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이효석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눈에

[시사매거진267호=오경근 칼럼니스트]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이효석문학관>은 우리나라 단편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문학관이 있는 마을 자체가 이효석 문화마을이며 이효석이 태어나 자란 곳이고, 작품의 무대이기도 하다. 문학관은 물레방앗간 뒷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가 터 가는 길목이다. 특히 2002년 개관한 <이효석문학관>은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는 문학전시실, 문학교실, 창작실, 영상실, 옛 봉평장터 모형 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가산 이효석의 훈장과 작품이 발표된 잡지, 신문, 초간본 책자 등 귀중한 자료도 함께 볼 수 있다. <이효석문학관>은 아름다운 외관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며 문학정원, 메밀꽃길, 오솔길이 이어진다. 마을 안에 이효석 생가 터, 물레방앗간, 충주집, 가산공원, 메밀향토자료관 등이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고 해마다 9월이면 메밀꽃 필 무렵 효석문화제가 이곳에서 열린다(사진제공_평창군청, 최주일 사진작가)

강원도 평창군(平昌郡)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영서지방에 속한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영동지방 방언을 사용하고 있고,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정선군과 영월군 등지에 분류되기도 한다. 동쪽은 정선군과 강릉시, 서쪽은 횡성군, 남쪽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과 접하고 있다. 강원도 전체 면적 중 약 8.7%에 해당하는 1463.9의 땅 넓이를 차지한다.

평창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전나무, 새는 원앙이다. 지역 브랜드는 해발 700m 지점이 가장 행복한 고도라는 의미를 담은 ‘HAPPY(해피) 700’이다. 캐릭터 역시 눈사람에 밀짚모자를 씌운 농부 모습의 눈동이(Nundongi)’이다. 특히 이 지역은 설질(雪質)이 좋아 스키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겨울에 눈도 많이 오고,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기온 때문에 동계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평창군의 역사는 단군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자적으로 있다가 위만조선 시대에 위만에 복속되었다. 이후 삼국시대 때는 예국(동예)이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욱오현(郁烏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진흥왕 때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 때 백오현(白烏縣)’으로 개칭하고 명주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백오군에서 현재까지 사용하는 평창군(平昌郡)’으로 개칭된다.

이곳 평창에는 월정사 성보박물관 외에 구룡사 삼장탱화와 보덕사 사성전 후불탱화 등 수많은 불교 미술과 유적지가 존재한다. 또한 대관령삼양목장, 대관령황태덕장마을, 오대산국립공원, 용평리조트, 용항리유원지, 천제당유원지, 한국자생식물원, 합천소유원지, 휘닉스 평창 등 천혜 자연을 이용한 관광지가 발달해 있다. 그중 가장 사랑받는 곳은 역시 이승복기념관과 평창무이예술관 그리고 소설가 가산 이효석을 기리는 이효석문화마을가산공원이다. ·현대사 중에서 평창군의 이름을 가장 넓게 대중화시킨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이곳에서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이효석문학관'은 우리나라 단편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문학관이 있는 마을 자체가 ‘이효석 문화마을’이며 이효석이 태어나 자란 곳이고, 작품의 무대이기도 하다.

고향 상실증을 앓은 가산 이효석의 출생과 가족사

이효석(1907-1942)은 아호가 가산이고 필명으로 아세아 문성을 쓰기도 했다. 전주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으로 19072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서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강홍경 사이에서 1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시후(1882-1945)는 한성사범학교 출신으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 이효석은 <나의 수업시대>에서 부친의 직함을 사관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프랭클린(1706-1790)의 자서전을 편역하였고, 그 후 1912년에 다시 평창으로 내려가 봉평, 진부 면장을 10여 년간 봉직하였다.

모친 강홍경(1889-1962)의 본관은 곡산, 원적은 강원도 홍천군이었다. 1907년에 장남 이효석을 얻은 후 계원, 정원, 계숙 등 3녀를 더 두었다. 강홍경은 언문성서를 탐독하는 옛 성결교단 교회의 집사로 신앙심이 강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거주하다 1962225일에 세상을 떠났다.

부친 이시후 일가의 호적에 의하면 이효석의 모친은 강홍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효석의 장녀 이나미에 따르면 강홍경은 이효석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생모는 충주 출신으로 성씨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들이 다섯 살 되었을 무렵인 1911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린 이효석과 계모 강씨의 사이는 별로 돈독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친은 어린 아들을 약 40km 떨어진 평창읍내 평창보통학교에 입학시켜서 6년간 하숙을 하게 했다.

이효석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에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이렇게 시작된 타향살이는 1942년 평양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22년간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고향 상실증은 그의 창작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효석은 허생원, 조선달 및 성서방네 처녀의 모델로 삼고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을 창작했다. 무엇보다 '메밀꽃 필 무렵'은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지역을 소상히 알 뿐 아니라 그 지역에 대한 애정까지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다.
이효석은 허생원, 조선달 및 성서방네 처녀의 모델로 삼고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을 창작했다. 무엇보다 '메밀꽃 필 무렵'은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지역을 소상히 알 뿐 아니라 그 지역에 대한 애정까지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다.

