Sports Center라고 표기되어 있다.

주말 오후 이곳에는 많은 베트남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낡은 야구배트와 글러브를 가지고 검은 봉지에 야구공을 넣어서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하나 둘씩 모인다.

사실 매주 목요일 연습장에 비하면 여기는 호사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요일 저녁은 관공서 광장. 가로등 불 밑에서 선수들의 훈련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시력이 크게 좋지 않은 나로서는 공을 척척 받아내는 베트남 선수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몸을 풀기 위해 캐치볼을 시작하면서 하노이 연합팀 주장인 찌엔(Chien)의 눈초리가 매섭다. 롱토스를 하면서 공이 뒤로 빠지면 바로 옆 주차장의 차에 맞게 될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유재호 감독의 펑고에 선수들의 긴장감은 한층 더 높아진다. 듬성듬성 난 풀과 울퉁불퉁한 땅으로 인해 야구공이 어디로 튈지 몰라 땅볼 처리에 민감해진다.

유재호 감독은 오히려 이런 열악한 환경이 선수들의 집중력을 높여 더 효과적 훈련법이 될 수도 있다며 웃으며 이야기하곤 한다. 마땅한 훈련장소가 없어 주차장 옆 공터를 사용하는 궁여지책에 대한 초긍정적 해석이다. 야구의 불모지인 베트남에서는 야구를 위한 제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어지는 타격 훈련. 정식 야구공을 사용하는 타격 연습은 불가능하다. 배드민턴 셔틀콕이 야구공을 대신한다. 한국 회사들이 기부한 수많은 정식 야구공들이 언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배드민턴 셔틀콕을 던지고 치는 타격 연습에도 선수들은 집중해서 타격 스윙을 가다듬기에 열중한다.

이장형 선생(왼쪽)과 하노이 야구 팀의 찌엔(Chien)주장(오른쪽)(사진_헐크파운데이션)

필자가 대학원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하던 20여 년 전이 떠오른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최의창 교수님과 학회에 참가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교수님은 체육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문적 체육교육’을 제시하시고, 더불어 학교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하나로 체육수업 모형’을 제안하셨다.

당시의 학교 체육을 떠올려 볼 때 이는 꽤나 획기적인 흐름이었다. 학회 참석자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정말 훌륭한 이론이지만 학교현장에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이상적인 수업모형으로 현실적으로 학교 현장에 접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풀이 죽은 필자에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사람은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합리적 방어기제를 발현하여 거부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서 그것을 이루는 순간 이상은 곧 현실이 되고, 또 다른 이상이 생겨난다. 우리는 학생들을 ‘참 좋은 사람’으로 양성하기 위한 지금의 이 수업 모형이 이상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되도록 할 수 있다. 어떠한 저해요인이 있어도 개선을 위한 의지와 현장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은 바로 없어지게 된다.” 

힘이 났다. 물론 당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현재는 학교 체육교육의 중심이 되어 지금의 ‘현실’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대체 베트남 야구와 무슨 상관인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 야구를 전파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요즘 그때 마주했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대표를 꿈꾸는 베트남의 야구 선수들은 사업을 하고, 치과의사를 하고, 식당 매니저를 하는 본업이 있음에도 야구 선수가 마치 본업인 것처럼 야구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금성홍기를 가슴에 달기 위한 그들의 열정은 38도가 넘는 더위조차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가올 3월에는 정부기관으로서 베트남 야구협회가 정식 창립총회를 열고, 아시아 야구연맹에 가입을 앞두고 있다. 현재 베트남 최초 야구 교본과 야구 영상 홍보물을 제작하고 유소년 야구대회를 준비하는 등 날개짓을 시작하고 있다.

또한 한국야구의 우수성을 이미 잘 알고 한국의 야구문화를 동경하고 있다. 한류의 바람이 베트남 야구에도 훈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베트남에서 야구를 할 수 있는 충분한 동기와 풍토가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은 앞서 나가고 있지만 현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상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베트남에 정식 야구장이 설립이 시급하다. 조명하나 없는 어둠에서 공을 받아내고, 울퉁불퉁한 그라운드에서 힘겹게 땅볼을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마운드가 우뚝 솟은 곳에서 야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베트남 정식 야구장은 그들의 열정에 뒷받침할 근간이 될 것이다.

경기장이 설립되고, 야구 경기가 치러지고, 야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기꺼이 야구장을 찾는 일이 베트남에서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에서 프로야구장을 들어서며 느꼈던 그 웅장함과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매료되었던 그 설렘을 베트남 사람들이 느끼며 야구로 인해 그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지금은 이상과 현실의 사이 어디쯤에 있지만 시간이 지나 이상이 현실이 되는 그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오늘도 힘차게 베트남 야구를 위해 나아가야겠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