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촉발지 된 남양주의 ‘홍유릉 세계문화유산’ 찾아

[시사매거진265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전 세계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는 동안 한국사회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사람과의 사이가 잠정적 유보상태에 들어갔다. 그러한 즈음 호젓한 발걸음으로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조선 왕릉을 찾아가 본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의 유릉은 남양주시 금곡동에 함께 위치했다.[| 사진_이관우 기자

현대 사회에서 서울 근교에 위치한 조선 왕릉은 바쁜 현대인의 일상과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이지만, 과거 우리 조상에게는 생활의 연장선상에 놓인 의 장소이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는 인생의 한 과정이며 동일한 공간에서 부모와 조상의 혼과 넋을 기리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그중 대한제국 초대황제이며 3·1운동의 시원이 된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와 그의 정비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잠들어 있는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의 홍릉을 찾아보았다. 조선왕조 42기의 무덤 중 40기가 남한에 있고 2기가 북한에 있으며, 그중 38기는 왕릉이고 나머지 2기는 황제릉이다. 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홍릉과 순종황제의 유릉이 그것이다. 비록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황권을 강화하지 못한 부족함은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맞서 3·1운동이라는 민족정신을 일깨운 이곳 홍릉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주목해 볼 만한 장소이다.

홍릉은 기존의 조선왕릉 형태를 계승하고 명나라 황제의 능을 인용한 형태로 이전에 없던 구조물들이 능침 앞쪽에 세워져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홍릉찾는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후손의 눈물

지난 200559일을 시작으로 10여 년 넘게, 해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을 찾아 속죄하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자객 48명 중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손자 가와노 다쓰미와, ‘이에이리 가가치의 손자며느리(손부) 이에이리 게이코를 비롯해 일본의 시민단체인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회원 10명이다. 110년 만에 조상을 대신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립니다라고 용서를 구한 이들은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한 일이 애국이라 생각했지만, 자라면서 할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사주로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 함께 시해에 가담한 48명의 자객은 일반적으로 낭인(浪人, 무사, 건달)’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학자, 교수, 정치가, 군인, 경찰 등의 일본사회 지식인들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더욱 1948년 이후 개정된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왜곡하고 누락해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모르고 살던 일본인들은 뒤늦게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접하며 조상들의 잔인함에 탄식한다.

특히 일본 시민단체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살해 가담자 48명 중 21명이 태어난 규슈 구마모토 현에서 전·현직 교사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직시하고 파헤치며 일본인들에게 사과용서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더불어 한일 민간외교 차원에서 뮤지컬 <명성황후>700여명이 참석한 가쿠엔 대학 강당에 올려 1시간 분량의 편집영상으로 상영할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 역의 이태원 배우를 초빙해 대표곡 5곡을 청해 듣기도 했다.

이렇게 홍릉을 찾아 속죄를 빈 일본인과 시민단체 회원들은 한국에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묘인 홍릉을 비롯해 여주에 있는 황후의 생가 터 그리고 시해사건이 일어났던 경복궁 옥호루 현장 등을 찾아 참배하며 명성황후의 영혼을 위해 구복하는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산의 안중근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친다.

그들은 앞으로 일본의 역사교과서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록해 올바른 역사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서겠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일본 아베 신조 정권 아래 문부과학성(교육부)이 주도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은 지금도 계속 심화되고 있고, 일본 젊은이들의 역사관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이다.[사진_이관우 기자]

일본·청나라·러시아 이민족, ‘조선 침략쟁탈전 & 명성황후 시해

1895(고종 32) 108일 새벽,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 자객 48명이 경복궁에 있는 왕비(중전)의 침소 옥호루를 습격하여 잠옷 차림의 명성황후를 끌어내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근처 야산으로 옮겨 장작을 올리고 휘발유를 쏟아 불태웠다. 사건의 증거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행동으로, 일명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부른다.

186617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어 고종과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사이에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펴다가 1895년 수세에 몰린 일본인, 낭인(건달)’을 자처하는 일본제국주의 지식인들에게 처참히 살해되어 2년간 방치된다. 이후 1897년에 청량리에 숙릉이 조성되어 혼자 묻혀 있다가 1919년 고종황제와 함께 황제·황후 묘역으로 단장되어 홍릉에 합장되었다.

왜 일본인들은 고종황제도 아니고,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도 아니고, 일개 여성이며 왕비인 명성황후 여흥민씨(驪興閔氏)를 살해한 것일까? 무엇이 두려워 일본 지식인 48명이 낭인(건달)을 자처하며 그토록 잔혹한 살해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청나라는 물론 러시아와 일본 간 팽팽한 식민지 침탈야욕 접전에 방점이 찍힌다. 1873년 일본에서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고, 이에 맞서 고종의 친부인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해 척왜정책을 구사한다. 이어 백성과 민심을 보살피기보다는 조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강행하다가 재정적 파탄을 맞고 10년간 권력에서 물러난다.

이때 친부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종은 왕비 명성황후의 세력을 끌어들여 아버지와 맞서고, 1876년 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를 한다. 이후 1882년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이 터지고 민씨 세력이 위협을 당하여 왕비가 충주와 장호원으로 피신을 하자 다시 흥선대원군이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군대가 출동함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한다.

