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인생을 공부하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진료하고 대면하는 하성천 원장
“의료인으로서 군민들을 위해 더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시사매거진=차홍규 교수] 인간은 태어나면 살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형태의 질병에 걸리거나 생리적인 구조로 아픔을 느낄 수 있고, 여성들은 남성과 달리 임신과 출산이라는 숭고한 사명이 따라 붙는다. 한성천 원장과는 필자가 중국에서 귀국 후 한국조형예술원(KIAD) 석좌교수로 부임하면서 KIAD 하동캠퍼스의 조그만 행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참석하고 보니 음식들이 잘 차려져 있어 먹어보니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점의 맛이 아니라 필자의 어머님이 해 주던 음식이라 너무도 환상에 젖은 나머지 과식을 하게 되었다. 또 다시 하동 갈 기회에 몇몇이 음식을 나누는데, 색다른 음식이지만 또다시 환상에 젖어 맛을 보다보니 궁금하여 도대체 이음식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한국조형예술원 학장인 가람 김성수 교수에게 물어보니 하동군에서 주민을 위하여 여성의원을 설립하였는데 원장의 부인께서 이토록 정성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편을 수소문 하여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참으로 첫 인상이 소박하고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호인(好人)을 만나다보니 작심하여 늦도록 마시며 흥겹게 대취하였고 덕분에 물 맑고 경치 좋은 하동에 하룻밤을 머물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한 원장 얼굴이 편안하고 온화하여 집안이 한의사 집안이거나 아니면 마을 유지 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어릴 적 추억을 물어 보았다.

하동군 여성의원 한성천 원장


어릴 적 추억은

경남의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라는 말만 들어도 언제나 설레 입니다. 꼭 늦은 봄밤의 그리움 같은 것이죠, 또한, 고향 진주는 저에게는 늘 청춘의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과 초 .·고등학교와 경상대학교 의대까지 졸업 하고 산부인과 전문의 까지 여기서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창원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려웠다고 들었는데

내 어릴 때를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허전함입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24시간 어느 한곳이 비어 있는 느낌, 아버님의 부재... 한 단계 한 단계,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될 때 이 부재는 저의 선택을 무척 힘들게 하였습니다., 무엇이라고 표현하기도 참 그렇습니다만. 집안환경이 너무도 열악하여 생활자체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회상 하게 되면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저의 무의식적인 버릇이 하나 있는데 바로 먼 산 바라보기입니다. 아마 이때부터 남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생긴 버릇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력이 아직도 좋습니다. 교수님들도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면 눈 좋다고 마무리를 늘 저에게 시키시곤 하셨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어린 시절 생각해 보면, 제가 힘들었던 상황 보다는 제 나이 7세부터 혼자되신 어머님의 고생이 먼저 떠 올려 집니다, 이것은 오십년간 저의 일생의 화두가 되었고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유년기 시절에는 집 근처에 진주 법원이 있어 재판하는 광경을 종종 구경하기도 했지요...아마 판사에 대한 꿈이 있었던 것도 같기도 합니다. 그 후 집안사정 때문에 실업계 (진주기계공고)로 진학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번째 인생의 고비였습니다. 참 많은 방황과 번민 속에서 진짜 교과서에 나오는 말처럼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장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조금 더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였고, 그 결과 의대를 진학하였고 의사의 길로 들어섰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과 집안 식구들의 도움으로 뜻을 이루지 않았나 생각하고 깊이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교육 단계를 거치면서 많은 어려움 속에도 만난 은사님들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께 마음 속 깊이 존경한다고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럼 왜 하동으로 가게 되었는지?
하동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전국에 산부인과 취약지역이 있다는 것을 신문기사로 본지가 벌써 10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구 감소의 절박함과 농어촌 지역의 산부인과 관련 취약계층에 대한 현실감이 저를 움직이게 한 것 같습니다. 마침 하동군에서 의료 취약 분야인 산부인과 의사를 초빙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의 어릴 적 생각을 하였고, 주저함이 없이 바로 지원하였고 지금까지 열심히 진료하고 있습니다. 이곳 하동군은 연세가 많은 여성분들과 함께 결혼이주여성이라고 불리는 다문화 가임여성이 많은 곳입니다. 이 모든 분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 분들의 불편한 몸들을 치료해주면서 웃는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삶에서 깊은 고민이 해결되었을 때의 희열과 보람을 저 역시 공유하면서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낍니다. 이곳에서의 산부인과 의사생활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의 보람은 진짜로 크고 이를 통해 저 자신의 삶도 행복해 지는 것 같습니다. 제 선택에 대하여 안사람과 함께 기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곳 하동군 여성분들의 기본 건강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가임여성들의 임신조리와 출산 및 산후조리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하동군에 산부인과 병원은 오직 저 하나 뿐이고 의사도 저뿐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동군에서 이렇게 주민들을 위하여 산부인과 의원을 운용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며 앞으로도 열심히 진료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의료의 편중이 심각한데

이제는 대한민국도 의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문의 선생님들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거의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시골에 사시는 분들도 우리의 국민입니다. 이제는 전문의들도 농어촌과 같은 의료 취약지역에서 의료약자를 위한 의술을 펼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다 함께 조금씩 가난하기프로젝트라고 이름 부치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전문의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지 말고 정부에서도 합당한 정책을 뒷받침하여 주어 의료와 행정이 병행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많은 분들이 공감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 합니다.

 

지금 추진하고 계시는 것은 ?

