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고장인 안산의 ‘성호기념관’ 이익의 이상세계 보여주다

안산시 상록구 성호로 131에 위치한 성호박물관은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 및 실학사상을 소개하는 전시실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체험전시실 등을 갖추고 체계적인 전시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시사매거진=이관우/오경근 기자] 지난 5, 코로나19생활방역으로 전환된 가운데 도시민들은 집밖으로 나가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혼자 혹은 가족끼리 산책하며 기분을 전환시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까닭에 인근 공원이나 유원지 등은 생활 속에서 소소한 행복과 재미를 주는 현대인의 쉼터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그중 수도권 가까이에 위치하며 각종 푸르른 식물과 함께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은 물론 역사인물의 일대기를 알 수 있는 기념관으로 구성돼 13조의 재미와 유익함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안산시 상록구 이동에 위치한 안산식물원과 성호공원 그리고 성호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성호박물관>은 실학의 대종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호 이익(1681~1763)’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익 선생은 퇴계 이황을 잇는 남인계열의 학자로서 율곡 이이의 경세학문과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아 역사, 문학, 지리, 천문, 의학, 국방 등 모든 분야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과 일본을 통해 전해지는 서양문물도 적극 수용했다. 또한 이익 선생은 해박한 지식과 타고난 소양을 바탕으로 대표적 실학저서 <성호사설><곽우록>을 기술했다. 이러한 저서는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실학의 토대를 탄탄하게 구축한 실천적 인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통해 안정복, 이중환, 채제공, 이가환 등의 실학자들이 대를 이었고, 이후 정약용에 의해 실용화 된다.

성호박물관 입구에는 성호 이익의 대표적인 저서로, 학문과 사물의 이치에 대한 내용을 모아 엮은 백과사전적 유서인 ‘성호사설’을 본뜬 조형물이 놓여있다.

서울에서 출발해 1시간여 달리다보면 안산시 상록구 수인로 인근에 안산식물원이 위치해 있다. 부담 없는 무료주차와 함께 무료 개장을 하고 있어 열대지방 식물, 중부지방 식물, 남부지방 식물들을 골고루 관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놓인 의자와 테이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색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는 작은 연못에 수련은 물론 잉어, 거북이, 자라 등이 생장하고 있으며 예쁜 꽃과 푸른 관목들이 있어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더한다.

또한 식물원을 벗어나 성호공원으로 이어진 산책로로 들어서면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를 볼 수 있다. 가족끼리 돗자리를 깔고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이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조금 더 걸어가면 5분 거리에 <성호기념관>이 나온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나지막하게 지은 현대식 직사각 건물이다. 이곳에는 옛 선비들의 복색을 볼 수 있는 전시관과 함께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자료실이 있고, 성호 이익 선생의 일대기를 한 층씩 오르며 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또한 실학의 고장인 안산의 옛 지도 부계팔경도도 있다.

 

성호 이익의 가계도와 선진문물 대하는 높은 식견

이익(李瀷) 선생의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자신, 호는 성호(星湖). 8대조 경헌공 이계손이 성종 때 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등 대대로 명문가의 후손이다. 증조부 소릉 이상의는 의정부좌찬성, 조부 이지안은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부친인 매산 이하진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 등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행을 통해 선진문물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하지만 1680(숙종6) 경신환국으로 인해 조정에서 쫓겨나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681(숙종7) 부친 이하진과 후부인 안동권씨 사이에서 성호 이익이 태어난다. 전부인 용인이씨 사이에서 32녀가 출생했고, 후부인 안동권씨 사이에서 21녀 중 막내로 출생한 것이다. 모두 합해 8남매다.

1682(숙종8) 6, 이익이 두 살 될 무렵 유배지에서 부친을 여의고 다시 모친과 함께 선영이 있는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瞻星里, 현 상록구 일동)로 돌아온다. 그리고 스무살 차이 나는 둘째형 이잠(1660~1706)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장한다. 홀어머니 밑에 10세가 되도록 병약했던 이익은 25세 되던 1705(숙종31) 증광시에 응시해 합격하였다. 그러나 시소에서의 주제가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답안지에 적은 이름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불합격 처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회시에도 응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어 1706(숙종32) 9, 둘째형 이잠이 남인 출신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훗날 경종)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투옥된 뒤 여러 차례 고문을 받던 중 47세를 일기로 옥사한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이익은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선영이 있는 안산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한다. 자신의 호도 별을 우러러 본다는 뜻의 마을 이름 첨성리에서 성()을 따고, 인근에 위치한 호수의 호()를 따서 별이 머무는 호수라는 뜻의 성호(星湖)라고 쓴다.

무엇보다 이들 8남매는 우애가 깊어 조상에게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과 기승을 잇도록 했으며 이익이 재야의 선비로 일평생 지낼 수 있도록 보조했다. 특히 이익은 둘째형 이잠이 죽은 후에도 셋째형 이서(李漵))와 사촌형 이진(李溍))과 교류했으며 우애를 돈독히 했다. 1715년 모친 안동권씨가 사망했을 때도 이익이 집안의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로 돌려보냈으나 형제들은 오히려 논밭을 때주어 그의 생계를 도모했다.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과 후학 양성

성호 이익 선생은 1713(숙종39) 33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한다. 이 해는 외아들 이맹휴도 태어난다. 그는 <맹자질서>를 완성하였으며 제자들 중 외교관이자 역사학자인 순암 안정복의 재능을 특별히 총애하여 일평생 서신을 주고받으며 지도한다. 무엇보다 안정복은 저서를 출간할 때마다 은사인 이익 선생에게 보내 감수, 교정, 교열을 받는 정성을 보인다.

