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공동 구매 플랫폼 ‘피카프로젝트’
《Keith Haring & Yue MinJun × KAWS, Zhou Chunya, Liu Ye, Zhou Tiehai, Jin Nu》 공동 투자 작품 중심으로

최고운 큐레이터. (재)한원미술관, 종이나라박물관 등에서 인턴으로 탄탄한 실무 경험을 거친 후, 학고재 갤러리에서 근무. 2014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미술관(진주) 《박기훈展》을 시작으로, 《서수영, 신소영 2인展》(2014) 록 갤러리(서울), 갤러리 《PROSPECTIVE ARTIST/15》(2015) H 갤러리(일산), 《The Art of Korea: 원점(遠點)으로부터》(2015) 권진규미술관(춘천) 등 전시기획을 하며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현재 문화예술 저변 확대를 목표로 칼럼 기고 및 강의를 하고 있다.

거리의 예술(Street Art)이라 불리는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그래피티의 어원은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비롯된 말로, 고대 동굴의 벽화나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길거리의 벽 또는 외부 장소에서 스프레이 페인터로 그린 낙서와 예술 사이 그 어디즈음에 있는 예술의 한 영역이다.

낙서와 예술 사이?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술’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성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영역이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인간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미술활동으로 표현·유희적 의미를 마음껏 표출했다. 그리고 ‘낙서’는 마음 가는 대로 적거나 그리는 등 자기표현의 욕구를 자유분방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어느 미술 평론가는 현대 사회에서의 낙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공장소에 손으로 쓰거나, 긁거나, 색칠을 하거나, 새기거나, 인쇄하거나, 접착제를 사용해 붙여서 남긴 논리정연하고 분명한 의도가 내포된 것. 낙서를 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첫째 주변 환경을 ‘자기화(personalize)’하고 통합하고 소유하기 위함이고, 둘째 낙서자의 존재를 자신과 관련 없는 불특정 타인들에게 알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 하워드 펄스타인(Howard Pearlstein)

낙서하는 자의 사상, 관념, 주장 등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켜 교류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낙서의 형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대중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몇 추상 미술가들 사이에서 낙서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핵심적인 모티브(motive)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초래된 인간성 말살과 황폐화를 비판하는 동시에 작가 내면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형식과 기법으로 본 것이다. 낙서의 조잡성과 미숙성을 추상적 미학으로 해석했고, 예술적인 수준과 가치를 갖추지 못했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바꿔 생각했다. 현대미술가들은 낙서의 다양한 표현을 이용했고, 낙서를 예술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낙서는 원시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행위로 간주되어 왔으며 독자적인 미술 장르로 용납, 인정받지 못했다. 낙서하는 사람들은 사회체제에 동화하지 않고 반항적으로 기존 체제를 조롱하고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무정부적이고, 반사회적인 주체들로 받아들였다.

그래피티 아트의 강렬한 색채와 무분별하고 지저분한 낙서라는 인식 때문에 도시의 골칫거리였다. 이러한 행위가 비주류의 언더그라운드 세계에서 주류 세계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에 의해서였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 The 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 (사진출처=피카프로젝트) 최고운 큐레이터= ‘Art in Transit’, 전환기의 예술. 해링의 공통적인 도상인 ‘빛나는 아기(Radiant Child)’, ‘짖는 개(Brking Dog)’ 그리고 방송매체의 권력에 대해 경각심을 말하는 ‘TV 머리를 갖고 있는 인간상’ 등이 보인다. 해링만의 상징적 이미지로 소비문화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Art in Transit,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키스 해링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기질을 보였고, 월트 디즈니(Walt Disney)와 애니메이션 등의 카툰(Cartoon)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76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Pittsburgh)에 있는 아이비 전문 미술 학교(The Ivy School of Professional Art)에 진학해 상업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1977년 해링은 카네기 박물관에서 열린 ‘피에르 알레신스키(Pierre Alechinsky, b.1927)’의 작품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는다. 알레신스키의 카툰적 프레임(Frame), 자유로운 표현기법과 우연성, 직관성, 자발성 등 자신의 예술세계와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화가로서의 길을 다짐한다.

