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근 · 현대를 살다간 간재 전우의 제자들

[시사매거진/전북=이용찬 기자]  지난 2010년 9월, 어느날, ‘갑술 국월 이십일 친목 이십주년 내장사 기념촬영(甲戌菊月二十日親睦二十週年內藏寺記念撮影)’이라는 선명한 글씨가 표기된 76년 전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 바 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더 10년이 지난 2020년이 되었지만, 이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은 여전히 미스테리다.

1934년 9월, 어느날 간재 전우의 제자들 15명이 각각 기생 1명과 택시기사를 대동하고 내장산 내장사 대웅전에서 이날의 만남을 기념했던 사진

2010년 처음 이 사진을 기자에게 건네 준 생전(2010년 9월, 80세)의 故 유병현은 17명의 인물 중 사진 맨 우측의 바라리코트의 택시기사와 역시 그 옆 바바리코트의 여 기생1명을 제외한 나머지 남성 15명이 모두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라는 사실을 밝힌바 있다.

일제 강점기 왜세를 피해 16년 간 군산과 왕등도, 계화도를 떠돌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제자는 그동안의 조사를 종합해 볼 때, 약 3,000여 명이 넘는다. 따라서 2020년 기준, 86년 전 사진 속 15명의 이름들을 알아 내기란 순탄치 않은 작업일 것이다. 전 간재의 제자들 중 현재까지 잘 알려진 인물로는 오진영(吳震泳), 최병심(崔秉心), 이병은(李秉殷), 송기면(宋基冕), 권순명(權純命), 유영선(柳永善) 등이며, 이 외에도 약 3,000여 명이 더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5명의 인물들을 우선 잘 알려진 인물들로 잠정 특정하고, 좌측부터 ①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 1891~1974), ②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 ③ 최병심(崔秉心), ④ 송기주(宋基周), ⑤ 이병은(李炳殷), ⑥ 김병준(金炳駿), ⑦ 김택술(金澤述), ⑧ 오진영(吳震泳), ⑨ 매헌(梅櫶) 유원여(본명 유일선), ⑩ 유영선(柳永善), ⑪ 양00, ⑫ 정읍권번 기생, ⑬ 황00, ⑭ 오00, ⑮ 김00, ⑯ 한00, ⑰ 택시기사 등으로 추정하고 추적해 왔다.

이 과정에서 ②의 유재와 ④의 송기주가 형제일 가능성이 논의되었지만, 현재까지도 15명의 유학자 중 본명이 확인된 인물은 ② 고(故)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과 ⑨ 고(故) 매헌(梅櫶) 유원여, 2명 뿐이다. 그동안 ① 양재(陽齋) 권순명의 경우,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초상화로는 특정 받지 못했지만 권순명이라 표기된 이름의 초상화가 현존하고 있어 같은 인물로 잠정 특정해 왔다.

실제로 성신여자대학교 동양미술사 허영환 교수의 석지 채용신의 작품 연보에도 최초 1871년 대원군 이하응상을 시작으로 헌종(憲宗) 어진(御眞)까지의 작업 이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 1851~1916) 상(像)을 시작으로 1910년 칠광도(七狂圖)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애국지사들의 상(像)을 그렸지만 여기에 양재 권순명의 그림은 없다.

이 사진은 1934년 단체 사진 속의 권순명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훗날 신태인 석강 도화소를 통해 그려졌던 것으로 보이는 권순명 노년의 실제 초상화를 정읍 옥상달빛 사진관의 도움으로 만들어 본 것이다.

하지만 순창 훈몽재(訓蒙齋)의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 산장은 “사진 속 인물이 닮긴 했지만 단발을 하신적이 없다”며 권순명 선생의 얼굴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단발이어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초상화 속 인물이 턱 선은 다르지만, 얼핏 권순명과 닮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② 고(故)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의 경우는 잘 알려져 있듯 고(故)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의 친부(親父)이자, 송하진 전북도지사에게는 조부(祖父)가 되는 인물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전 전주대 송하선 교수의 증언이 있었다. ⑨ 고(故) 매헌(梅櫶) 유원여(본명 유일선)의 경우는 사진을 건네줄 당시 고(故) 유병현이 매헌 자신의 친부가 맞다고 밝힌 바 있다.

