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배드뱅크’로 구제 “실효성 있나” 원금 3% 갚으면 일단 ‘불량’ 면제… 도덕적 해이 커질 수도
신용불량자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다시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경보음이 요란한 가운데, 정부가 해법을 내놨다. 올해안에 백만명 가까운 신용불량자를 구제하겠다는 데, 신용질서를 회복시킬 묘수인지, 총선용 선심쓰기인지 주목된다. 재정경제부의 발표 내용을 정리해봤다.

신용불량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밑그림이 그려졌다. 개별 금융사 자체처리(1개 금융회사에 등록된 신불자)→금융사 공동처리(다중 채무자)→법원에서의 처리라는 3단계 방식이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달 10일 ‘3단계 절차를 밟되 빚을 깎아주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 빚을 갚을 의지를 가진 신불자에게는 신불자 딱지를 뗄 수 있도록 길을 터주되 도덕적 해이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새로 도입되는 배드뱅크는 빚 갚는 시간을 늘려 문제를 뒤로 미룬 미봉책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신용불량자 3단계 해결방안
한계 상황에 몰려 신불자로 등록될 위기에 처한 채무자는 은행이 채무 재조정을 통해 구제해준다. 지금은 은행 창구에서 30만원을 3개월 이상 연체하면 무조건 신불자로 등록된다. 앞으로는 금융회사별로 심사기구를 만들어 채무자의 상환의지, 수입 등을 감안해 만기를 연장해준다.
이미 신불자가 된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1개 금융기관에 등록된 신불자(137만명)에게는 만기 연장을 해주거나 일정 기간 거치 기간을 줘 신용을 회복할 시간을 준다.
문제가 가장 심각한 다중채무자들은 ▶개인워크아웃(신용회복위원회) ▶다중채무자 공동채권추심프로그램 ▶배드뱅크를 통한 신용회복 제도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이 같은 민간 차원의 해결이 안되면 최종적으로 법원에서 처리하게 된다. 우선 지난 2일 법이 통과돼 9월부터 도입하는 ‘개인채무자회생법’ 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최장 8년간 채무를 분할 상환하고 변제 계획을 완료하면 남은 빚은 없어진다. 이조차 안되면 법원에서 개인파산을 선고하게 된다.
정부는 ‘3개월 이상 연체’ 라는 단순 금융정보가 경제활동 제약인구를 양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14만5000명의 세금체납자를 신용불량자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신용불량 해제 후에도 기록이 남아 금융거래 제한 등을 받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후기록을 개인신용평가회사(CB)에만 제공해 개인신용평가시 기초자료로만 활용하도록 할 방침이다.
청년층이 100만~200만원 미만의 소액연체로 취업기회가 원천적으로 제한되지 않도록 고용목적의 신용정보는 한시적으로 제공하지 않게 할 계획이다. 단순한 신용불량정보가 경제활동 전체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신용불량자 공동관리 ‘배드뱅크’
이르면 6월부터 가동될 배드뱅크는 다중채무자 중 일정기간(3~6개월) 5000만원 미만을 연체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설립 준비기간 등을 감안할 때 하반기 신불자들로부터 신청받게 될 전망이다.
이 기준에 들었다고 모두 대상자는 아니다. 배드뱅크와 금융회사가 협약을 통해 빚을 갚을 의지와 능력이 있는 대상자를 확정한다. 다중채무자가 배드뱅크를 이용하려면 원금의 3%를 먼저 갚아야 한다. 이 돈을 내는 즉시 신불자 딱지가 떨어진다.
가령 A씨가 2개 카드사에서 빌린 2000만원의 연체금 때문에 신불자가 됐다면 60만원만 배드뱅크에 내면 신용이 회복되고 나머지 원리금은 대출금으로 바뀌어 최장 8년에 걸쳐 배드뱅크에 분할 상환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배드뱅크는 1940만원을 2개 카드사에 대납하는 대신 A씨의 채권을 넘겨받고 A씨에게서 추후 상환받는다. 금융사는 남은 97%의 채권을 배드뱅크에 매각하거나 출자금으로 쓴다. 배드뱅크는 이 빚을 넘겨받아 채무자와 최장 8년이 걸리는 상환계획을 짠다.
금융회사는 부실채권을 털어내는 대신 이 채권을 배드뱅크 출자금 등으로 바꾸게 돼 대손충당금 적립 부담이 줄어든다. 배드뱅크의 초기 운용자금 5000억원은 자산관리공사가 채권을 발행해 조달할 예정이다.
정부는 기존 신용회복위원회가 운영하고 있는 개인워크아웃과 LG증권과 산업은행이 지난해부터 주관해온 다중채무자 공동채권추심프로그램도 여타 신불자의 구제창구로 활용할 예정이다. 정부는 올해 이 두 프로그램에서 각각 20만, 10만명 배드뱅크를 통해 30만명을 구제할 계획이다.

근본대책 아닌 미봉책으로 끝날 수도
배드뱅크를 통해 신불자에서 벗어나더라도 소득이 없으면 최장 8년간 빚을 갚기가 힘들다. 결국 채무자 입장에서는 금융회사에 진 빚이 배드뱅크로 옮겨간 것 외에 별 차이가 없다. 물론 신불자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신불자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취직 등을 통해 소득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채무자들이 소득을 올리지 못하면 이번 대책은 미봉책이 될 우려가 있다.
도덕적 해이가 커질 수도 있다. 실제로 배드뱅크의 빚을 갚지 않고 버티면 다시 신불자로 등록하는 것 외에는 달리 제재할 방법이 없다. 결국 최장 8년간 시간을 끌어 신불자 숫자만 줄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배드뱅크와 관련, 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빚의 3%만 내면 신용불량자에서 빼내주는데 누가 빚을 갚으려 하겠는가” 라면서 “배드뱅크를 제안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그 취지가 크게 변질돼 사기당한 기분” 이라고 말했다.
금융계에서는 여러 금융기관에 빚을 진 신용불량자 중 상당수가 개인 사채(私債) 등을 동원해 일단 3%를 갚아 신용불량자를 면한 뒤 다시 채무 상환을 회피하는 사례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하나 큰 문제는 신용불량자 구제의 부담이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배드뱅크에는 참여 금융기관들 외에 정부 기구인 자산관리공사도 최대 5000억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따라서 나중에 배드뱅크의 채권 회수가 예상보다 저조할 경우 금융기관과 자산관리공사의 부실이 커지고 배드뱅크에 추가로 공적자금이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가 제시한 신용불량자 감축 목표도 ‘과장 ‘됐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개인워크아웃 희망자의 상당수가 배드뱅크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은 데도 개인워크아웃을 통한 신용불량자 감축 목표를 20만명으로 잡은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세금 체납자를 신용불량자에서 제외키로 한 것도 수치를 줄이는 착시(錯視)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경희대 권영준 교수는 “총선을 의식한 인기 대책이며 근본적 처방이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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