1978년 피츠버그 미술공예센터(Pittsburgh Center for the Arts, PCA)에서 소규모의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뉴욕의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 이하 SVA)에 입학한다. 해링은 여기에서 설치작업과 행위예술, 비디오아트 등을 접하며 실험의 단계를 넓혀갔고, ‘케니 샤프(Kenny Sharf, b.1958)’와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를 만나면서 낙서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의 대안적 미술 환경이었던 클럽 57(Club 57), 웨스트베스 페인터 스페이스(Westbeth Painters Space), 할 브롬 갤러리(Hal Bromm Gallery), P.S.122(Performance Space 122) 등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 The 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 (사진출처=피카프로젝트)

당시 이스트 빌리지는 주류 제도권 미술계에 진입하지 못했던 작가와 여러 그룹들의 사회 참여적, 반문화적인 정신을 표출하는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진짜 모마(MoMA, 뉴욕 현대 미술관)는 여기다”라고 할 정도로 젊은 예술가들은 전시와 퍼포먼스 등으로 예술의 혼을 불태웠다. 

현대 문명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억눌린 욕망을 표출한 불법적 행위에서 그래피티 아트라는  현대회화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준 것이 ‘장 미쉘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이었다. 낙서의 무한한 표현과 자유로운 내용을 캔버스에 옮겨 표현하며, 미술 양식의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 The 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 (사진출처=피카프로젝트) 최고운 큐레이터= 지하철역에서 작업하는 해링의 모습. 화폭의 ‘나는 비행접시(Flying Saucer)’는 고도의 힘을 상징하는 비행접시가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인데, 기계문명과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결국에는 인류를 파괴시킬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1980년 해링은 뉴욕 지하철역의 빈 광고판에 하얀 분필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소비 장려 목적으로 부착해놓은 광고물, 그리고 그로 인해서 아주 더러워진 뉴욕의 지하철역에 자신의 작품을 마치 광고의 일환으로 대치시킴으로써 소비문화를 대항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맞대응한 작품을 선보였다. 당연히 ‘불법 낙서’이며, 때문에 경찰에 여러 번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해링의 친숙한 픽토그램(Pictogram)적인 간결한 선,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만화적인 도상으로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하며, ‘대중’이라는 기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해링은 지하철에 수백 개의 작업을 하며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선사했고, 이 지하공간은 해링의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실험실이자 전시장이 되었다. 

1982년 아트 딜러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는 해링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여기서 해링은 처음으로 대형 회화 작품을 전시했고, 이것을 계기로 뉴욕 타임스 스퀘어 광장에 ‘빛나는 아기’의 전광판을 설치하는 등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을 넘어 유럽의 다양한 기관들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며 높은 평가와 인기를 이어갔다.

키스 해링 Keith Haring, 앤디 마우스 Andy Mouse, 1985,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104x68cm © The 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 (사진출처=키스 해링 재단 홈페이지)

1983년 ‘펀 갤러리(Fun Gallery)’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해링은 앤디 워홀을 우연히 만났다. 이들은 예술가로서 서로에 대한 인정, 존경, 예술적 교감으로 광범위한 교류를 하며, 공동기획을 하는 등 진실한 우정을 키워갔다.

해링이 그린 ‘앤디 마우스(Andy Mouse)’는 미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미키 마우스(Mickey Mouse)와 앤디 워홀의 작품을 결합함으로써 워홀을 동일한 표상의 위치로 배치 시킨 것이다. 