1763년 이익 선생이 사망한 후에도 안정복은 스승의 저서인 <성호사설>의 간행과 보급을 위해 노력했고, 이를 일부 수정하고 가필하여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기도 했다. 특히 천문, 지리, 의약, 율산, 경사에 큰 지식을 남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업적을 남기는 데 일조했다.

안정복 외에도 성호 이익 선생은 18세기 변화의 조짐을 읽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많은 제자를 양성한다. 특히 남인계열 중심의 인물로 자리하며 실학사상을 꽃피운다. 하지만 천주교와 서학의 수용에 개방적이던 그의 학풍을 둘러싸고 제자 간에 논란이 일어 결국 남인성리학파와 실학파로 분기된다.

이익 선생의 묘는 선생이 평생을 거주하며 학문의 커다란 업적을 남긴 첨성리(지금의 일동)에 위치해 있다.

경세치용의 실학사상 & 이익의 이상세계

첫째, 경세치용의 경학을 수립했다. 그는 평생 조상이 물려준 첨성리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면서 국가부흥을 위한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실증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전 불교와 세유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사농합일을 주장하였으며 과거제도의 재검토를 제시했다. 또한 중농주의를 표방해 토지 경작을 국가와 개인에 있어 경제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토지의 고른 분배를 강조하였으며 중국의 정전제를 바탕으로 한 한전법의 시행을 제창하였다.

둘째, 민족의 주체성을 밝혔다. 성호 이익 선생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화주의를 배척하며 중국이 유일한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양의 각국이 각기 군주가 있어 자기 역내를 통치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각 나라마다 독립적인 주권이 존중되어야 하고, 조선 역시 자아의 자각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계통을 세워 재구성하기 위해 삼한에 정통을 두는 삼한정통론을 강조하였다. 단군조선에서 비롯해 기자조선으로, 다시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우리나라 역사의 변천 과정과 더불어 계통과 정통을 재확립하였고, 이어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역사를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중화주의의 절대성을 희소시켰다. 현실성에 입각한 역사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서학을 합리적으로 수용했다. 성호 이익 선생은 서양과학 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인식했다. 또한 실증적 방법론에 의한 경세치용적인 경학 연구로 사회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는 우주의 운행질서와 태양, 지구, 달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방대한 저술을 통해 소개했으며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장해 놓았다.

넷째,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당쟁의 폐단을 지목하였다. 붕당의 근원이 과거제도에 있으므로 인재등용의 방법을 고쳐 문벌이나 당색 중심의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잦은 과거시험 때문에 합격자가 너무 많아 붕당이 형성되는 폐단이 있으므로 과거시험을 줄여야 한다고 하였다.

다섯째, 중농주의 사상을 완성했다. 농업을 기본으로 하여 근검과 절약을 실천하며 절제를 바탕으로 상업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돈의 유통을 막고,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첨성리에서 농민들과 함께 지내며 농촌사회의 경제적 몰락을 인식한다.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고리대 자본으로 농지가 빼앗기는 것을 감안해서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균전제(균전론)’를 제시한다.

여섯째, 가혹한 노비제와 서얼 차별의 사회상을 비판하였다. 천민도 과거에 응시하게 하여 다양한 인재를 등용시키고, 노비의 수를 줄여 양민을 늘리도록 제안하였다. 그럼으로 국가의 조세와 부역 또한 증가해 재정이 확대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성호 이익 선생은 평소에도 검소하고 간소한 생활의 예를 강조하여 사리의 분별과 겸손은 물론 근검절약과 분수에 맞는 예식을 생활화 하도록 가르쳤다. 그의 이러한 제도 개혁안들은 이상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익 선생은 1763년(영조39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학풍은 안정복, 이기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선생의 묘 바로 옆에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사원이 세워져 있다.

생전의 공로와 사후에 재조명 받다

숙종 이후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1727(영조3) 선공감가감역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성호 이익 선생은 관직을 사퇴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서학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천문략> <천주실의> <주제군징> <칠극> <진도자중> 등을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그의 문하생들도 일부 희생되었다.

1729년 성호 이익 선생의 나이 49세 때 나라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을 듣고 몇 차례 벼슬을 내리고자 불렸으나 이 역시 한 번도 응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선비는 농사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사농합일유교의 이론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이후 우로예전에 따라 노인직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만년에는 외아들을 먼저 보내고 집안에 칩거하였으며 등과 가슴에 악성종기가 심해져서 고통 받았다. 그리고 70대 후반에 들어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하지 못했다. 1763(영조39) 12월 정침에서 사망하니 그의 나이 향년 83세였다. 조정에서는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추증하여 생전의 공로를 추모하였다.

사후 성호 이익 선생의 저서들이 재간행 되었다. 그러나 1801년 정조 사후 그의 학파에서 배출된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일가 등이 서학도로 몰려 숙청되는 바람에 다시 그의 학문은 금기시 되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 집권으로 재조명 받기 시작한다.

그의 묘소는 직계 후손이 없어 방치되었다가 19675성호 이익 추모회가 결성되어 재정비 되었다. 묘소는 물론 묘비와 향로석, 망주석 등이 새로 세워졌다. 오늘날 첨성리가 위치한 안산시에서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보여주는 <성호기념관>을 건립하고 1996년부터 해마다 성호문학축제를 거행해 그의 정신과 사상을 기리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