생전의 유병헌은 기자에게 “지금의 내장산 대웅전은 보천교 건물을 가져다 놓아 그런 것인지, 예전처럼 부안의 개암사(開巖寺)처럼 예쁜 문창살의 대웅전 모습이 아니어서 아쉽다”며 “내가 유년기에 아버지가 내장산 대웅전 앞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면 문창살이 너무나 멋졌다”고 하여 사진 기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을 밝힌 바 있다.

양재는 18세가 되던 1908년 6월에 목증리(穆中里)의 간재를 찾아가 처음 인사 한 후, 7월에 부친의 명으로 간재에게 집지(執贄)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때 간재가 크게 기뻐하며 “우리 문하에 훌륭한 인재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양재는 16년 간 군산, 왕등도, 계화도에서 공부하는 동안 늘 스승을 모시고 천인성명(天人性命)의 비전(祕傳)과 성사심제(性師心弟)의 비결(祕訣)을 듣고 열복(悅服)하며 돈독히 믿었다. 문장 또한 여러 제자들 중에서도 뛰어났는데, 당시의 제자 1천여 명 중에서 훈재(薰齋) 김종희(金鍾熙),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과 함께 화도(華島) 삼주석(三柱石)으로 역할하고 스승이 세상을 떠났을 때 1년여 간 심상(心喪)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보면 1908년 18세의 양재는 1934년이면 약 44세의 나이다. 그렇다면 고당 김충호 산장의 말처럼 사진 속 인물은 양재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양재 권순명이 아니라고 해도 이들을 추적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 일 것이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호남, 특히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유학자들 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 또한 지역사를 더듬어 보는 일이다.

사진 속에서 보이는 화려한 문창살은 사진의 표기 그대로 갑술년(甲戌年), 즉 1934년이다. 아버지 신광흡과의 인연으로 1872년 내장산 상량문을 썼던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내장사 법당 상량문(上樑文)에 내장사 대웅전이 ‘네 번 불타서 다섯 번째 세웠다(四火五建리)’라고 기록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1934년 사진 속에 보이는 대웅전은 내장산 내장사(內藏寺)의 다섯 번째 대웅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진은 6.25 전란 중 소실된 내장사 대웅전으로 대체 되었던 보천교 보화문 대웅전이 소실되었던 2012년 폐허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진 속 1934년 내장사 대웅전은 3년 후인 1937년에 다시 소실되었고, 다시 1942년 경 새롭게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된 사진은 현재 추적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여섯 번째 대웅전마저 6·25 전란으로 또다시 소실되었다. 정읍 보천교(普天敎)의 보화문(普化門)이 그렇게 다시 일곱 번째, 내장산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가 2012년 또다시 소실되어 현재는 여덟 번째, 대웅전이 불자와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이 사진은 눈이 귀했던 지난 2019년 겨울, 국립공원관리공단 내장산사무소 유종섭 과장이 기자에게 보내준 사진이다.

1934년 내장산 내장사 대웅전 앞에서 기념촬영에 나섰던 전북의 마지막 유학자들의 사진은 이런 점에서 여러 의미가 있다. 당시 유학자들은 ‘부끄러워야 사람’이라는 명제 아래, 윤동주의 ‘서시’처럼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식자(識者)들의 자유롭지 못한 ‘나와 세상’에 대한 고뇌짙은 모습으로, 촉망 받던 기생은 더 없이 드높은 콧대를 곳추세운 모습으로, 잘나가던 택시기사는 더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그날의 만남을 기념했다.

이들이 남긴 발자취를 단순히 친목 20주년으로만 본다면 그 역사는 잊혀진 역사로 남겠지만, 격동의 시대 옛 유학자들이 일제치하에서 20여 년의 시간을 교유하며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았고, 특정한 날을 택해 만나서 이날을 기념한 것이라면, 여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작업은 마땅히 후학들이 챙겨야 할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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