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가출을 꿈꾼다!'- 집 나가는 가출성인 급증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 흔들리는 가정 해체에 따른 사회문제 양산
인간은 가정을 이루고 산다. 가정은 삶의 보금자리이고 안식처. 어찌 인간뿐인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다. 괴테는 “임금이든 백성이든 가정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고 말했다. 가치관이 많이 달라진 오늘에도 유효한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가정은 흔들리고 있다.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생활고, 급증하는 이혼 등으로 가정이란 둥지가 파헤쳐지고 있다. 가족 동반자살, 자녀 방치, 그리고 가출 등으로 우리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의 건강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도심을 배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노숙자들의 처지는 흔들리는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최근 장기불황으로 가계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성인 가출이 매년 크게 늘고 있다. 경제적 불황과 가족 유대감 약화 등 이유로 집을 나가는 이른바 ‘가출 성인’ 이 해마다 크게 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집을 나간 만 20세 이상 성인은 모두 4만7천254명(실종자 제외)으로 전년도 4만5천634명에 비해 3.5% 증가했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불황에 빠졌던 1998년 외환위기 때 2만5천170명에 비해서는 거의 배로 늘었다.
성인 가출은 1998년 이후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여서 1999년 3만1천906명, 2000년 3만9천628명을 기록한 뒤 2001년에는 4만명을 넘어 4만3천43명에 달했다. 가출자 수는 경찰에 신고된 사람만 집계됐기 때문에 실제 가출한 사람 수는 경찰 집계를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
반면 청소년 가출은 1998년 1만5천316명을 기록한 뒤 2001년 1만8천276명으로 해마다 1천명씩 늘었지만 2002년 1만4천865명으로 급감하고 지난해에는 1만3천374명으로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결국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됐던 청소년 가출은 2002년을 고비로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어른들의 가출은 급격하게 늘고 있는 셈이다.
경찰 관계자는 “생계형 절도가 늘어나는 데서 보듯 경제적 어려움과 이혼율 증가에 따른 가정 불화 등이 주된 가출 이유” 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김혜란 교수는 “외환위기에 따른 문제로 좁게 설명하기에는 지금까지 성인 가출자가 계속 증가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며 ‘신용불량자 양산이 더 큰 원인 ‘이라고 지적했다. 신용불량이 가정 불화를 일으키고 결국 빚을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가장이 집을 나가 가정을 보호하려 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최근들어 이혼이 늘어나면서 부부 중 한명이 말없이 집을 나가는 경우도 있어 가출자가 늘었을 것” 이라고 덧붙였다.

가출을 꿈꾸는 사람들
“저는 새장에 갇힌 새였습니다. 훨훨 날고 싶어서 집을 나왔습니다.”
주부 김영순씨(37·가명)는 6월 초 가출해 열흘 동안 충남의 한 공동체 마을에 머물렀다. 결혼 후 11년 동안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살면서 겪은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정신병원 신세까지 진 후였다.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두 딸을 둔 김씨는 “이제는 시골에 집을 얻어 딸들과 함께 살며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지낼 것” 이라며 “시집살이 기간은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의 이민생활 같았다. 다시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 고 말했다.
2001년 결혼한 박민호씨(33·가명)는 멋모르고 쓴 카드빚이 8000만원을 넘어서자 지난해 겨울 임신중인 아내를 처갓집에 보낸 후 집을 나왔다. 3000만원짜리 전세방을 빼서 빚을 일부 갚은 후 ‘도망자’ 신세가 된 그가 살고 있는 곳은 그의 티코 승용차 안. 연락처도 없이 지내며 계속 도망다녀야 하는 그는 현재 디스크를 앓고 있다.
30대 후반의 회사원 이영민씨(가명)는 회사 앞 고시원에서 살았던 경우다. 결혼 후부터 계속된 처가와 본가의 갈등에 진력이 난 그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술 먹고 늦게 귀가하고, 그 때문에 아내와 다투고 또 술을 먹는 생활을 반복하다 무작정 집을 나와 회사 근처의 고시원에 방을 잡았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생활까지 자유로워지니 마음이 편했다” 던 그의 ‘도피’ 생활은 그러나 두어 달 만에 아내에게 들켜 끝이 났다. 지금 임씨는 다시 집에 들어가 있는 상태. 그러나 그는 “가출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언제든 다시 가출할 마음이 있다” 고 말했다.
