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주 칼럼] 서희는 거란 80만 대군을 어떻게 물리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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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칼럼] 서희는 거란 80만 대군을 어떻게 물리쳤나?
  • 편집국
  • 승인 2020.12.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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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변호사
오병주 변호사

잔혹하고 포악하게 사람을 죽이는 민족,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건국 이후 고려에 닥친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강동 6주와 선물까지 받아낸 서희의 담판에 거란은 서희의 제 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내막에는 고려· 송· 거란 사이에 형성된 보이지 않는 외교적 고리들이 감추어져 있다.

내몽고 자치구에 속한 중국의 작은 도시 임동, 이곳에 세워진 상경 궁터는 그 거대한 규모로 발굴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적 가운데 큰 도로가 9개, 양쪽에는 하수도도 깔려 있었다.

기마 민족이었던 거란은 무기, 군체제, 마술 등에도 능한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정복왕조를 꿈꾸며 요녕에 세운 '백탑'은 지금도 이곳의 상징물이다.

소손녕은 이곳에서 제의를 치르고 고려를 향해 출병을 단행하였다. 그 명분은 거란의 영토인 ‘압록강 유역'을 고려가 침범했다는 것이었다.

왕건 25년에 일어난 한 사건은 거란거병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당시 거란은 낙타 50필과 사신을 고려에 보내 친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사신을 죽이고 낙타를 다리에 매달아 굶겨 죽였다. 이것은 전쟁을 불사한 조치였다. 고구려의 계승의식이 투철한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끊임없이 거란을 적대시하고 북진정책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에 거란은 고려의 ‘버릇'을 고쳐 놓기 위해 출병을 감행하였다.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사람은 서희였다.

그는 호족 중심의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신진세력으로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22세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검교 병부상서'라는 벼슬까지 얻는다. 이런 경력은 그로 하여 국제관계를 꿰뚫는 혜안을 키워 주었다.

서희의 담판은 전세 변화와 관계가 있었다. 거란의 침입 한 달 후, 두 군대는 안융진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고려군의 검차 앞에서 거란의 기마군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 속도전에 강하고, 광활한 대지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거란의 특성이 산악 지형인 고려에서 통하지 않자 소손녕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희는 담판을 걸어왔다.

고려의 땅을 뺏으러 온 거란은 담판 이후 오히려 땅을 내주고 선물까지 바친다. 단지 전장에서의 전세가 바뀐 것만으로 거란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거란이 태도를 달리한 또 다른 이유는 송나라와의 대립 관계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거란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를 틈타 송은 거란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서희는 거란 침입의 본래 목적이 고려와 친교 하여 송을 견제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송과 단교한 뒤에도 고려는 송과 문화교류를 끊지 않았었다. 당시는 거란, 송 그리고 고려와의 힘의 균형을 팽팽히 유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나라로서도 고려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국제관계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용하여 실리외교를 편 서희의 담판은 강대국 사이에서 고도의 외교술을 요구하는 요즘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귀감이 되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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