특별하게 추진하는 계획은 없지만, 낙후된 지역 주민들에게 의료혜택을 드리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의료봉사 형식으로 하동군 오지 곳곳을 찾아가 치료하고 상담하고 있습니다. 하동이라는 지역이 인구에 비하여 지역이 워낙 넓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많은 주민들이 의료 사각지대가 있는 것이 아픈 현실입니다. 하동군 의료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의료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군민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도움을 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분들을 대하면서 앞선 삶을 살아가신 어르신들께 삶의 지혜도 얻고 또 배우고 있습니다. 더 큰 인생을 공부하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진료하고 대면하고 있습니다.

 

의료인으로 필자와 같은 예술인을 보면 느낌이?

대학을 입학하고 전문의가 되기까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불행하게도 예술이라는 분야를 경험하여 본 것이 창피하지만 극히 드물었습니다. 음악회는 몇 번 가본 적은 있었습니다만, 우리 같은 의사에게 예술은 그저 상상속의 그대였습니다. 때마침 하동에 한국조형예술원이 설립되면서 교수님들로부터 예술에 대해 설명도 듣게 되었고 부족하지만 나름 약간의 이해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는 거구나 하고 제 나름으로 판단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평소 주위를 눈 여겨 보지 않다가 주변 곳곳에 녹아있는 사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술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배운 것이 예술은 내 주위에 멀리 있지 않고 생활 속에 같이 어울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인 또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개성이 있어 일반인들과 달리 조금은 평범하지는 않겠지만 지역 주민과 어울릴 수 있는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단견이겠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예술 또한 우리들의 삶을 치유하는 또 다른 방향의 치료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술인들이 작품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 기쁨과 안식을 주는 것을 보고 미약하겠지만 참여하고 싶고 동질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술의 대중화에 대하여 한 말씀을?

제가 감히 예술의 대중화에 대해서 무슨 지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처럼 남녘의 끝자락인 이 멀고 먼 하동에 예술원이 들어와 지역민과의 교류하는 것을 보고 예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의 대중화에 대한 의견보다는 한국조형예술원(KIAD)과 예술인들에게 작은 부탁 하나로 이 물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더 길게 머물러 주십시오. 예술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꼭 하동에서 피워 주시길 바랍니다.’ 공유하는 문화예술 모두의 예술 도시 하동을 꿈꾸어 봅니다.

 

# 필자는 북경의 칭화대학 미대 교수를 정년퇴직하고 귀국하여 많은 분들을 만나 교류를 하고 있다. 사람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다보니 여러분들을 만난다. 한성천 원장은 미술을 좋아하여 바쁜 시간을 쪼개어 토요일만 개설하는 특수과정인 한국조형예술원(KIAD) 하동 캠퍼스의 목조형 기초과정(아름다운 목가구 만들기 과정)에 입학한 학생으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한원장의 생각됨이 필자를 감동하기에 충분하였다. 필자 역시 차남으로 옛날 어른들이 그랬듯이 장남선호 사상으로 형과 달리 정규대학도 못나오고 어렵게 학업을 하였지만, 한 원장 역시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스승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으리라.

한성천 원장은 스승님과 친척들 덕분으로 많은 도움 속에 학업을 마쳤다하지만 필자도 교직에 오래 몸담은 사람으로, 어디 세상사가 그토록 일방적이겠는가? 학생으로서의 도리와 예의를 지켰기에 스승의 도움이 무한하였을 것이고, 친척으로서 어머님의 품격이나 학생 한성천의 됨됨이가 올바르기에 친척들이 십시일반 도와주었을 것이다.

어렵게 공부한 의사로서 젊은 의사가 아닌 이제는 관록을 겸비한 전문의이기에 도시에서 개업하면 당연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풍요한 가운데 도시인으로 문화생활도 영위할 수 있겠지만 한 원장 두 부부는 의료취약지역인 하동군이 설립한 조그만 의원에서 박봉을 받으면서도 하동 산골마을에 사는 것이 그리도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필자의 작품화두는 물질적 풍요로 인간은 행복한가?’이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현대인들은 이전의 인류가 상상치도 못하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풍요로 현대인들이 이전의 인류보다 더 행복한가?’ 라는 질문에 선뜻 라고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글을 쓰면서도 언제 날 잡아 하동에 하루 묶으면서 또다시 맛난 음식을 앞에 놓고 한원장과 대작을 하고 싶음은 음식도 음식이겠지만 한 원장을 그리는 필자의 마음이리라. 세상이 돈만 쫒아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고급 술집에 가서 양주에 귀한 안주로 멋 부리며 호기 있게 마시는 것도 나름 좋겠지만, 좋은 사람과 어울려 하동의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소박하지만 향토의 재료로 만든 맛난 안주에 하동 막걸리로 대작하는 그 즐거움이야 어디 도회지의 달짝지근한 양주 맛에 비교가 되랴?

필자보다 한참 후배인 한성천 원장. 그러나 어디 세상이 나이로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한 원장 같은 사람들이 바로 살아있는 이시대의 스승이고 우리나라를 이끄는 힘일 것이다. 참으로 마음까지 기분 좋은 인터뷰였다.

 

차홍규 (車鴻圭)

미술학사, 석사, 공학박사
기능올림픽 명장부 심사위원, 서울국제평회미술제 심사위원장 등 다수
88올림픽 기념 공모 작품전 서울시장상 및, 장관상 등 다수
개인전 55회 미주, 유럽, 아시아 등 비엔날레 등 초대전 300여회
한중수교 20주년 기념작가(한국, 중국)
중국 북경 청화대학 미대 정교수 정년퇴임.
, 한국조형예술원 석좌교수, 한중미술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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