이처럼 집 나가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가출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보다 집 나간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는 청소년들이 세 배 이상 많은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유도 카드빚 독촉 등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가정폭력, 자아실현 욕구까지 다양하다. 그냥 이것저것 다 싫고 귀찮아서 나간다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경제난 주원인, 가출 여성 상당수 노래방 도우미로 생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가출자의 70% 이상이 20세 이상 성인들이며, 특히 30대가 다수를 차지했다. 2002년 전체 가출자 6만3370명 중 20세 이상 성인이 4만5634명으로 72%를 차지, 10대 청소년 가출(1만4865명)에 비해 세 배 이상 많았다. 성인가출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1998년 2만5170명이던 것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고 전체 가출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3%에서 72%로 높아졌다.
가출동기는 부부싸움 등으로 인한 가정불화가 1만869명으로 가장 많았고, 불륜 등 남녀관계(2093명), 정신질환(1787명), 배우자의 무책임(1597명), 가난(1196명) 등의 순이었다.
연령별로는 30대가 1만4582명(31%)으로 가장 많았고 20대(1만3058명), 40대(9915명)가 뒤를 이었다. 직업별로는 무직자(1만3533명), 주부(1만2286명), 회사원(3655명) 순이었다. 특히 가출한 뒤 끝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은 미귀가자는 1만6881명으로 1년 전(1만912명)보다 60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수치도 모든 가출자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경찰 집계는 적극적으로 가출자를 찾으려는 가족들의 신고 건수만 더한 것이기 때문이다. 카드빚이나 가정불화 등으로 가족이 가출한 경우 대부분 신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가출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남성의 전화 이옥 소장은 이에 대해 “요즘은 가출이 유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심지어 일부 가출자들은 수천만원씩 카드빚을 지고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차압이 들어오기 직전 가출해버려 남은 가족들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신용불량자가 됐던 경험이 있는 석승억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 대표는 “우리 사회는 카드빚 채무자들에게 빚을 갚을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빨리 빚을 갚으라고 강요만 하고 있다. 결국 자포자기한 이들이 자살하거나 노숙, 가출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 이라며 “가정 해체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부조리한 사회” 라고 꼬집었다.
가출했다고 해서 그들 앞에 편안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든 사례의 이영민씨처럼 ‘편안한 삶 ‘을 위해 집을 버리는 화이트칼라 가출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가출자들은 여인숙이나 친구집을 전전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가출 여성들이 흔히 가게 되는 곳은 노래방. 이들은 ‘노래방 도우미’ 로 취직해 노래를 불러주고 술시중을 들면서 시간당 2만원씩을 받아 생활을 꾸려나간다. 남자들은 결혼 전 본가나 고시원, 회사 사무실, 승용차 등에서 산다고 한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모씨(53)는 ‘경기 불황으로 사업이 어려워진 후 아내로부터 심한 욕설을 듣고 폭행을 당해 가출했다’ 며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집 밖 생활이 힘들어 집에 들어가고 싶지만 아내가 무서워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 고 호소하기도 했다.
사실 남자들의 경우 여자들보다 불심검문에 걸리는 경우가 많고 예비군이나 민방위 훈련 등 걸리는 문제도 많아 가출과 도피 생활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이 집을 뛰쳐나오는 것은 집 안에서의 삶이 더 이상 행복하지도, 편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통계에도 나타나듯 30, 40대는 위험한 시기다. 가정에 권태감을 느끼기 쉽고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는 시기이기 때문. 이옥 소장은 ‘남성은 40대 초반, 여성은 30대 후반이 위험한 연령이다’ 며 ‘이 시기를 잘 보내야 행복한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 고 말했다. 가출은 이혼으로 연결되는 수가 많아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상담 건수의 9.6%인 428건이 배우자 가출로 인한 이혼상담, 부양의무 청구 등에 대한 문의였다. 특히 남성 상담자의 23.5%, 여성 상담자의 7.3%가 배우자 가출 때문에 상담을 의뢰한 경우였다.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의 경우 2001년 9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의뢰받은 9000건의 상담 가운데 남성은 7.6%, 여성은 4.2%가 배우자의 가출로 상담을 의뢰해온 경우였다. 여성의 경우는 보통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가기 때문에 가출이 이혼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높다.
