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 선생의 실학사상 전하다

[시사매거진269호]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 행정의 핵심지인 수도 서울이 달걀 노른자위라면 그 주위를 둘러싼 경기도는 흰자위 같다. 그중 너른 고을 광주시(廣州市)는 경기도의 가장 중앙에 위치해 있어 동쪽으로는 여주시와 양평군, 서쪽으로는 성남시, 남쪽으로는 용인시와 이천시, 북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특별시와 남양주시에 맞닿아 있다.[자료_안용환 순암연구소 소장]

특히 이곳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광주산맥이 휘감고 있어 구릉이 많고 기복이 심하다. 경안천(京安川), 우천(牛川), 탄천(炭川), 세피천(洗皮川) 등의 하천은 모두 한강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곳은 내륙부에 속해 춥고 더운 일교차가 심하고 강수량이 많으며 비옥한 토질로 인해 농산물을 물론 도기와 자기, 토기를 만드는 가마가 발달해 있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도자기를 굽기 위해 광주, 이천, 여주 관요가 위치해 있다.

또한 역사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었는데 그중 조선후기 학자로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오른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 1712~1791)’이 있다. 그는 경세치용의 실학사상을 통해 민초의 삶을 돌본 목민관으로 명성이 높다. 유교 강학 터인 <이택재(麗澤齋)>를 지어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경기도 광주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솟을대문인 영장문 안쪽에 강학당 본채 이택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로 사숙당이 있다. 현판은 후손 안병선이 썼다.
솟을대문인 영장문 안쪽에 강학당 본채 이택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로 사숙당이 있다. 현판은 후손 안병선이 썼다.

목민관 안정복의 이택재, 후학 양성 터

서울역에서 동호대교를 건너 수서-분당 간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성남IC에서 389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텃골길 49에서 순암 안정복 선생의 강학 터인 이택재(麗澤齋)’를 만날 수 있다. 장지동에서 갈마터널 못미처 우측의 국수봉 자락에 위치한 중대동 텃골마을 안쪽이다. 광주시 향토문화유산(유형) 5호다.

광주시 대부분의 동리(洞里)가 그러하듯 초입에는 가호(家戶)가 몇 채 안 될 듯 작은 규모로 보이지만 실제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나뭇가지 형상의 골목길이 발달해 있어 매우 큰 마을을 형성한다. 바둑판 모양의 외국형이기보다는 나뭇가지 모양의 전형적인 한국형 시가지다.

그러한 이곳은, 유교 경전 중 3경에 속하는 <주역>여택태(麗澤兌), 군자이붕우강습(君子以朋友講習)’이란 구절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 뜻은 말솜씨가 곱고 물 흐르듯 윤택한 혀놀림이라 군자가 벗들과 담론하며 배운 것을 익히고 강론한다라는 것이다.

1747(영조 23) 당시 35세의 나이로 안산 성촌(安山星村)에 사는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안정복 선생은 스승의 <성호사설(星湖僿設)>을 집편(集編)한 수제자다.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스승의 가르침과 더불어 <주역>의 양()과 음() 이원론(二元論)을 인간사에 적용하며 후진을 양성하려는 뜻을 두고 강학 터를 열었다.

천지 만물은 모두 양과 음으로 되어 있다. 하늘은 양, 땅은 음, 해는 양, 달은 음, 강한 것은 양, 약한 것은 음, 높은 것은 양, 낮은 것은 음 등으로써 상대되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2가지로 구분된다. 그 위치나 생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태극(太極)이 변하여 음·양으로 변한다. 이 음·양은 다시 8괘인 건(), (), (), (), (), (), (), ()이라는 괘가 되었다. 건은 하늘을 뜻하며 부친·건강을 뜻한다. 태는 연못이며 소녀·기쁨을 뜻한다. 이는 불로써 중녀(中女아름다움이다. 진은 우레로써 장남·움직임이다. 손은 바람으로써 장녀다. 감은 물로써 중남(中男함정이다. 간은 산으로써 소남(少男그침이다. 곤은 땅으로써 모친·()을 뜻한다.

따라서 순암 안정복 선생의 이택재(麗澤齋)’<주역>64괘 가운데 택괴를 설명하는 말로써 두 개의 연못이 잇닿은 것’, ‘서로 이어진 두 개의 연못’, ‘서로 물을 대주어 마르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붕우(친구)와 더불어 강습한다’,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택재의 우측에는 1995년에 건립된 ‘문숙공순암안정복선생숭모비’와 ‘안정복강학소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택재의 우측에는 1995년에 건립된 ‘문숙공순암안정복선생숭모비’와 ‘안정복강학소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순암 안정복 선생의 사상과 강학소 이택재
날이 밝으려 하는 데 네가 잠에서 막 깨어난다.
아침해 동쪽을 비추고 하느님 위에서 내려다보신다.
오직 이 한마음 중도를 읽기 쉽다.
바라건대 조심하여 본연의 양심을 잃지 말라.