“앤디 워홀의 삶과 작품이 내 작품세계를 가능하게 했다. 워홀은 나의 작품과 같은 종류의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선례를 남겼다. 그는 최초의 진정한 대중 예술가였고, 그의 예술과 삶은 20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예술과 삶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켰다. 그는 최초의 진정한 현대예술가였으며, 아마도 유일한 진짜 팝 아티스트였을 것이다.” – 키스 해링
 

미국 뉴욕 소호의 라파예트 거리(Lafayette Street)에 있는 키스 해링의 팝숍(Pop Shop) © (사진출처=구글이미지, Keith Haring's Pop Shop)

해링은 자신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작품을 떼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지하철 낙서를 그만두었다. 1986년 대중과의 융화를 위해 뉴욕 소호(Soho)에 ‘팝 숍(Pop Shop)’을 열었다.

팝 숍에서는 해링의 캐릭터가 있는 티셔츠, 포스터, 스티커, 자석 등을 판매했다. 해링의 아트상품을 통해 미국과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해링과 작품을 알리는데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1989년 해링은 ‘키스 해링 재단(The Keith Haring Foundation)’ 설립, 인종차별 반대, 반핵 운동, 동성애자 인권 운동, 에이즈 반대 운동, 어린이 자선사업 후원 등 사회문제를 다루며 지원했다. 그리고 1990년 해링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굵고 짧은 예술가적 활동은 수많은 드로잉 및 회화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주류와 비주류 상호의존적인 맥락을 허물고 예술로서 소통적 역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작품 설치 전경. © The Keith Haring Foundation, Keith Haring (사진출처=피카프로젝트) 최고운 큐레이터= 화면 가운데 보이는 것이 “빛나는 아기(Radiant Child)”이다. 힘없는 인간이나 기어가는 형태의 아기를 나타냈다기보다는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의 존재, 젊음, 에너지와 능력을 나타낸다. 정감 가는 도상으로 도시인들의 감수성을 달래주었다.

1970-80년대 미국은 진보주의적 정서와 히피(Hippie)의 산물인 저항정신이 자리 잡은 사회 속에서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상업화에 초점 되어 있었다. 낙서화는 사회에 대한 무의식의 표현으로 사회 문화적 콘텍스트(Context) 속에서 발달된 도시문화의 반영물이었다.

뉴욕 사회 지도층의 이름이 방송매체와 신문에 보도화되는 것처럼 낙서화가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도시에 알릴 수 있는 매개체로 거리나 지하철을 택한 것이다.

초기의 낙서는 이들의 반사회적 의지와 직접적인 의미 전달을 표현하기 위해 문자를 조형 언어로 활용했다. 나아가 브레이크 댄스, 힙합 문화와 섞이며 추상에 가까운 상징이나 기호로 치환되었고, 조형성이 더욱 강화됐다. 그들은 불후의 명작을 남긴다는 부담스러운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리는 과정을 놀이처럼 자유롭게 즐긴 것이다. 거리의 문화가 되었고, 소통과 교류를 시도하며 현대미술과 대중문화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예술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기에 좋은 수단으로 문화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래피티 아트는 인간 내면의 성숙을 위한 새로운 의사소통 대안문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시각적인 아름다운 미술을 넘어 어떠한 목적과 의미를 갖고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로서 미술을 바라보게 했다.

키스 해링 Keith Haring, 무제 Untitled, 1984, 종이에 분필 Chalk on paper, 104x68cm, 공동구매 금액 ₩200,000,000원(최소 100만원 단위 공동 소유 가능) © PICAPROJECT (사진=피카프로젝트 제공) 최고운 큐레이터= 미술의 대중화 선도를 목적으로 미술품 공동 구매 플랫폼 ‘피카프로젝트(PICA Project)’에서 공동 투자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2020년 6월 1일까지.

키스 해링은 그래피티 아트를 창시한 창시자는 아니다. 하지만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를 새로운 회화 양식으로까지 끌어올려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기 때문에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있다.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해링의 작품이 그려져있는 아트상품과 공익광고 등으로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탄생과 죽음, 사랑과 섹스, 전쟁과 평화 등의 예술세계를 담고 있다.

 

<참고 문헌>
1. 김다혜, 「1970-80년대 낙서화에 나타난 상징성 연구 -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2. 최미라, 「낙서화 유형으로써의 한국의 현대 작품 연구 –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작품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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