이처럼 성인가출은 이혼의 단초가 되거나 부모 모두의 가출로 이어져 소년소녀 가장을 양산한다. 또한 이러한 가정의 자녀들은 생계 문제 혹은 정서적인 이유로 학업을 포기하고 부모처럼 가출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가정해체를 가져오고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가정해체에 따른 부작용 심각
특히 성인가출의 경우 본인의 의사로 귀가하지 않는 한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가족들을 안타깝게 한다. 또 가출신고를 해도 청소년과 달리 경찰이 적극적으로 가출자들을 찾아다닐 수 없는 형편이다. 성인가출 신고 건수가 많은 편인 서울 강서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성인가출 신고는 오히려 이혼하는 데 증빙자료로 이용될 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며 “신고를 받아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수 없고 사건사고가 나야 확인이 가능하다” 고 말했다.
가출은 문제의 해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하는 수가 많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유경애 상담위원은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황당할 뿐이다. 잘잘못을 떠나 당장 생활상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버림받았다는 느낌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결국 가정은 해체되고 만다” 고 말했다.
대개 가출은 사소한 일로 자존심이 상해 뛰쳐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해할 구실이 생기지 않으면 바로 이 자존심 대결 탓에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가정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가출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문제는 집 안에서 풀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정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다. 가정은 자신의 문제를 더 꼬이게 하고 힘들게 하는 문제의 원천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시대의 변화를 가정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등이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이상적 가정과 현실의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다 가출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

가부장제 사회 '가출에 한몫'

전문직에 종사하는 30대 중 ‘후반 부유층 남성들 중에 아무 이유 없이 집을 나가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집이 위로가 안 되기 때문에 나간다고 말한다. “집에 오면 아이 봐줘라. 집안일 거들어라. 담배 피우지 마라. 온갖 잔소리에 오히려 피곤해진다. 혼자 살고 싶다” 는 것이 그들의 항변이다. 집에는 생활비를 두세 달 정도 송금해주다가 연락을 끊기도 한다. 그런 경우 대부분 결말은 이혼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가출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가출의 원인이 주로 가정폭력이나 남편의 불륜이었다면 요즘에는 카드빚이나 삶의 스트레스, 자아실현 등 더욱 다양해졌다.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은 ‘성인가출 유형이 다양화하면서 옛날에 없던 새로운 양상들이 드러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가부장제하에서의 이중적 의식에서 비롯된다 ‘고 진단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어떤 경우에든 남성이 경제적 책임을 떠맡아야 하고, 여성은 가사와 아이들 교육을 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사회가 변하면서 이런 역할이 뒤바뀌기도 하고 서로 역할을 분담하기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아내가 돈을 벌고 남편이 가사를 맡는 식의 역할 분담도 이뤄져야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자존심 싸움을 할 경우 가출이나 이혼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출은 가부장제 사회라는 ‘새장 ‘에 갇혀 힘겹게 살아가는 성인 남녀의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한계 계층' 대책 시급
전문가들은 ‘정부가 대기업 노조나 정규직 근로자들과 달리 경제력이 취약하고 파업조차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 라고 강조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책임연구원은 ‘인천 3자녀 동반자살은 벼랑으로 몰리고 있는 극빈층들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면서 ‘직업과 소득 등 빚을 상환할 능력이 확실해야 신용회복(워크아웃)의 길을 터주는 현행 신용불량제도부터 개선해야 한다 ‘고 제시했다.
형사정책연구원 최인섭 연구실장은 “자살은 물론, 강도 등 강력범죄 추이도 IMF 사태 때와 비슷한 모습”이라고 지적한 뒤 “자녀를 소유물처럼 여겨 동반 자살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생활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사회도 문제” 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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