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유산 넘어 세계인의 유산으로 재조명

무성서원 전경 

[시사매거진/전북=이용찬 기자] 지난해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전북 정읍의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과 소수서원, 남계, 옥산, 도산, 필암, 도동, 병산, 돈암서원 등 한국의 9개 서원을 하나로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등재 1주년을 맞는 9개 서원들이 각 지역에서 다양한 지역별 행사를 마련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이들 서원들 가운데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발자취와 함께 1,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정읍 ‘무성서원(원장 이치백)’의 문화와 이곳의 문화사적 가치가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무성서원은 조선조 말기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에도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헐리지 않았던 서원이다. 과거 남북국시대 태산군(泰山郡)의 치소(治所)이던 이곳은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로, ‘무성서원’은 이 마을 중앙에 소박하지만 독특한 구조로 배치돼 있다.

우리나라 서원 건축물은 대부분,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재, 서재가 한 공간에 배치되는 형태로 꾸며져 있다. 하지만, 무성서원은 이들 모두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대신 서원 중앙에 사당과 명륜당인 무성서원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이 담으로 둘러져 있다. 서원 왼편의 두 비각 또한 담으로 둘러쌓여 있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공간들은 그 외부의 담 밖에 소재해 있다.

이 무성서원의 역사적 기원은 남북국시대, 이미 중국인들에게도 ‘당송시대 100대 시인’으로 불리던 최치원이 귀국한 후, 문란한 국정을 바라보며 외직을 자원하여 처음 이 지역의 태수(太守)로 부임하고 선정을 베풀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현재의 무성서원

최치원이 857년에 태어나 가야산으로 사라진 시기는 그의 나이 40세경인 897년 무렵이다. 그가 중국에서 국내로 귀국한 시기는 29세인 885년경이다. 남북국시대 최치원이 귀국해 국내에서 보냈던 시기는 혼란 그 자체, 격동의 시대였다. 886년 헌강왕(憲康王)이 죽고,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헌강왕의 동생이던 황(晃), 정강왕(定康王)이 재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 정강왕이 재위 1년여 만에 급사하자, 여러 곳에서 모반이 발행했고, 이 과정에서 정강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이가 그의 여동생인 만(蔓)이다. 훗날의 진성여왕(眞聖女王)이다. 888년 경, 진성여왕은 평소에 각간 위홍과 내통하면서도, 남몰래 미소년들을 궁중에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일삼아 나라가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정 또한 극도로 문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최치원은 외직을 자청했고, 890년(진성여왕 4)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인 과거의 태산군(泰山郡) 태수(太守)로 부임하여 약 3년여 동안 봉직하며 선정을 베출었다. 당시의 태수 부임은 그가 외직을 자청해 처음 맡은 자리였다. 그가 외직의 태수로 근무하며 위안으로 삼았던 곳이 바로 현재의 보물 제289호,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정읍 피향정(披香亭)이다. 당시의 피향정은 상연지와 하연지(下蓮池)가 있었다.

최치원의 태산태수 재임시기는 890~892년 사이라고 학계는 판단하고 있다. 과거의 태산군 백성들은 최치원 태수가 떠나자마자 생사당(生祠堂) 태산사(泰山祠)를 짓고 그를 배향했다. 생사당 태산사는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며 공식적으로 그를 배향하는 사당 태산사(泰山祠)로 다시금 명명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을 근거로 하여 광해군 7년인 1615년 칠보면 무성리에 태산서원(泰山書院)이 세워졌다.

이것이 다시 숙종 22년인 1696년 사액(賜額) 무성(武城)이 내려짐에 따라 현재의 무성서원으로 개칭되어 현전한다. 이처럼 유서깊은 역사로 인해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 당시 호남 지역에서는 장성의 필암서원과 광주의 포충사 등과 함께 전북 지역 서원으로는 유일하게 무성서원 등 세 서원이 헐리지 않았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이 태산군에서 뿌리 내린 풍류적 삶과 선비사상은 이후 고려시대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 ~ 1396), 그리고 고려 선가의 백운화상(白雲和尙) 등의 삶으로도 이어졌고, 조선 초기에 다시금 이 지역의 풍류적 삶으로 자리잡게 했던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 ~ 1481)에 의해 다시금 호남시단(湖南詩壇)의 호남정신으로도 거듭난바 있다.

이러한 이 지역의 선비정신이 정극인의 정신을 이어 이 지역을 매개로 살았던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 취은(醉隱) 송세림(宋世琳,1479~1519)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물재(勿齋) 안의(安義, 1529~1596), 한계(寒溪) 손홍록(孫弘祿, 1537∼1610) 등의 인물들로 이어지게 했다.

무성서원의 역사는 이후의 지역 역사와도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데, 특히 정극인에 의해서 처음 조선에 뿌리내린 최초의 향약 보물1181호 ‘고현동향약(古縣洞鄕約)’과 ‘호남절의록’, ‘태인 방각본’ 등이 무성서원을 통해서 발간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기의 동학농민혁명, 중기의병, 후기의병, 3·1운동, 후천선경의 보천교, 무극대도(無極大道) 등 이 지역의 다양한 문화로도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최치원이 뿌리 내린 이 지역의 정서가 후대로 이어지며 점차 심화, 확장되었고, 현재의 문화적 가치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읍시가 세계문화유산 ‘무성서원’을 지역의 남다른 문화자원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과거의 선비정신을 현재적 가치로 잇고자 하는 문화적 계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정읍시는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맞아 축전 행사로 8일 무성서원에서 ‘국악은 풍류를 타고’를 주제로 KBS 국악한마당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무관중 녹화 방식으로 진행, 오는 25일 KBS1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이날 무관중 공연은 왕기석과 박애리, 이선수, 백제풍류회, 정읍수제천보전회 등이 참여해 무성서원의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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