고종은 다시 민씨 중심의 정권을 다잡고 1884년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이를 빌미로 청나라에 우호적인 친청정책을 펼친다. 또한 1894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여 갑오개혁을 시작하자,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 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고종의 권력이 명성황후 민 씨 일가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1895108일 일본 정한론으로 사상무장을 한 지식인 48명이 낭인을 가장해 29년간 조선의 국모 자리를 지키고, 갖은 지략으로 각국의 세력을 번롱하면서 상호 견제시키고, 위태로운 시국을 교묘하게 끌어온 여걸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향년 45세의 나이다. 그리고 그들 살해범은 모두 무죄판결로 방면한 후 단발령을 반포해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홍릉 연지는 고종황제가 홍릉을 새로 조성할 때 작은 연못을 연지로 크게 확장하여 공사한 것으로,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방형 연지가 아닌 원형의 원지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사진_이관우 기자]

고종황제·명성황후의 합장릉 홍릉’ & 민족의 항전 3·1운동 촉발

1895(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명성황후의 시신은 궁궐 밖 야산에서 소각되었다. 이때 고종은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을 간다. 궁녀처럼 여장을 하고 궁녀용 가마에 올라 비밀리에 황급히 왕궁을 빠져나갔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선 후 명성황후의 존재는 일본의 압박으로 폐서인으로 강등돼 2년 넘게 숙릉에 방치된다.

이후 1897년에 고종은 경복궁 대신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치른다. 시해당한 왕비에게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를 내려 황후로 추존하고 성대한 국장(장례식)을 치른다. 명성황후의 발인 반차도는 78면으로 제작되었으며 정조대왕의 화성행차 반차도가 63면인데 비해 역사상 가장 큰 규모다. 상여를 따라간 수행원 4800여 명, 참여한 서양 외교관 60여 명, 병사와 노동 인력이 9000여 명이었다. 황후의 홍릉은 한성부 동부 인창방인 청량리(현 숭인원)에 조성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전차가 개통되고 난 후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에는 자주 찾아갔으며 무덤에 전화기를 설치해 아침마다 대답 없는 그리움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또한 1904년 덕수궁에 큰불이 났을 때는 가장 먼저 옥새와 명성황후의 사진(어진)을 챙겼다. 친부 대원군의 장례식장에는 일체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고종이지만 명성황후의 장례식과 능묘 참배에는 모습이 달랐다.

그러다가 1900년에 홍릉이 불길하다는 주장이 일어 현재의 남양주 금곡동에 홍릉을 옮겨 새로이 산릉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채결되고 능묘는 중지되었으며 1910년 한일합방 된 후 고종은 황제 직위에서 물러난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끝난 그 배후에 고종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을 협박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만든다. 그리고 19191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본에 의해 고종이 독살된다. 1898년부터 즐겨 마시던 커피에 아편독을 넣은 독차사건이 여러 번 반복되던 터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고종이 더 이상 황제가 아니므로 무덤에 능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당시 왕과 왕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은 ()’이었고, 왕의 후궁이나 종친, 왕세자와 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은 ()’이며, 폐위된 왕과 그 외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은 ()’로 불렸다. 이에 종실에서는 종친회를 거듭해 명성황후와 합장하는 대안을 마련한다. 왕비가 황후로 추존된 후 품격에 맞는 홍릉에 묻혔으니 고종도 함께 안장하면 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비문을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라고 붙였다. 대한제국 선포에 따라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능역 조성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 방식을 따랐다. 그때까지 조선 왕릉에 없던 구조물이 세워졌다. 능침의 수호석인 양()과 호() 석상 대신 능침 앞에서부터 기린, 코끼리, 사자, 해치, 낙타 각 1, () 석상 2쌍을 2단의 하대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종래의 정자각 대신 일자형의 정면 5,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다. 또한 문인석의 금관조복과 무인석의 성장이 강조되었다.
 

홍릉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로 비문에는 ‘대한고종태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라고 새겨져 있다.[사진_이관우 기자]

하지만 이러한 고종황제의 의문스러운 죽음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을 제공한다.

1919121일 당시 일본의 압박과 감시 속에 살던 고종황제가 갑자기 돌연사 한다. 그런데 그 주검의 빛깔이 특이해서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어 조선인은 모두 비분강개했고, 고종황제의 국상(인산일)33일을 기해 지방 유생들이 덕수궁 앞으로 몰려와 문상을 했다. 그리고 이틀 전인 31일에 분노와 단합을 바탕으로 민족적 대규모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된다.

지난 19세기 이래 일본은 패전국으로서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해상자위대 창설과 평화헌법 개정으로 또 다른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2006년 등장한 아베 신조 총리의 존재다. 그는 2012년에 재임해 현재까지 8년 넘게 3연임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향후 4번째 임기는 2020~2021년에 시작될 전망이다. ‘아베 4연임은 일본 젊은 층과 함께 강한 일본의 급부상을 꿈꾸며 한국 때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지난 1873년 일본의 정한론(征韓論)’과 비슷하다.

그들은 2018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2019741차 경제보복을 개시했고, 그 내용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의 수출을 규제한다는 조치다. 이어 한 달 뒤인 201982일에는 아베신조 총리 주재로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2차 추가 경제보복 차원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를 통해 아베는 자민당 당헌·당규를 4연임 가능토록 개정함은 물론, 4연임이 끝나는 2023~2024년경 개헌을 시도해 패전국의 평화헌법을 개헌해 군사무장을 한다는 계획이다. 우리는 홍유릉 세계문화유산을 둘러보며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수립하는 데 총력을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홍릉 재실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사진_이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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