봉평에 대한 애정과 실화를 소설로 승화시키다?

가산 이효석은 1910년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기까지 약 3년을 봉평에서 살았고, 1912년에 다시 봉평으로 내려온 후 보통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서당에 다녔다.

이러한 봉평시절에 대한 그의 기억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훗날 그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의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몇몇 인물에 관계된 것들이다. 그가 서당에 다니던 시절에 봉평에는 충주집이라는 주막이 있었고, 이효석은 그의 글동무들과 함께 싸온 도시락을 이 주막에 맡겨 놓고 먹곤 하였다. 송씨라는 얼굴이 고운 여인이 주인으로 있던 이 충주집에는 장날마다 봉평에서 드팀전을 벌리던 곰보영감이라는 장돌림이 드나들며 주인과 사랑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곰보영감 장돌림의 성씨는 허씨였다.

그리고 이 허씨와 함께 장을 돌던 사람으로는 조봉근이라는 기골이 장대한 장사꾼도 있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허씨가 봉평장에 드나들 무렵 봉평에는 조중원이라는 젊은이가 있어서 충주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장돌림이 아니었다. 봉평에서 이효석의 집안과 아주 가까이 지낸 인물로는 성공여라는 사람과 그의 딸 옥분이가 있다. 집안 형편이 기울자 성씨 일가는 충북 제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옥분이가 허씨와 물방앗간에서 인연을 맺은 일이 있다는 소문이 충주집에서 흘러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효석은 훗날 이런 인물들을 허생원, 조선달 및 성서방네 처녀의 모델로 삼고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을 창작했다. 무엇보다 <메밀꽃 필 무렵>은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지역을 소상히 알 뿐 아니라 그 지역에 대한 애정까지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다.

가산 이효석은 1910년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기까지 약 3년을 봉평에서 살았고, 1912년에 다시 봉평으로 내려온 후 보통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서당에 다녔다. 봉평시절에 대한 그의 기억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훗날 그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의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몇몇 인물에 관계된 것들이다. 그가 서당에 다니던 시절에 봉평에는 충주집이라는 주막이 있었고, 이효석은 그의 글동무들과 함께 싸온 도시락을 이 주막에 맡겨 놓고 먹곤 하였다.
가산 이효석은 1910년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기까지 약 3년을 봉평에서 살았고, 1912년에 다시 봉평으로 내려온 후 보통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서당에 다녔다. 봉평시절에 대한 그의 기억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훗날 그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의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몇몇 인물에 관계된 것들이다. 그가 서당에 다니던 시절에 봉평에는 충주집이라는 주막이 있었고, 이효석은 그의 글동무들과 함께 싸온 도시락을 이 주막에 맡겨 놓고 먹곤 하였다.

가정과 문학 그리고 예술혼 남긴 평창

19317, 가산 이효석(24)은 이경원(17)과 결혼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번지에 신접살림을 차린다. 그녀는 1914년 함경북도 경성의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나남여고를 졸업한 재원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이효석이 이경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친구와 함께 어느 미술전시회에 가서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이후 그녀의 오빠 이희정과 친분이 있었던 경성제일고보 선배 박최길의 소개로 만나 정식교제를 시작한다. 이후 동성동본이란 장벽에 부딪혔으나 끝내 결혼하여 22녀를 낳게 된다.

특히 이효석은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난 후 한때 생활고를 겪었지만 이경원과 결혼한 이듬해에는 경성농업학교에 부임하며 교직생활을 시작한다. 이효석의 친구였던 현민 유진오는 그녀에 대해 회고하면서 가산이 현대식 생활양식을 갖추어 그의 식성이 까다로운 데도 남편의 취미를 잘 이해하고 잘 도왔던 상당히 영리한 여자였던 것 같다고 전한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서 이효석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돌입한다. 이어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한 역작들을 다수 창작·발표하며 문학적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1940222일 평양에서 부인 이경원과 차남 영주가 차례로 사망하며 좌절을 겪게 된다. 이어 19425, 가산 이효석도 결핵성 뇌막염에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은 525일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는 35세 때다.

그의 부친 이시후는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여 고향인 강원도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1973년 도로 개설로 인해 그의 묘지는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변으로 옮겨졌다. 19989월에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될 때 다시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가산 이효석 사후 1959년에는 춘조사, 1971년에는 성음사 그리고 1983년에는 창미사, 201612월에는 이효석문학재단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이 공동 작업으로 이효석 결정판 정본집을 발간했다. 그중 <> <> <> <메밀꽃 필 무렵> 등의 소설과 <낙엽을 태우면서> <화초> <청포도의 사상> 등 수필이 1948년부터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현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효석문학관은 아름다운 외관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며 문학정원, 메밀꽃길, 오솔길이 이어진다. 마을 안에 이효석 생가 터, 물레방앗간, 충주집, 가산공원, 메밀향토자료관 등이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고 해마다 9월이면 ‘메밀꽃 필 무렵 효석문화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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