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화합·소통을 꿈꾼 백제 무왕의 옛터

무왕의 유토피아, 백제 미륵사지

익산은 발길 닿는 곳마다 백제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미륵사지에서 백제 왕궁터에 이르는 여정은 어느 순간 천년 고도(古都)의 옛터로 이어지는 장관을 이룬다.

익산 백제 미륵사지 정경(사진-왕궁리유적전시관)

마한(馬韓)의 옛터,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펼쳐진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꿈이 서린 곳이다. 백제 무왕2년(601)에 창건된 미륵사는 웬만한 대학 캠퍼스 면적의 땅위에 조성된 사찰로, 당대 백제의 수도와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공간으로도 이름이 높다.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미륵사지는 왕의 자리에 오른 서동과 왕비가 된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가 전해오는 곳이다. 백제의 옛터에서 시작된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슬아슬하면서도 짜릿한 스캔들은 당대 최고의 화제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능가하는 세기말의 로맨스, 그 주인공인 서동과 선화 사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높이 14.5m, 폭 12.5m, 무게 1,830톤) 우리나라 최대의 석탑/서철원

무왕은 백제가 지닌 한류(韓流)의 기운을 한 몸에 지닌 인물이다. 역사를 넘어 신화가 된 무왕은 아이돌 스타일의 신상 갑옷에 긴 칼과 활을 차고 당대를 누빈다. 운봉고원에서 아막성(阿莫城) 일대를 거침없이 달리던 옛 왕의 눈에 세상은 갈 곳 멀고 할 일 많은 곳이었을 것이다.

멀리 눈 내리는 허허벌판을 바라보며 무왕이 꿈꾼 유토피아는, 그토록 원하던 ‘미륵(彌勒)’의 세상으로 이어진다. 모두를 향한 평등과 화합과 상생을 꿈꾸던 미륵 세상은 무왕만의 유토피아를 넘어 세상의 최고 가치인 휴머니즘을 품은 백제만의 ‘다른 세상’으로 건설된 특별한 공간을 선사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미륵사지 기념탑/서철원

푸코(Michel Foucault)는, 인간의 삶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개념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정의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물질세계의 공간을 넘어 역사 텍스트에 존재하는 실제적 ‘장소’로서의 공간을 의미한다.

미륵사지, 백제 왕궁터에 남은 무왕의 헤테로토피아는 단 두 줄의 시에 의존해 미륵의 본질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돼 상생과 공존의 세상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에 실린 <서동요(薯童謠)>의 내용이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요>에 담긴 무왕의 스토리는 익산 미륵사지에 서사적 뿌리를 내린다. 이 하나의 노래로 무왕은 신라와 관계를 적대적 관계가 아닌, 평화 프로세스로 이어가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현재 시점에서의 남북관계에 대한 미래 예측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무왕의 <서동요>는 익산과 서라벌, 두 나라를 향한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백제시대 미륵사에 세워진 3기의 탑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의 야간 정경/서철원

서동과 선화의 러브스토리에서 시작된 나라와 나라 간 공존의 프로세스는 지금에 와서도 유효하다. 여기에는 국가 차원의 평화적 담론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은 무왕이 꿈꾸던 ‘미륵’의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
 

백제의 혼, 왕궁리 유적

역사와 설화와 신화 사이에 서 있는 서동과 선화. 고증과 이야기와 뒤섞인 방대한 스토리텔링으로부터, 서로는 40년 넘게 이어져 온 백제와 신라의 대립이 사라지길 원한다. 그 흔적은 왕궁리 5층 석탑 남쪽에 설립된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찾을 수 있다.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5석탑은 백제 무왕의 유토피아를 짐작케 하는 문화유산으로 이름이 높다. 백제 무왕이 남긴 금제품을 비롯해 유리제품, 수부(首府)명 인장와, 전달린토기, 연화문 수막새, 토기 등의 유물들이 천년의 역사를 품고 긴 잠에 빠져 있다.

왕궁리 5층 석탑은 백제 문화의 부흥과 우수성을 엿볼 수 있는 세계유산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유물(사진-왕궁리유적전시관)

무왕은 승하 후에도 백제의 민습과 백성의 생활방식을 익산 왕궁리 곳곳에 남겨 두었다. 2009년 미륵사 석탑을 조사하던 중 심주석 윗면에서 사리공은 발견된다. 사리공 안에는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의 사리 부장품이 현재까지 원형을 잃지 않고 오랜 시간을 묵묵히 지켜왔다.

왕궁리 유적 발굴을 통해 채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왕궁리유적전시관’엔 당대의 문화적 위치를 가늠케 하는 화려한 금장식에서 유리제품과 이를 만들어내던 각종 도가니가 전시되어 있다.

미륵사지 사리공 부장품 가운데 유리제품은 당시 첨단을 걷던 백제의 제련기술을 보여준다. 전시물 가운데 유리옥은 매끄러우면서 윤이 나며, 투명한 광채가 백제의 공업적 우수성을 말해준다. 백제의 예술적 기호와 맞물린 공업적 유산은 천년이 넘도록 땅속에 묻혀 유장한 역사 속을 지나 현재에 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왕궁리 유적전시관에 전시된 백제 유물(사진-왕궁리유적전시관)

미륵의 유토피아로부터 후세를 기약한 무왕의 뜻은 백제 제련(製鍊)의 공업적 소산과 통한다. 무구(武具)의 정밀성과 연금(鍊金)의 신비를 과감히 드러낸 백제의 제련기술은 현대 기술에 버금가는 최상의 하이브리드 유산으로 꼽힌다.

이와 함께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는 백제 문화 특유의 부드러우면서 섬세한 인장 와(瓦)와 명문 와(瓦)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수막새, 전달린토기, 등잔, 대형토기 등 1,400여 점의 왕궁리 유적의 산물과 만나면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백제의 옛터로 돌아가게 된다.

왕궁리유적전시관에 전시 중인 백제 유물과 무왕 관련 영상물(사진-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유적전시관’은 백제시대 유물뿐 아니라 왕궁리 유적이 형성되기까지 역사적 내용의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백제 장인의 숨결과 손길이 느껴지기까지, 익산시의 문화적 노력은 노력 이상 국민에 대한 배려와 헌신에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천년 저편 백제인의 향수와 백제 수도로서의 ‘터전’과 생활방식이 현재인의 ‘감성’으로 전해오는 데서 뚜렷이 드러난다.

<서철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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