해가 이미 중천에 있다. 너는 응당 말설임이 많으리라.
일에는 의리가 있고 마음에는 공심과 사심이 있다.
조심해서 일을 처리하되 반드시 그 기미를 살펴야 한다.
혹시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허물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해가 이미 저녁이다. 너의 일도 쉬력 하는구나.
마음 씀과 남을 대함에는 능히 소홀함이 있지 않았는가.
실수함이 있었다면 두려워하며 반성할 것이다.
잘못된 일이 없었다면 더욱더 자신을 가다듬어라.

날이 어두워지는구나. 네 마음은 점점 게을러진다.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않음을 옛사람은 귀하게 여겼다.
공경은 동과 정에 통하고 성실하면 전일하게 할 수 있다.
()에서 원()으로 회복하듯 다시 또 내일이 있게 될 것이다.’

                                                                         - 순암 안정복 선생 좌우명(座右銘) -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의 한 사람인 순암 안정복 선생이 지은 강학소 이택재는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건물은 1761년 창건 이후 선생이 살아있던 당시인 1786년 정조10에 한 차례 다시 지었으며 약 100년 후인 1880년 고종20에 후손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면 3, 측면 1칸 반의 복조 팔작지붕 건물이다. 또한 전면 퇴칸을 개방하여 제사 지내는 용도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 전형적인 제사 건물의 격식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자역석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는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기둥이나 벽체 윗부분이 도리와 장여 사이에 소로 없이 도리와 장여만으로 된 한식 주택 홑처마를 달지 않고 처마 서까래만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일부 부재를 후대에 교체하면서 약간의 변화가 있다. 하지만 가구 구조나 기둥 크기 등은 조선후기 건축 기법이며 전체적으로 순암 안정복 선생의 검약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택재의 용도를 알려주는 <덕곡서재월삭강회약> 창건과 재건에 관한 기록과 <이택재중수기> 등의 사료가 전하고 있어 실학사상에 근거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순암 안정복 선생의 ‘이택재(麗澤齋)’는 '주역'의 64괘 가운데 택괴를 설명하는 말로써 ‘두 개의 연못이 잇닿은 것’, ‘서로 이어진 두 개의 연못’, ‘서로 물을 대주어 마르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붕우(친구)와 더불어 강습한다’,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학자 순암 안정복 선생의 생애와 정신

순암 안정복 선생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12(숙종 38) 1225일 광주시 중대동 텃골마을에서 몰락한 남인(南人)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부의 벼슬 길을 따라 임지를 떠돌며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0세가 돼서야 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어 조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울산부사를 거쳐 무주로 부임하자 그곳에 은거하며 성년을 맞게 된다.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기억력이 남달라 한 번 듣거나 외운 경문은 잊지 않고 기록했다. 유학(儒學), 경전(經典), 천문(天文), 의학(醫學), 병법(兵法), 종교(宗敎), 지리(地理), 역사(歷史), 역법(歷法) 등에 관한 모든 서적을 두루 읽었고 26세경에는 <치통도(治統圖)> <도통도(道統圖)> 등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29세 때는 <하학지남(下學指南)> <정전설(井田設)> <내범(內範)> 등을 저술하였다.

35세 되던 1747년에는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문하에 들어 경세치용의 실학을 공부하게 된다. 스승의 학통을 이어받아 수제자로서 전력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 유명한 <성호사설(星湖僿設)>을 집편(集編)할 기회를 얻었다. 오랫동안 벼슬을 고사하다가 61세경에 영조의 왕세손인 정조(正祖)를 가르치는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제수받아 그의 스승이 된다.

그리고 50세 되던 해에 고향인 중대동 텃골마을로 돌아와 강학소인 이택재(麗澤齋)’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65세 때에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실학사상을 몸소 실현하기 위해 소읍에 불과한 광주시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자청하여 부임한다. 세금을 감면하고 노역을 줄이며 권농에 힘쓰는 등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백성의 공감을 얻고 이에 감복한 백성은 자연석을 갈아 그의 선정비를 세운다. 현재 천안시 독립기념관 본관 오른편에 보존돼 있다.

그러한 그의 저서로는 <동사강목(東史綱目)> <열조통기(列朝通記)> <임관정요(臨官政要)> <홍범연의(洪範硏義)> <사설유편(僿設類編)> <이자수오(李子粹誤)> <잡괘설(雜卦設)> <광주지(廣州志)> <동약(同約)> <백선시(百選詩)>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 <가례집주(家禮集註)>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육함(六咸)> <목천지(木川誌)> 등 다수가 있고 그 문하에 황덕일, 황덕길 같은 걸출한 실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 <동사강목>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만주로 망명할 때 애독서로 소지한 책이 되었고 <임관정요>는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저서인 <목민심서>의 모체가 된다. 1791(정조 15) 720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뜨자 그의 부음을 들은 정조(正祖)는 스승에 대한 예우를 다하며 특별한 장례품을 하사하는 외에 묘당에서 교문(敎文)을 보내 알리라 하고,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내린다. 아울러 시호(諡號) ‘문숙(門肅)’광성군(廣成君)’에 봉직된다.

안수지 사회부 기자 asj2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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